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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2024-04-26 12:28 (금) 기사제보 구독신청
사정없이 울려대는 ‘폰’, 어디 피신처는 없나
사정없이 울려대는 ‘폰’, 어디 피신처는 없나
  • 김혜영 인사이트코리아 전문위원
  • 승인 2017.09.04 13: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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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결 사회, 개인의 ‘디지털 미디어 선택권’ 존중돼야

장맛비가 한없이 내리던 한낮 오후, 스마트폰이 쉴 새 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모바일 메신저에서 메시지 알림이 계속 울리는 것이다. 요즘은 퇴근 이후에 메신저를 보내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고 하던데, 업무와 관련 없는 공동체에서 보내오는 메시지는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댔다.

그런데 이번에 임원이 보내는 메시지는 내용이 다소 이상했다. 늘 보내오던 어떤 공지사항이나 안내 글, 혹은 덕담의 글이 아니라 한 개인이 어떤 일에 화가 나 감정이 상했다는 글이었다. 이러한 메시지가 떠오르면 순간적으로 긴장하게 된다. 왜냐하면 글로 전달되는 개인의 생각 글은 자칫하면 오해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바닷가의 부유물처럼 떠올라 있는 십 수여개의 메시지를 매우 신중하게 읽어 내려갔다.

다 읽어보니 내용은 오해의 소지가 높았다. 그 대화창에 있던 모든 멤버들이 ‘읽기’는 했으나 답을 달지 않았던 것이다. 상황이 맞지 않으려 해서 그랬던 것인지 글을 쓴 그 임원 외에 다른 멤버들은 다들 주말이라 부모님 집을 방문하거나 미뤄둔 집안일을 처리하거나 회사에서 회의하는 시간이어서 다들 답을 달지 않았던 것이다.

과거에도 몇 번 그 임원이 올린 글을 다른 멤버들이 읽기만 했을 뿐, 개인 사정으로 답변을 달지 않았던 경험들이 있기는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임원이 생각하기에 다른 멤버들의 행태가 괘씸했던 모양이다.

그 임원은 소위 말하는 ‘읽씹’을 당했다고 말하면서 화를 냈다. 그 메신저의 다른 멤버들은 적잖이 당황했고, 서로의 상황을 설명했다. 하지만 그 임원은 화가 많이 났고, 그 메신저에서 탈퇴했다. 그리고 다른 멤버들은 본인들의 상황을 더 이상 설명하지 못한 채 졸지에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버렸다. 결국 그 임원과 다른 멤버들은 서로의 상이한 상황과 다른 관점을 이해하고 수용하지 못했다. 이 모든 일은 45분 만에 시작되고 종결되었다.

이러한 사례는 요즘 현대인들이 대부분 겪는 상황일 것이다. ‘읽음’이 표시됨으로 읽은 회원의 숫자가 점점 줄어드는 메시지 모퉁이의 작은 숫자는 마치 나를 감시하는 감시카메라 같아 답답할 때가 있다. 그리고 내가 전달한 메시지에 분명히 상대방이 ‘읽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답변이 없거나 기다리던 답변의 시간이 늦을 때면 다소 기분이 상하게 되는 경험이 있다.

일례로 주위에는 이런 메신저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에 대해 대다수 사람들은 이기적인 사람 혹은 사회 부적응자로 치부하는 경우도 있다. 급속도로 발달된 디지털 미디어 네트워크 기술은 분명 ‘소통’을 원활하게 하고 단시간에 최대의 효율을 높이는 기술이지만 언제부터인가 인간본질에 대한 가치존중과 이해, 배려의 능력을 쇠퇴시키게 됐다.

‘초연결’ 속 질서·예의·도덕·배려는 ‘미완성’
 
최근 현대인들은 자신들의 관점과 상이한 상황이나 새로운 관점을 받아들이는 것에 어색하다. 사실 인간은 이미 어릴 때부터 새로운 관점을 보거나 자신의 판단을 바르게 하는 방법을 학습해 왔다. 예를 들어 사회활동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질서와 예의, 도덕, 배려에 대해서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학문’을 통해 충분히 배웠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익히는 ‘습관’은 형성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저출산과 1가구 1~2자녀는 일상생활에서 습관화하는 교육을 받기가 어려울 만큼 부모들이 모든 것을 지원해 주었기 때문이다. 하여 진정한 교육의 기본인 질서와 예의, 도덕, 배려에 대한 ‘학습’은 완성되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현재도 대부분의 교육기관에서 계속 진행형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는 사회인이 되었을 때 여실히 드러나게 된다.

