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에 발목 현대차그룹①] 현대차그룹, 美에 31조 투자
기아 노조, 국내 투자 우선·고용 안정 방안 제시 요구
최대 실적 따른 성과급 요구 더해 ‘역대급’ 청구서 제출하나

현대자동차그룹은 대규모 미국 투자를 단행하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무역장벽을 정면 돌파한다. 미국 현지 자동차 생산능력을 늘릴 뿐 아니라 270만톤 규모의 전기로 제철소도 건설한다. 국내 투자에 소홀한 것은 아니다. 현대차그룹은 24조원이 넘는 대규모 자금을 투입해 국내에서도 미래 경쟁력을 강화한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남았다. 매년 그룹 전체 계열사에 드리우는 ‘노조 리스크’다. 일부 계열사 노조들은 벌써 사측을 대상으로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인사이트코리아 = 김동수 기자] “회사가 위기에 처하면 노조도 허리띠를 졸라매는 게 정상이다. 생존이 달린 상황에서 국내 투자가 우선이라는 주장은 억지로밖에 안 보인다”<자동차 업계 관계자 A 씨>
미국 현지 투자와 생산을 늘리며 생존 전략을 짜는 현대자동차·기아가 암초를 만났다. 두 회사의 발목을 잡으려는 주인공은 무역장벽을 높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글로벌 영토를 넓힌 중국 전기차 업체도 아니다. 노조가 현대자동차그룹의 대규모 미국 투자에 반발하며 내부에서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정의선 회장, 대미 투자 31조원 발표…노조 “국내 투자 먼저”

현대차그룹은 지난달 미국 현지에 210억 달러(한화 약 31조원) 규모의 투자를 발표했다. 올해부터 2028년까지 현지에서 자동차, 부품 및 물류, 철강, 미래 산업 등 주요 분야에 투자한다. 주력 계열사 현대차·기아는 현지 생산 확대에 박차를 가한다. 미국 조지아주(州)에 있는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는 생산능력을 30만대에서 50만대로 끌어 올린다.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과 기아 조지아 공장도 생산설비 현대화·효율화 등을 통해 합을 맞춘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의지도 강하다. 정 회장은 지난달 24일(현지시각) 백악관에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직접 만나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밝혔다. 관세폭탄을 정면 돌파하고 최대 수요처 미국 시장 입지를 강화하겠다는 전략이다.
정 회장은 당시 백악관 루즈벨트룸에서 “향후 4년간 210억 달러의 신규 투자를 추가로 발표하게 돼 기쁘다”며 “미국에 진출한 이래 가장 큰 규모의 투자”라고 설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러한 결정에 화답하며 현대차그룹을 한껏 치켜세웠다.
현대차그룹으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현대차·기아가 지난해 미국에서 판매한 차량은 약 171만대다. 이중 약 101만대는 국내에서 생산해 미국으로 수출했다. 지금처럼 국내에서 차량을 수출할 경우 수입차 관세 25%를 물며 수조원대에 달하는 영업이익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러한 결정은 ‘노조 반발’이란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기아 노조는 대미 투자 발표 직후부터 국내 우선 투자를 주장하고 있다. 미국 현지 생산 확대에 따른 고용 안정 방안도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놨다. 올해 임금협상 투쟁(임투)에서 전 조합원의 고용 안정과 국내 투자를 끌어내겠다고 벼르는 중이다.
기아 노조는 지난달 말 소식지를 통해 “사측은 2025년 사업계획 속에 미국 생산 확대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국내 공장의 안정된 물량과 고용 확보 없이는 절대 불가능하다”며 “전 조합원의 고용 확보 방안 제시를 강력히 요구했다”고 설명했다.
11일에는 “정 회장의 일방적인 해외투자 발표가 자동차 산업 변화 속에서 노사 관계를 오히려 악화시키는 작태”라며 “올해 고용안정위와 임투에서 국내공장 고용안정 보장 방안을 반드시 쟁취할 것”이라고 비판 수위를 높였다.
협상 단골 메뉴 ‘역대급 성과’…올해는 美 투자도 카드 활용

현대차그룹이 국내 투자를 줄인 건 아니다. 올해 국내 투자 규모는 24조3000억원으로 1년 전보다 19% 늘었다. 국내 전기차(EV) 전용 공장 건설에도 대규모 투자를 집행한다.
기아는 올해 하반기 화성 이보 플랜트(EVO Plant)를 완공한다. 이곳에선 회사의 신규 비즈니스 모델 목적기반차량(PBV) 전기차를 본격 생산한다. 현대차도 내년 상반기 울산에 전기차 전용 공장을 가동한다. 초대형 SUV 전기차 모델을 시작으로 다양한 차종을 양산할 계획이다.
자동차 업계는 이러한 노조 행보가 임금협상을 위한 ‘카드’라고 분석한다. 올해 임금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가려는 포석이라는 의미다. 실제 주장을 관철하려는 목적보단 또 다른 요구안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본다.
현대차·기아 노사 임금 및 단체협약 협상은 매년 일정 패턴을 유지해 왔다. ‘노조의 과도한 요구→파업 경고(또는 파업 돌입)→사측 협상안 제시→역대 최대 보상’이라는 과정을 이어왔다.
그동안 현대차·기아 노조가 과도하게 주장했던 대표 사례는 ‘역대 최대 성과에 맞는 최대 임금, 최대 성과급’이었다. 현대차 노조는 지난해 전년도 순이익 30%를 성과급으로 지급해달라고 주장했다. 2023년 현대차 별도기준 당기순이익은 7조3430억원으로 이 중 2조2020억원을 달라는 것이다. 기아 노조는 성과급으로 영업이익 30%인 1조892억원을 주장했다. 현실적으로 사측이 들어줄 수 없는 과도한 요구다.
업계에서는 올해 현대차·기아 노조가 사측에 ‘역대급 청구서’를 내밀 것으로 본다. ‘역대 최대 실적’이라는 단골 주제와 미국 대규모 투자에 따른 국내 투자, 고용안정 대책 등을 요구하며 사측을 압박할 가능성이 높아서다.
업계 관계자는 “올해 협상에서 사상 최대 이익과 미국 투자 사례를 언급하며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며 “결국 사측은 달래고 노조는 최대한 이득을 얻는 형국이 또다시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