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조선업계, 트럼프 조선업 재건 핵심 파트너
HD현대, 美 직접 투자 망설이는 상황서 이례적 만남
재계 “양국 관세 협상 지렛대로 활용될 가능성 충분“

[인사이트코리아 = 심민현 기자] 최근 방한한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정기선 HD현대 수석부회장 등 국내 조선업계 관계자에게 먼저 만남을 요청했다. 미국 통상 업무 수장이 우리 민간기업 최고경영자(CEO)에게 먼저 면담을 요청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관련업계에선 USTR 측이 우리 기업에 회동 의사를 타진한 것이 사실상 처음인 것으로 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국 조선업 재건을 위한 파트너로 우리나라를 지목한 상황에서 진행된 만남이라 이날 회장은 재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았다.
USTR 대표 만난 정기선, 美 현지 투자 단행할까
21일 업계에 따르면 정 수석부회장은 지난 16일 제주에서 그리어 대표와 공식 회담을 가졌다. USTR은 무역정책을 수립, 조정, 집행하고 불공정무역을 시정하는 등 광범위한 권한을 쥔 대통령 직속 장관급 기구다.
이처럼 전세계적으로 무게감을 가진 USTR 대표는 보통 상대국 정부 인사 또는 산업 전반을 대표하는 단체와 접촉하는 것이 그간 관례였다. 그럼에도 정 수석부회장을 정부 관계자보다 먼저 만난 것은 의미가 남다르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 그리어 대표는 이날 정 수석부회장과 1시간가량 면담했다. 반면 같은날 오후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는 40분가량 회동했다.
정 수석부회장은 HD현대중공업과 미국 방산 조선사인 헌팅턴 잉걸스와 협력 사례를 소개하며 공동 기술개발과 선박 건조 협력, 기술 인력 양성 등을 제안했다. HD현대중공업과 헌팅턴 잉걸스는 함정 동맹 관계다. 양사는 지난 4월 선박 생산성 향상 및 조선 첨단 기술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역량을 모으기로 했다.
헌팅턴 잉걸스는 미국 중남부 미시시피주에 미국 최대 수상함 건조 조선소 잉걸스 조선소를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서 미 해군이 최근 발주한 이지스 구축함 물량의 3분의 2를 비롯해 대형 상륙함과 대형 경비함 전량을 건조하고 있다. 업계에선 HD현대중공업이 잉걸스 조선소 인수에 나설 것이란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정 수석부회장은 이날 USTR 구미에 맞는 제안도 내놨다. HD현대 계열사인 HD현대삼호의 크레인 제조 역량을 소개하며 양국의 협력을 타진한 것이다. HD현대삼호는 2020년과 지난해 두차례에 걸쳐 부산 신항에 컨테이너 크레인 제작·설치 사업을 수주했고 싱가포르항에 크레인 설치 계약도 주문 받는 등 전 공정을 자체 수행할 수 있는 사업 역량을 갖춘 상태다.
현재 미국 항만의 핵심 설비인 컨테이너 크레인의 80%를 중국 국영 기업 ZPMC가 장악하고 있다. 최근 중국이 크레인에 설치된 센서를 통해 미국의 해외 작전 동원 물자 등 극비 정보를 수집한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USTR은 지난달 중국산 크레인에 100% 추가 관세를 제안하는 등 중국산 퇴출을 추진하고 있다.
그리어 대표도 해당 제안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 수석부회장은 “미국 조선산업 재건 의지와 노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며 “모든 준비를 한 만큼 필요한 역할이 있다면 참여할 것”이라고 화답했다.
트럼프, 韓 제외 마땅한 조선업 파트너 없어...관세 협상 지렛대 가능성
그리어 대표 행보에서 알 수 있듯 트럼프 대통령이 조선업계에 낮은 자세로 러브콜을 보내고 있는 이유는 한국을 제외하곤 마땅한 선택지가 없어서다.
현재 미국은 조선업 쇠퇴로 자국의 역량 만으로 군함 건조, MRO(유지·보수·정비)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다. 다른 나라 도움이 필수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업 세계 1위 중국은 미국과 해양 패권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고 트럼프 행정부 들어 관세 갈등 등으로 서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는 분위기다. 동맹국 중에선 한국, 일본 정도가 조선업 강국으로 통하지만 일본보다는 우리나라 기술력이 월등히 앞서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어 대표가 첫 만남 상대로 정 수석부회장을 지목한 것은 국내 1위 HD현대가 한화와 달리 아직까지 미국 직접 투자와 관련된 결단을 내리지 않고 있는 영향이 작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김동관 부회장이 이끌고 있는 한화오션은 지난해 12월 필라델피아 필리조선소를 인수한 데 이어 미 해군의 4대 핵심 공급업체 중 하나인 호주 방산업체 오스탈 인수까지 추진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3월 미국 직접 투자 계획을 밝힌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을 백악관으로 직접 초청해 기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치켜세워주는 등 현지 투자·생산을 동맹국들에 압박하고 있다.
특히 조선업계는 미국 선박법 등의 영향으로 한국에서의 수출은 한계가 있는 실정이다. 미국은 2037년까지 최대 448척의 선박을 발주하는 청사진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한화오션에 이어 HD현대까지 적극 협력하는 체제를 구축해야 트럼프 대통령의 조선업 재건 목표에 한 걸음 더 다가설 확률이 높아진다는 계산이다.
결국 HD현대 등 조선업계가 한·미 관세 협상의 지렛대가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우리 정부는 현재 진행 중인 한·미 정부간 실무 통상 협의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에 대해 책정한 25%의 상호관세와 전 세계를 상대로 부과하고 있는 철강·알루미늄·자동차(이상 25%) 등 품목별 관세를 최대한 낮추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만약 HD현대가 미국 현지 투자·생산과 관련된 발전된 안을 제시할 경우 이번 협상은 아닐지라도 향후 협상 과정에서 미국의 양보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HD현대를 비롯한 조선업계의 미국 직접 투자가 양국 관세 협상의 지렛대로 활용될 가능성은 충분하다“면서도 “관세 협상은 국가 간의 문제인 만큼 정부가 민간 기업에 투자를 강제할 수 없기에 오너들의 결단을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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