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는 동서 문명 교역로 ‘실크로드’ 출발점이자 종착역
한반도는 동서 문명 교역로 ‘실크로드’ 출발점이자 종착역
  • 김석동 지평인문사회연구소장
  • 승인 2020.09.29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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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기마유목민족 역사 속에 남아있는 한민족 흔적 탐방
갠지스강의 일출.지평인문사회연구소
갠지스강의 일출.<지평인문사회연구소>

인도 여행은 여행자들의 로망 중 하나다. 그동안 델리·아그라·뭄바이 등 몇 군데를 다녀온 바 있으나 기마군단이 건설한 세력 중 가장 마지막까지 남았던 제국의 하나인 무굴 제국 잔영을 둘러보고자 다시 북인도 여행에 나섰다. 인도의 면적은 329만㎢로 세계에서 7번째로 크다. 우리나라 국토의 33배에 달한다. 인구는 12억2000만명으로 세계 2번째, 우리나라의 25배다. 워낙 큰 나라이고 곳곳에 수많은 유적지가 남아있지만 그중에서도 북인도 지역은 무굴 제국의 심장부로 제국의 옛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많은 유적이 있다.

인도에서 전개된 몽골 제국의 후예 무굴 제국

기원전 3000~1500년경 꽃핀 인도의 인더스 문명은 세계 4대 문명의 하나다. 모헨조다로, 하라파 유적은 기원전 2500년경 정교한 계획 아래 건설된 도시 문명의 흔적이다.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1500년경 아리아인의 침입 등으로 갑자기 사라졌고 이후 고대 도시국가, 마우리아 제국, 굽타 왕조 등으로 이어졌다. 11세기 초, 아시아 기마유목민인 투르크가 인도 북부에 진출하면서 이슬람 왕조가 성립했다.

투르크의 가즈나 왕조 때 인도인들이 대규모로 이슬람을 받아들였고 이후 ‘델리 투르크 술탄국’으로 통칭되는 고리스·큐비스·하락족 등 투르크의 여러 세력이 15세기 초까지 북인도를 지배했다. 14세기에는 사마르칸트의 ‘철의 군주’ 티무르가 몽골 제국 재건을 기치로 중앙아시아에 380만㎢에 달하는 ‘티무르 제국(1370~1526년)’을 건설한 후 비단길과 자신의 제국을 보호하기 위해 한때 북인도를 점령했다.

티무르 제국 멸망 후 16세기에 중앙아시아 카불 지역의 티무르 5대손 ‘바부르’가 연고권을 내세우면서 다시 북인도에 진출해 델리를 점령하고 무굴 제국을 세웠다. 2대, ‘후마윤’과 3대 ‘악바르’ 대에는 북인도 전역과 북서부 펀잡, 인더스 하류, 데칸 지역, 아프가니스탄 등으로 영토를 확장해 대제국을 형성했다.

4대 ‘자한기르’에 이은 5대왕 ‘샤 자한’은 데칸을 정복했으나 티무르 제국의 수도였던 사마르칸트를 회복하는 꿈은 이루지 못했다. 대신 그는 수많은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을 남겼다. 올드델리, 레드포트, 자마마 스지드, 타지마할 등이 그의 ‘꿈’을 웅변하고 있다.

6대 ‘아우랑제브’는 1687년 데칸 지역을 완전 정복하고 인도 전역을 지배하는 최대 판도를 이루었으나 인도의 이슬람화를 고집해 힌두교도 등을 탄압하면서 제국은 분열되고 마침내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후 열강의 세력 다툼 틈새에서 세력이 약해지고 1857년 영국이 ‘세포이 항쟁’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굴 제국은 330년 만에 멸망했다. 무굴 제국은 인도 전역을 지배했으나 북인도 지역이 제국의 중심부였다.

