1983년 이병철 창업회장 도쿄 선언으로 반도체 시대 개막
1993년 이건희 선대회장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대혁신 열어
위기 때마다 리더 강력한 카리스마 바탕 특단의 대책 마련

초격차를 자랑하던 삼성전자가 때아닌 위기론에 휩싸였다. 불행은 한꺼번에 온다는 말처럼 징후는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돌이켜보면 위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선대 이건희 전 회장 시절, 삼성은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대반전의 드라마를 썼다. 그렇기에 삼성에는 ‘위기극복’이라는 DNA가 숨어있을지 모른다. <인사이트코리아>는 6회에 걸쳐 ‘이재용의 신경영 시즌Ⅱ’ 시리즈를 기획한다. 국내외 각계 각층이 말하는 재도약의 해법을 제시한다.<편집자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 10월 27일 회장 취임 2주년을 맞았을 당시, 쇄신 방안을 묻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뉴시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 10월 27일 회장 취임 2주년을 맞았을 당시, 쇄신 방안을 묻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뉴시스>

[인사이트코리아 = 손민지 기자] 모든 분야가 그렇듯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아군과 적군은 따로 없다. 순식간에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으로 바뀐다. 인공지능(AI) 기술의 등장으로 업황 주기도 짧아지고 있다. 현재 파운드리 분야 세계 1위를 달리는 대만 TSMC 설립 과정도 드라마틱하다.

1979년 1월 1일 대만 총통 장징궈는 뉴스로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의 단교 선언을 지켜봤다. 약소국의 설움을 느끼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현실을 직시한 그는 곧장 행정원장 쑨위쉬안에게 전화를 건다.

“수천만의 살림을 책임질 반도체 전문가를 미국에서 찾아라.”

쑨위쉬안은 장중머우를 낙점했다. 6년간의 설득 끝에 1985년 장중머우는 고국으로 왔다. 그로부터 2년 뒤 장중머우는 회사를 설립한다. 이 회사가 바로 TSMC다. 영어이름 ‘모리스 창으로 세계 반도체 업계 거목이 된 장중머우 신화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이때만 해도 대만은 미국 의존도를 낮추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랬기에 반도체가 중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정반대다. 45년이 지난 지금, 미국은 중국과의 무역 전쟁 카드로 반도체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핵심파트너가 대만과 TSMC다.

반도체 산업은 미래 먹거리다. 투자되는 비용이 천문학적이다보니,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리더의 과감한 결단력이 필요하다.

최근 삼성 위기론이 등장할 때마다 나오는 것이 ‘리더 카리스마’다. 이병철 창업회장, 이건희 선대회장이 오늘날 삼성전자를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으로 만든 배경에는 강력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삼성의 OB들, 외부 재계 관계자들은 “마누라, 자식 빼놓고 다 바꿔”라는 이건희 선대회장의 ‘신경영 선언’같은 결단의 메시지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건희 선대회장이 2004년 삼성전자 반도체 라인을 직접 점검하고 있다.<삼성전자>
이건희 선대회장이 2004년 삼성전자 반도체 라인을 직접 점검하고 있다.<삼성전자>

이건희 선대회장이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한 1993년과 지금의 삼성이 놓인 상황은 다르다. 삼성전자는 인텔을 제치고 2021년 매출액 기준 세계 반도체 1위에 올랐지만, 불과 1년 만에 TSMC에 왕좌를 내주는 굴욕을 당했다. TSMC는 2022년 3분기부터 삼성전자를 제치고 정상에 올랐다. 일본과의 기술 경쟁과 품질 개선을 통해 전자산업의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 큰 과제였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최고라는 타이틀을 뺏기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다.

이재용 신경영 선언 제1조 1항 : 명확한 비전제시

지금의 삼성에 진짜 필요한 리더십이란 어떤 것일까. 이재용 회장의 신경영 선언에는 무엇이 담겨야 할까.

<인사이트코리아>가 최근 만난 전직 삼성맨 A씨는 이건희 선대회장을 가리켜 ‘철학가이자 사상가’였다고 말한다. 사원 개개인이 자기 일을 하는 게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게 만들어줬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선대회장은 “우리나라 기업들은 위기감이 없다. 안주하는 순간 죽는다”며 조직 내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지속적인 성장과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1995년 불량률이 치솟자 직원이 보는 앞에서 제품 15만대를 불태운 ‘애니콜 화형식’이 대표적이다.

