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가 1967년 창사 이래 처음으로 외국인 최고경영자(CEO)를 선임했다. 호세 무뇨스 글로벌 최고운영책임자(COO) 겸 북미권역본부장(사장)이 그 주인공이다. 그동안 외국인 사장이 있긴 했어도 디자인, 연구개발(R&D), 안전 등 어느 한 부문을 맡았지 전체 경영을 총괄하는 것은 무뇨스 CEO가 처음이다.

학연·지연·혈연 등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연고주의를 벗어나 외국인을 미국 시장에서의 현대차 비중 확대라는 성과에 입각해 발탁한 혁신 인사로 평가할 만하다. 어느 새 국내 기업들에도 퍼진 관료주의와 순혈주의에 잔잔한 파문의 돌을 던졌다.

무뇨스 CEO는 언론 인터뷰에서 시장 불확실성을 돌파할 카드로 한국의 독특한 ‘빨리빨리’ 문화를 내세워 주목받았다. “현대차의 특징 중 하나가 ‘빨리빨리’ 문화인데 굉장한 강점이다. 나는 이를 ‘빨리빨리, 미리미리’ 문화로 발전시켰다. 격변의 시대에 앞으로도 ‘빨리빨리, 미리미리’ 정신을 계속 활용해 챌린지(도전)에 빠르고 유연하게 대응하겠다.”

속도를 중시하는 ‘빨리빨리’ 문화는 출발이 늦었던 한국경제의 압축 고도성장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부실공사로 상징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적지 않은 내외국인들에게 한국인의 조급하고 바쁜 속성을 나타내는 부정적 이미지로 통했다.

그렇다고 빨리빨리 문화를 무조건 나쁜 것으로만 치부할 일은 아니다. 흔히 약속한 시간에 임박하거나 다급한 상황에 내몰려서 빨리빨리 서두르다 탈이 나곤 한다. 대충대충 건성으로 땜질하거나 눈속임하다가 예상하지 못한 사고를 저지른다.

미리미리 제대로 준비하고 빨리 하는 것이라면 나무랄 게 못 된다. 미국 우선주의와 강력한 보호무역주의를 표방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의 취임을 앞두고 글로벌 산업계의 불확실성이 커졌다. 무뇨스 CEO의 발언은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전기차 보조금 폐지, 보편관세 부과,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등 어떤 규제가 나오더라도 대응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하겠다는 취지로 풀이된다.

빛의 속도로 기술 및 경영 환경이 변화하는 시대다. 최근 각광받는 인공지능(AI) 기술은 시시각각 진화하고 있다. 더불어 반도체와 나노 기술, 로봇, 사물인터넷(IoT), 바이오, 우주항공 등 4차 산업혁명 분야도 그렇다. 내연기관에서 점점 전자기기화 하는 자동차 산업, 각종 모빌리티 산업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트럼프 2기 출범으로 글로벌 공급망과 교역 환경도 큰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이런 격변의 상황에는 CEO의 빠른 의사결정이 중요하다. 머뭇거리다가 기술력에서 뒤처지고 시장점유율에서 밀리면 따라잡기 힘들어진다.

반드시 해야 할 과정을 무턱대고 거른 채 빨리 하지 않고 데이터에 입각해 창조적으로 빨리 연구개발하고 대응하는 것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는 전략이다. 지레 짐작으로 대충대충 넘어가던 것을 탄탄하게 준비하고 실행하는 것이다.

해외 인재를 폭넓게 활용하며 글로벌 스탠다드를 실행하는 것도 필요하다. 수출의존도가 30%를 넘는 한국이 순혈주의를 고집하면 글로벌 시장에서 생존하기 어려울 수 있다. ‘미리미리’ 준비해 선제적으로 유연하게 대응하면 ‘빨리빨리’는 한국의 강점이자 경쟁력이 될 수 있다. 기업 경영도, 국가 경영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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