인천공항을 떠난 비행기는 9시간 정도 지난 저녁 무렵 인도의 수도 델리의 인디라간디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델리는 인구가 1680만 명에 달하는 수도로 북부 갠지스강 지류인 야무나강 기슭에 있다. 올드델리와 새로 건설한 뉴델리 등으로 구성되며 올드델리는 오랫동안 무굴 제국의 수도로 샤 자한 때 건설됐다. 이튿날 델리에서 붉은 요새를 뜻하는 레드 포트를 둘러봤다. 붉은 사암으로 지어진 성으로 샤 자한이 10년에 걸쳐 지은 높이 18m의 성벽이 2.4km에 달하는 인도 최대 규모의 성이다.

쿠툽 미나르.지평인문사회연구소
쿠툽 미나르.<지평인문사회연구소>

이어 방문한 자마 마스지드 역시 샤 자한에 의해 건축된 인도 최대의 모스크다. 역시 붉은 사암으로 지어진 39m 높이의 2개의 미나레트가 예배실을 호위하는 모습이다. 이어 인도 고대 건축 양식으로 지은 힌두교 최대 사원인 악차르담, 힌두교에 대한 이슬람교의 승리를 기념하는 이슬람 건축의 유산 쿠툽 미나르 등을 둘러보고 다음 날 아침 일찍 국내선 비행기로 3시간 남짓 걸려 ‘바라나시’로 향했다.

바라나시라는 이름은 ‘영으로 충만한 도시’란 의미를 가졌다. ‘바라나시를 보지 않았다면 인도를 본 것이 아니다’라고까지 한다. 마크 트웨인은 “역사보다, 전통보다, 전설보다 오래된 도시”라고 했다. 바라나시는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이자 힌두교와 불교의 손꼽는 성지로 연간 100만명이 넘는 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해서 갠지스강에서 목욕하면서 심신을 달랜다.

갠지스 강가에서의 특별한 경험

7세기 초 신라 승려 혜초가 다녀간 후 ‘왕오천축국전’을 기록했고 이보다 한 세기 앞서 당나라의 현장이 방문해 ‘대당서역기’를 남긴 바 있다. 이곳을 흐르는 갠지스강은 길이가 2460km에 달하며 히말라야 산맥에서 발원해 델리 북쪽을 지나 힌두스탄 평야로 흘러들어간다. 때문에 힌두교도들에게는 성스러운 강이다. 인도인들은 이 강에서 목욕을 하면 이생의 죄를 면하고, 죽어 화장해서 이 강물에 흘려보내면 내생에 극락에 간다고 믿는다.

시내에서 갠지스강까지 ‘릭샤’라는 자전거형 인력거를 타고 30분 정도 갔다. 매캐한 매연과 먼지로 뒤덮인 혼잡한 거리를 수많은 인파와 인력거들이 아슬아슬하게 피해가는 장면이 마술같이 연출됐다. ‘진정한 인도의 모습’이라는 이 광경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갠지스 강변에 도착하니 많은 사람들이 계단 아래로 내려가 강물에서 목욕을 하고 있고 또 강 한편에서는 시신을 화장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갠지스 강가에서 죽은 자를 화장해 떠내려 보내는 이 장면을 보는 이들은 만감이 교차하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갠지스 강에서 작은 배를 타고 보는 강변의 휘황찬란한 야간 축제도 기억에 오래 남았다. 갠지스강 주변에는 수많은 힌두교 성지가 있다. 바라나시 인근에는 불교 4대 성지 중 하나로 석가모니가 득도한 후 최초로 설법했다는 곳으로, 지금도 불교 유적지가 다수 남아있는 ‘사르나트’가 있다.