2007년 D램·낸드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주가도 폭락하며 삼성전자에 이상 신호가 감지됐을 때 이 선대회장이 보여준 결단력은 현재까지도 회자된다. 당시 2분기 영업이익은 5년 만의 최저치였고 대규모 정전 사태도 발생하면서 반도체 공장이 멈춰 섰다. ‘선진 제품 비교 전시회’에서는 하이닉스가 D램의 생산성 지표인 수율에서 삼성전자를 추월했다는 충격적인 보고가 이뤄졌다. 하이닉스의 D램 출하량도 4억7000만개로 삼성(4억6000만개)을 넘어섰고 영업이익률도 18%를 기록하면서 삼성(16% 추정)을 앞질렀다.

이재용(오른쪽)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10월 25일 경기도 수원 선영에서 진행된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의 4주기 추도식에서 오너가 일원들과 이동하고 있다.<뉴시스>
이재용(오른쪽)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10월 25일 경기도 수원 선영에서 진행된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의 4주기 추도식에서 오너가 일원들과 이동하고 있다.<뉴시스>

이 선대회장은 반도체 기술만큼은 ‘세계 최고’라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강도 높은 경영 진단에 착수했다. 그룹경영 진단팀과 삼성전자 감사팀은 삼성의 성공 방정식이 왜 흔들리고 있는지, 그 근본 문제를 찾아내 본질적인 해법을 제시하는데 몰두했다.

반면 이재용 회장의 행보는 여전히 ‘정중동’이다. 그는 지난 10월 27일 회장 취임 2주년을 맞았을 당시에도 쇄신 방안을 묻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앞서 같은 달 11일 필리핀·싱가포르 경제사절단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과 21일 이 선대회장 소아암 지원사업 기념식에서 위기 쇄신책과 인사 방향, 소감을 묻는 질문에도 묵묵부답이었다. 25일 이 선대회장의 4주기 추도식은 물론 같은 날 열린 사장단 오찬에서도 경영에 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공식 메시지를 내는 것 대신 연말 인사와 해외 출장을 통한 사업장 점검, 고객사 관리에 주력하는 게 이 회장의 리더십인 셈인데 위기 속에서도 침묵하는 것은 능사가 아니라는 게 재계의 중론이다.

재계 관계자 B씨는 “글로벌 기술 전쟁에서 리더가 수장으로서의 비전을 확실히 제시해줄 때 임직원들이 동기부여를 받는다”며 과감한 결단력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사법 리스크, 주52시간 근무제, 국가지원 부족 등은 그 다음 문제라는 얘기다.

정의선·최태원…총수의 리더십은 귀와 입에서 나온다

늪에 빠진 삼성과 정반대로 성공 가도를 달리는 그룹들을 살펴보면 명확한 비전이 발휘하는 힘을 좀 더 직접적으로 알 수 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리더십은 ‘빠른 판단’과 ‘경청’ 등으로 평가받는다. 미심쩍은 게 없을 때까지 임직원들에게 송곳처럼 묻고 그에 대한 해법을 여러 경로로 듣는다는 후문이다. 정 회장은 수시로 주요 임원들로부터 1 대 1 보고를 받는데, 보통 한 시간을 넘어 두 시간에 이른다고 한다. 사내에서는 정 회장 보고를 ‘100분 토론’이라고 부른다.

지난 4일 ‘SK AI 서밋(SUMMIT) 2024’에서 유영상 SK텔레콤 대표,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 등 SK그룹 최고경영진은 AI 혁신을 주도하기 위한 비전을 밝혀 주목받았다. 이날 유 대표는 ‘AI 인프라 슈퍼 하이웨이’ 구축을 선포하며 아시아태평양 데이터센터(AI DC) 허브로 도약할 것을 선언했다. 곽 대표는 HBM3E 16단 개발을 세계 최초로 공식화하며 ‘풀스택(Full Stack) AI 메모리 프로바이더’로 성장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기조연설을 통해 SK가 국내 AI 스타트업들의 성장과 국내 AI 생태계 구축을 지원해 한국이 AI 시대에 선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기여하겠다고 밝힌 최태원 회장의 리더십은 말할 것도 없다.

이 회장은 지난 2019년 4월 “2030년까지 시스템반도체 생산·연구개발(R&D)에 133조원을 투자, 시스템반도체에서도 확실히 1등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TSMC를 2030년까지 따라잡고 파운드리에서도 세계 1등을 하겠다는 의지였다. 삼성전자는 위기의 진원지가 된 파운드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파운드리 절대강자가 된 TSMC와는 어떻게 싸울 것인가. 이 회장은 앞서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파운드리 사업의 성장을 갈망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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