특히 4차 산업혁명이 도래한 현대에서는 더욱 학습이 어렵다. 왜냐하면 더욱 학습할 필요가 없는 환경이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나 필요한 정보와 서비스를 획득할 수 있고, 마치 나를 주시하면서 필요한 것을 미리 챙겨주는 것 같은 다양한 혁신적 정보통신 기술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술들은 서비스의 개념을 넘어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클라우드 컴퓨팅, 빅데이터, 모바일 등 모든 제품·서비스를 네트워크로 연결하고 사물을 지능화시켰다. 더 이상 인간은 사고와 판단 및 정보획득을 위한 인내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오고 있다.

제4차 산업혁명의 초연결(hyperconnectivity)과 초지능(superintelligence) 특징들은 현대인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근간은 바로 ‘소통’이다. 획기적으로 발전하는 산업 환경에 부합한 커뮤니케이션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지속적인 지식정보네트워크 기술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는 ‘소통의 부재는 경제 손실을 야기 한다’는 전제하에, 그리고 점진적으로 기업 간 비즈니스 혹인 대인관계에서 얻고자 하는 이득적인 결과를 더 빨리 획득하기 위해 네트워킹과 서비스 기술을 발전시켰다.

현대사회 환경은 급변하는 시장 환경에 적합한 인재를 육성하고자 소통의 역량을 배양시키는 투자를 장기적으로 하기 보다는 초연결과 초지능의 네트워크기술을 발 빠르게 접목시켜 신속한 결과와 이득을 얻으려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일간에서는 인간의 효율적 상호작용과 원활한 소통을 증진시키기 위한 필연적인 기술발전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은 부작용을 증가시키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은 이제 초기발달단계이건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게 비례 발전하고 있다.

소통이 고통으로…

인간은 발전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숙달될 때까지 혼란을 겪으며 점점 익숙하게 된다. 기술적인 부분은 특히, 처음에 접하거나 사용할 때는 어색하고 용도를 다 활용하지 못하지만 몇 번의 실수와 오작동을 경험하고 나면 점차 사용하는 것에 숙달된다.

4차 산업혁명에 따른 부작용 또한 혼란의 시기를 겪고, 부작용을 경험하는 과정을 반복해 거치고 나면 익숙해질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초연결과 초지능의 네트워크 기술은 인간의 혼란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술들은 인간의 지속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제어를 벗어나 인간의 사고 그 이상의 네트워킹과 커뮤니케이션을 강요하고 있다. 이러한 극단적인 발전은 매우 위험한 부작용이다. 이러한 부작용 즉, 소통과 관련된 기술발전에 대해 인간은 차단과 거부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가장 궁극적 욕구인 ‘통제(control)’를 잃는 것은 매우 불편하고 거북하다. 때문에 다양한 네트워킹 기술은 인간의 불편함을 자극하게 되고, 회피하려는 인간의 또 다른 욕구를 형성하게 했다.

반면 이러한 기술의 발달을 비약적인 발전으로 바라보는 관점도 있다. 기술의 발달을 산업적으로 적용시켜 이익창출의 주요한 가치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여러 학문 분야에서 4차 산업혁명에 연계된 비즈니스와 관련해 연구하는 것이 트렌드이기도 하다.

인간은 통제력을 잃는 것에 대해 불편해 하지만 결국은 따라오고, 활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트렌드를 따르는 다양한 마케팅 활동과 사회활동이 이슈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 관점만을 주장하며 ‘인간은 혼란과 불편함을 감내해야 한다’고 하기에는 ‘인간은 소통을 고통으로 느끼고 있는 실정’이 해결되지 않는다.

정남향과 정북향 베란다의 차이

인간본질에 대해 성찰해 왔던 공자는 이러한 극단적인 방향성에 대해 오래 전부터 해답을 제시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지나친 것은 부족한 것과 같다)’이 그것이다.

무엇이든지 극단적으로 지나치면 부작용이 크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다다익선’과는 모순되는 개념이다. ‘다다익선’은 경제가 발전하던 초기에 수요가 많으므로 공급만 되면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었기에 필요했던 개념이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지나친 공급으로 인해 수혜자이자 수요자인 인간이 과부하를 맞게 되었고 다양한 부작용을 안고 살게 되었다.