다음날 새벽 다시 갠지스강으로 가서 일출을 본 후 ‘카주라호’로 향했다. 버스는 짙은 안개로 산속을 헤매다 당초 예상했던 시간을 훨씬 초과해 14시간 가까이 걸려 카주라호에 도착했다. 카주라호는 1세기경 번창했다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찬델라 왕조의 유적지로 20여 개 이상의 힌두교와 자이나교의 사원이 있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서쪽에 위치한 사원에서는 야릇하고 에로틱한 부조와 조각이 빼곡하게 자리 잡고 있어 방문객의 시선을 모았다. 카주라호에서 기차를 타고 무굴 제국의 심장부라 할 아그라로 향했다. 기차역은 수많은 인파로 혼잡스러워 전시 피난 열차를 타려는 장면이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막상 수많은 인도 여행객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편한 표정을 하고 있다.

아그라는 델리에서 야무나강을 따라 남동쪽으로 약 200km 떨어진 곳에 있는 지방 도시로 기원전부터 존재해온 고도다. 15세기 중반 로디 왕조가 수도로 삼은 후, 무굴 제국 3대 악바르 대제가 1564년 천도해 1658년까지 약 1세기 동안 제국의 중심으로 번창했던 도시다.

아그라에서는 인도의 상징이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타지마할이 여행객을 기다린다. 타지마할은 샤 자한이 사랑했던 아내 뭄타지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22년 동안 기능인력만 2만명을 동원해 대리석과 사암 그리고 세계의 보석들로 1653년 완성한 건축물이다. 좌우가 정 대칭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보는 이들마다 감탄을 금하지 못하며, 백색의 대리석 외장은 태양의 각도에 따라 시시각각 오묘하게 변하면서 사람들을 마술 속으로 이끈다.

아그라성.지평인문사회연구소
아그라성.<지평인문사회연구소>

타지마할 맞은편에는 아그라의 대표적인 요새인 아그라성이 있다. 이 성은 아그라가 무굴 제국 수도일 당시 황제들의 거주지이자 군사요새였다. 5대왕 샤 자한이 6대 왕 아우랑제브에 의해 폐위돼 죽을 때까지 유배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무굴 제국의 권력을 상징하는 이 거대한 성은 붉은색 사암으로 지어져 ‘붉은 요새(Red Fort)’라고도 불리며 해자와 함께 2.5km에 달하는 성벽이 요새를 둘러싸고 있다.

다음 행선지는 아그라에서 약 37km 거리에 있는 ‘파테푸르 시크리’다. 악바르 대제가 1570년부터 1585년까지 수도로 삼았던 도시로 ‘승리의 도시’라는 뜻을 지녔다. 왕궁을 비롯한 모스크 등 다양한 건물과 흔적이 남아있다. 수도를 다시 아그라로 옮긴 후 400년간 인적이 드물게 돼 지금까지 비교적 잘 보존된 무굴 제국의 건축물을 볼 수 있다. 시크리에서 델리로 돌아와 무굴 제국의 산실 북인도 여행을 마무리했다.

무굴 제국은 가장 오래까지 남았던 기마유목민이 건설한 제국 중 하나다. 동아시아에서는 1100만㎢에 달했던 청나라(여진)를 끝으로 1912년 중국사로 편입되었고, 서아시아와 동 유럽 지역에서는 560만km에 달하던 ‘오스만투르크(돌궐)’가 19세기 이후 발칸반도, 이집트, 아랍 등을 차례로 상실하고 현재의 터키 지역으로 축소됐다. 남아시아에서는 무굴 제국(몽골)이 영국에 의해 멸망한 후 인도사의 한 왕조로 편입돼 기록됐다. 이로써 2500년간 유라시아 대초원을 누비며 세계사를 써왔던 기마민족, 초원 제국의 역사가 막을 내리게 됐다.

