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가 끌어안고 있는 해묵은 화두가 하나 있다. 바로 ‘생산적 금융’이다. 이 용어는 ‘금융의 역할은 실물경제, 즉 생산과 투자 활동을 지원하는 것’이라는 경제학의 오래된 인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일찍이 칼 마르크스도 자본의 성격을 산업자본(생산적)과 이자생산자본(비생산적)으로 구분한 바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생산적 금융은 구호로만 강조돼 왔을 뿐, 현실에서는 뿌리내리지 못한 채 미결의 숙제로 남아 있었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새삼스레 생산적 금융을 화두로 던진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그는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금융권의 ‘이자 놀이’를 비판하며 “부동산에 쏠린 자금을 첨단산업과 일상 경제로 이동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 한국에서는 왜 생산적 금융이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했을까. 첫째, ‘부동산 불패’의 신화 때문이다. 개발연대 이후 한국의 부동산 가격은 일관되게 우상향 곡선을 그렸다. 자연스레 국내 금융사들은 위험부담이 적은 부동산 담보 대출 시장에 안주하게 됐다.

둘째,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을 외면하게 만드는 금융권의 인사 관행도 걸림돌이었다. 단기성과 중심의 평가 체계 속에서는 장기적 비전을 가진 모험적 금융보다는 단기적 이익을 좇는 경향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

셋째, 금융 종사자들의 산업 분석과 신용평가 역량의 부족 역시 문제였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는 혁신 기술을 이해하고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의 양성 없이 ‘생산적 금융’을 논하는 것은 공허한 구호에 불과했다.

넷째, 정부 정책의 일관성 결여도 큰 요인이었다. 정권과 경기 상황에 따라 부동산 규제와 완화를 반복하면서 금융권은 장기적 전략을 세우기 어려웠다.

다섯째, 자본시장의 신뢰 부족 또한 생산적 금융을 가로막았다. 불공정 거래와 낮은 배당 성향, 투명성 부족 탓에 장기적 안목에서 금융서비스를 제공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렇다면 바람직한 생산적 금융의 모델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자본의 흐름에 분명한 방향성을 부여해야 한다. 단순히 자금이 돌기만 하는 구조가 아니라, 첨단기술·녹색전환·청년창업 등 사회적 필요와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분야로 흘러야 한다.

아울러 금융권 종사자들의 역량 강화도 필수적이다. 기업의 재무제표만이 아니라 기술력과 미래 가능성을 종합적으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시장 신뢰 회복도 빼놓을 수 없다. 자본시장의 투명성을 높이고 투자자 보호 장치를 강화해야만 자본이 자발적으로 생산적 영역으로 모인다.

마지막으로 정부와 민간이 균형 있게 협력해야 한다. 정부는 제도적 기반과 인센티브를 마련하고, 금융사는 자율적 혁신과 책임 있는 자금 운용으로 응답해야 한다.

다행히 최근 금융권은 조금씩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시중은행들은 혁신기업 신용평가 체계 고도화와 무담보·무보증 대출 확대를 시도하고 있다. 증권사들은 기업성장집합투자기구(BDC), 토큰증권(STO) 등 새로운 투자 방식을 통해 모험자본 공급을 늘리고 있다. 보험사들도 ESG 채권이나 기후금융처럼 사회적 가치와 수익을 동시에 추구하는 영역으로 발을 넓히고 있다. 비록 걸음은 더디지만, 과거의 부동산 편중 구조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분명 시작되고 있다.

생산적 금융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과제다. 한국 경제가 저성장과 불평등의 늪을 벗어나려면, 금융이 본연의 기능을 되찾아야 한다. 오래된 숙제를 풀지 못한다면 금융은 계속해서 부동산 담보대출에 안주한 ‘이자 장사’로 머무를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금융을 국가 성장과 사회적 가치 창출의 엔진으로 재설정할 절호의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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