성경 전도서에도 공자의 말과 유사한 개념의 구절이 있다. “지나치게 의인도 되지 말고,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극단을 피한다.”
이 구절은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람은 극단으로 가는 것이 옳지 않음을 의미하는 내용이다. 극단적인 방향성은 인간에게 유익하지 않음이 본질이다. 비단 이러한 극단적인 방향성의 부작용은 산업혁명에 따른 인간사회에만 나타나지 않는다. 자연적인 현상의 대부분에서도 극단적인 것에는 그 이면에 부작용을 동반하게 된다.

필자의 부모님 본가는 정남향의 단독주택이다. 17년 전 그 집을 지었을 때, 동네사람들은 모두가 부러워했다고 한다. 옛 어른들의 구전에는 “남향집에 살려면 3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고 한다. 그 정도로 남향집에 산다는 것은 가장 좋은 입주조건이다.

이런 본가의 정남향 베란다는 사시사철 따뜻한 햇볕이 들어와 온 집안을 밝혀주며, 따뜻함을 제공해 주고 있다. 하지만 정남향 베란다 반대편의 정북향 베란다는 사시사철 시베리아 벌판이다. 특히 겨울철에는 환기되지 않는 베란다 전체에 습기가 차고, 그 습기들이 꽁꽁 얼어서 빙상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미끄럽다. 때문에 찬바람이 부는 시기부터는 전혀 사용을 할 수 없는 공간이다. 여름에도 정북향 베란다가 시원하면 좋으련만 바람이 통하지 않아 고온다습의 불필요한 대형공간이 되고 말았다. 정남향 베란다와 정북향 베란다가 상호 보완적인 공간이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상호 대조적이고 불필요한 공간으로써 제한된 활용만이 가능한 곳이다.

거부하고 선택할 수 있는 권리

앞서 언급한 것처럼, 도래한 4차 산업혁명의 극단적 발전은 인간에게 침투된 다양한 네트워킹 기술로부터 인간의 통제 상실, 회피, 혼란, 선택장애, 가치손실의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숨 막히는 행보들에 대해 현대인들은 어떻게 부작용을 완화시킬 수 있을까? 가만히만 있어도 저절로 퇴보되는 인간으로 낙인찍히는 이 현실을 어떻게 대면해야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해답은 인간의 처한 상황과 환경과 능력에 따라 미시적으로 다를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이고 공통적이며 구체적인 한 가지의 해답을 제안하자면, 네트워킹 기술에 대한 자신만의 ‘디지털 미디어 선택권’을 지켜 내야한다.

조직이나 타인의 요구에 의해 수동적으로 사용하는 모바일 프로그램이나 소셜 미디어는 지양해야 한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동등한 ‘디지털 미디어 선택권’이 있다. 이 선택 권리는 무형의 존재지만 티켓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필히 지켜야 하는 가치자원이다. 단언컨대 이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자신의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며, 극단적인 지식네트워크 기술의 부작용을 와해시키는 획기적인 방법이다.

필자는 작년부터 권리를 행사하고 있다. 필자도 조직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공동체에서 활용하는 커뮤니티의 가입과 활동을 종용 받았다. 처음에는 커뮤니티에 가입해 활동을 열심히 했다. 손에 잡힌 모바일 시스템은 본인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대다수의 관련 사람들에게 노출되기 십상이었다. 때문에 다른 소셜 미디어 활동의 열심에 비례해 공동체의 커뮤니티 활동도 열심히 하기를 강요받았다.

몇 번의 고민 끝에 필자는 과감히 4개 커뮤니티를 거부하고 탈퇴했다. 이러한 행동에 분노한 다른 멤버들은 재가입과 활동을 강요했지만 그럴수록 필자는 불필요하고 혼란을 야기하고, 통제를 상실하게 하며, 회피하고 싶은 소셜 미디어나 커뮤니티를 정리했다. 타인들이 필자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물어올 때 본인의 디지털 미디어 선택권에 대해 정확하게 언급해 주었다. 처음에는 분노하던 멤버들도 점점 필자의 미디어 선택 권리에 대해 존중해 주었고, 따라 행동하는 이들까지 생겨났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생각해 보길 바란다. 본인의 ‘디지털 미디어 선택권리’를 얼마나 많이 주장하고 있는지, 그리고 지금 당장 어떤 미디어에 대해 거부하고 선택하는 권리를 행사할 것인지….

인사이트코리아, INSIGHT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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