현대에 들어와 인도와 우리는 중요한 교역 대상국으로 부상했고 양국 간의 교류도 확대되고 있다. 한-인도는 2010년 CEPA(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 발효 이후 무역투자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인도는 우리나라 9번째의 수출시장이다. 인도의 성장 가능성은 세계가 인정한다. 인도는 2016년 GDP 규모가 2조2638억 달러로 미국·중국·일본·독일·영국·프랑스 다음으로 큰 나라이며 2030년대에는 미국·중국에 이어 세계 3위의 거대 경제국가가 될 것으로 기대되는 나라다. 아무쪼록 한-인도간 협력관계가 새로운 미래의 성장 동력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중앙아시아 대초원의 나라 카자흐스탄

중앙아시아는 1990년대 초, 소련이 붕괴하고 중국이 개방되기 전까지는 우리에게 관심 밖의 땅이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오래전부터 기마유목민이 활동해온 중심 무대이자 흉노·돌궐·몽골의 기마군단이 서방으로 진출하는 교두보였다. 기원전 3세기경 몽골 고원을 평정한 흉노 제국은 중앙아시아 일대를 정복하고 실크로드를 장악해 대제국을 건설했다. 이후 기마유목민족인 유연, 돌궐, 위구르, 셀주크 제국, 몽골 제국, 차가타이 칸국, 티무르 제국이 차례로 패권을 차지했다.

중앙아시아 지역은 투르키스탄으로 불렸고 이는 투르크인의 땅이란 뜻이다. 서투르키스탄은 460만㎢(우리나라 46배)에 달하는데 청나라 때 영국·러시아 등이 각축하다가 1880년대에는 러시아가 대부분을 장악했다. 소련은 이 지역을 수 개의 공화국으로 분리 통치하면서 영국 등 해양 세력과 경쟁하기 위해 국경 지역의 철도 건설에 나서 1904년 ‘중앙아시아 철도’를 개통했다. 총 2만 km가 넘는 방대한 규모의 철도는 내륙인 이 지역 경제활동의 돌파구가 됐다. 소련 붕괴 후 서투르키스탄 지역은 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우즈베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아프가니스탄으로 분리·독립했다. 동투르키스탄은 청나라의 지배를 받아오다 잠시 독립했으나 다시 중국에 편입돼 지금은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가 됐다. 필자는 지금까지 중앙아시아 지역 중 카자흐스탄 두 번, 우즈베키스탄 다섯 번, 신장 웨이우얼 두 번, 총 아홉 차례를 다녀왔다.

중앙아시아의 민족은 유목민의 후손들로 투르크-몽골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소수민족도 다수 혼재해 있다. 종교적으로는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압바스 왕조가 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당나라군을 격파하면서 중앙아시아 전 지역으로 이슬람이 확산됐다.

이 지역은 천연가스, 석유, 석탄이 대량 매장된 자원의 보고이기도 하다. 중동의 걸프만과 러시아 다음으로 많은 석유와 천연가스가 매장된 카스피해 연안 지역까지 포함해서 보면 이 지역의 중요성이 새삼 강조될 수밖에 없다. 중앙아시아에 관심을 보여 온 강대국들은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는 자는 세계적으로 엄청난 권력을 행사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 중앙아시아는 러시아가 지배하면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소련 붕괴 후 2000년대 들어 미국의 진출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서투르키스탄 지역인 신장 웨이우얼을 지배하는 중국도 ‘일대일로’ 전략의 한 축으로 추진하는 육상 실크로드의 핵심 지역으로 삼고 있다.

지난 2500년 간 한민족과 뿌리를 같이하는 기마군단이 활약해온 중앙아시아는 유라시아 스텝의 중심 지역으로 동서 문명 교류의 관문이었다. 이 지역에서 살아오고 활동한 사람들은 북방 알타이 문명에 기원을 두고 있고 우리나라와 생활·문화·언어적으로 많은 공통분모와 친연성을 가지고 있다.

고대로부터 초원 실크로드와 오아시스 실크로드를 통해 이들이 오간 흔적들이 무수히 남아있다. 무덤·유물 등은 물론 풍습과 언어 등에서도 확인된다. 동서 문명 교역로인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자 종착역인 한반도에서도 신라·발해 고려 시대에 이미 실크로드의 소그드인 등을 통해 중앙아시아와 교류해온 흔적이 역력하다.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서 고대 한국 특유의 복식을 하고 있는 두 명의 사신 모습을 확인할 수 있고, 고구려의 벽화에서도 중앙아시아인을 볼 수 있다. 신장 웨이우얼의 투르판 인근의 베제크리크 석굴에서도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한반도인의 그림이 남아 있다. 고대로부터 한반도가 이들 지역과 교류가 깊었다는 의미다. 근세사에서도 중앙아시아에는 한인(고려인)이 1937년 강제 이주된 후 70년간 거주한 지역으로 지금도 30만명 이상이 살고 있다. 중국·미국·일본 다음으로 많은 한인이 사는 곳이다.

역사를 국경과 국민이라는 개념보다 민족이 활동하고 이동 교류하는 ‘삶의 흐름’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면 보다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데, 특히 유라시아 기마유목민족의 역사가 그렇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의 고대사도 만주·몽골·중앙아시아, 그 서쪽 지역까지 연결해 한민족이 활동하고 이동·교류해온 삶의 흐름을 파악하는 시각으로 다시 볼 필요가 있다.

톈산 산맥이 보이는 중앙아시아 대초원.지평인문사회연구소
톈산 산맥이 보이는 중앙아시아 대초원.<지평인문사회연구소>

한민족의 시원지로 꼽히는 톈산 산맥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은 실크로드 편에서 기술했으므로 필자가 2013년과 2016년 두 차례에 걸쳐 방문한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큰 나라이자 세계에서 9번째로 넓은 카자흐스탄을 소개하고자 한다. 카자흐스탄 면적은 272만㎢로 중앙아시아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인구는 1820만명으로 카자흐인(53.4%), 러시아인(30%), 우크라이나인, 우즈벡인, 독일인, 위구르인 등 120여 개에 이르는 민족으로 구성돼 있고, 고려인 등 한민족도 10만 명 이상 살고 있다. 종교는 이슬람 47%, 러시아 정교 44%, 기독교 2% 등으로 다민족 다종교 국가다. 수도는 북부의 ‘아스타나’지만 최대 도시는 남동부 키르기스스탄 국경 근처에 있는 ‘알마티’다. 석유 등 자원이 풍부해 국민 소득이 1만2276달러(2015년)로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다.

카자흐스탄의 주류를 이루는 민족인 카자흐족은 투르크-몽골계 민족이다. 15세기 중엽 몽골 제국의 하나인 킵차크 칸국이 붕괴된 후 그 일족이 중앙아시아에 진출하면서 우즈벡족이 형성됐고 그중 일파가 카자흐스탄 지역에서 독립민족으로 자리 잡아 카자흐족의 역사가 시작됐다. 이들은 대부분 유목 생활을 하던 사람들로 수니파 이슬람을 받아들였으나 유목민의 관습과 정서를 오래 유지해왔다.

제정 러시아는 남하 정책을 지속하면서 17세기경에는 시베리아 대부분을 장악했고 18세기 초 이후 본격적으로 중앙아시아로 진출했다. 19세기 중반에는 카자흐스탄 대부분 지역을 지배하게 됐다. 20세기 들어 1917년 카자흐스탄 자치정부를 수립하기도 했으나 1936년 소련의 일원이 됐고 이후 1991년 소련 붕괴 때 독립했다.

인천공항에서 6시간 반 정도 비행하면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이며 최대 도시인 알마티에 당도한다. 톈산 산맥 북쪽 기슭에 자리 잡은 알마티는 동서 교역의 통로인 초원로의 한가운데 있다. 이곳은 작은 마을이었으나 제정 러시아의 군사요충지로서 요새의 역할을 하는 식민 도시로 급성장했다. 지금은 인구가 약 117만명에 달하는 교통·산업·문화의 중심지로 1997년 아스타나로 옮기기 전까지 수도였으며 대관령과 한계령 정도의 높이인 해발 600~900m의 높은 산지에 자리 잡아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알마티 역사지구 중심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판필로프 장군과 28인 군인들의 전공을 기념하는 판필로프 공원이 있다. 이 공원에는 젠코브 러시아 정교회 대성당이 자리하고 있는데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목조 건물(54m)이자 세계 8대 목조 건물 중 하나라고 한다.

침블락의 곤돌라.지평인문사회연구소
침블락의 곤돌라.<지평인문사회연구소>

톈산 산맥은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에서 키르기스 지역으로 2800km에 달하는 길이로 이어졌는데 알마티 시내에서도 만년설에 덮여 도심을 감싸고 있는 산맥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시내에서 차량으로 30분 정도 남쪽으로 가면 높이 3163m의 톈산이 있는데 현지에서는 침블락이라 부른다. 해발 1600m까지 올라가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빙상장으로 유명한 메데우가 있고 이곳에서 정상까지 4.5km 길이의 곤돌라가 설치돼 있다. 2010년 동계 아시안게임 때 침블락 스키장을 위해 개통됐다. 곤돌라를 3번 갈아타면 정상에 도달할 수 있는데 고산 지역이라 기후변화가 매우 심해 곤돌라가 운행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정상까지 올라갈 확률이 매우 낮다고 한다. 필자는 마침 좋은 날씨를 만나 산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안내해준 지인은 톈산에 오르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얘기가 있다고 전해주면서 첫 방문에 정상에 오는 것은 천운이라 했다. 이 산이 바로 백두산, 신장 웨이우얼의 우루무치 인근에 있는 톈산과 더불어 한민족의 시원지로 꼽히는 곳이다. 침블락에는 중앙아시아 최대의 스키장이 자리 잡고 있는데 굉장히 험준한 곳에 설치된 난코스가 있어 사고가 나면 이듬해 해빙기에야 시신 수습이 가능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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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갈리 유적지 암각화.<지평인문사회연구소>

 알마티 시에서 북서쪽으로 약 170km 떨어진 곳에는 유명한 탐갈리 유적지가 있다. 이곳에서 1957년 대규모 암각화군과 정착지와 무덤 유적 등이 발굴됐다. 탐갈리의 바위에 새겨진 암면조각화는 1970~1980년대 이후 본격 연구가 이루어지고 2004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알마티에서 현지인의 안내를 받으며 황량한 들판을 세 시간 이상 달려 탐갈리에 도착했다. 구글 내비게이션을 활용해도 길 찾기가 만만치 않아 수차례 차에서 내려 물어가며 어렵게 목적지에 당도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역임을 나타내는 허술한 표지판을 지나면서 안내인이 우리 일행을 바위투성이의 골짜기로 안내하고 설명해 주었다. 입구에서부터 바위에 또렷이 새겨진 그림들이 나타났다. 유목민들의 삶과 정서를 보여주는 다채로운 바위그림이 즐비하게 있었다. 발굴된 것만 5000여 점이 넘는 이 그림들은 청동기 시대부터 20세기 초까지 이곳에 살아온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는 역사적인 자료다.

암각화는 선사 고대인들이 생활과 신앙을 바위에 그려 남긴 그림들인데, 유라시아 대초원 일대에서 다수 발견되고 있다. 한반도에서도 울산 대곡리와 천전리, 포항 칠포리 등 15군데 이상 발굴됐고 유라시아 대초원의 암각화와 연결고리가 있다. 예컨대 울산 반구대 암각화는 북방 초원 지대의 암각화에서 나타나는 그림들과 유사한 점이 많다고 한다. 동북아역사재단이 2009년 탐갈리 등 카자흐스탄 동남부 지역 13개 암각화 유적지를 조사한 후 2011년 발간한 조사 보고서를 통해 한반도 선사와 고대 문화와 중앙유라시아 문화 사이에 친연성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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