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 제국 건설자는 고구려 후예들이다
중앙아시아 제국 건설자는 고구려 후예들이다
  • 김석동 지평인문사회연구소장
  • 승인 2020.09.01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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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문명 교차로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 실크로드 2000km 여정
부하라 초르미노르.지평인문사회연구소
부하라 초르미노르.<지평인문사회연구소>

중앙아시아 지역의 실크로드는 고대부터 동서문명 교류의 대동맥 역할을 해왔다. 필자는 앞서 몇 차례에 걸쳐 그 핵심 지역인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 지역 등을 답사했다. 이번에는 우즈베키스탄의 동서 양단을 일주하는 여정인 사마르칸트-부하라-히바 탐방 길에 나섰다.

우즈베키스탄은 면적 44만7000㎢(우리나라의 약 4.5배), 인구 3000만명의 수니파 이슬람국가로 지정학적으로는 아시아 중심부에 있어 동서로 오가는 여러 세력들의 각축장이 되었던 곳이다. 이 지역은 아무다리야강과 시르다리야강 유역으로 일찍이 고대 문명이 발달했다. 기원전 2000년경에 이미 청동기 문화를 가졌고, BC 6세기경에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이후 스키타이의 영역이 되었다. BC 4세기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점령했으며, 6세기 중엽부터는 돌궐 제국이 지배했다.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사라센군이 당나라에 승리하면서 이슬람 세력권에 편입됐다. 13세기 칭기즈칸의 몽골 제국, 14세기 티무르 제국 지배 이후 히바·부하라·코칸트 칸국으로 분리됐다. 19세기 들어 제정 러시아에 병합됐고, 소련이 해체되면서 1991년 독립해 ‘이슬람 카리모프’ 초대 대통령이 2016년 사망까지 25년간 장기 집권했다. 그는 중앙아시아의 가장 권위주의적인 집권자로 알려졌지만 한국을 핵심 협력 대상국으로 정하여 국가원수로는 이례적으로 7차례나 방한했다.

사마르칸트-부하라-히바로 이어지는 실크로드

인천공항에서 4800km 떨어진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까지는 8시간 가까이 걸린다. 거기서 다시 우즈베키스탄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서쪽으로 약 1000km 떨어진 우르겐치에 도착한 후 자동차로 갈아타고 서남쪽으로 약 30km를 달려 호라즘의 역사도시 히바에 도착했다.

오아시스 실크로드의 요새이자 교역소였던 히바는 중앙아시아의 진주라 불린다. 노아의 아들 샘이 이곳을 발견했을 때 세워졌다는 전설이 있는 이 도시는 11세기에서 13세기까지 호라즘샤 왕국의 수도였고 16세기에는 히바 칸국의 수도가 됐다. 지금은 인구 2만6000명의 아담한 작은 도시다.

히바는 ‘카라쿰 사막’과 ‘키질쿰 사막’의 극도로 건조한 기후 때문에 도시 전체가 거대한 박물관이라 불릴 정도로 옛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 방문객들을 역사 속으로 이끈다. 16세기에 지어진 거대한 흙벽돌 성곽 ‘이찬칼라’의 성문을 지나 내부로 들어가면 바로 몇 백 년을 뛰어넘는 역사가 전개된다.

필자는 그동안 우즈베키스탄을 수차례 방문하면서 히바에는 세 차례 들렀는데 갈 때마다 설레는 곳이다. 히바의 이찬칼라 성문은 마치 타임머신의 입구를 연상시킨다. 성문 안에서는 수백 년 전의 역사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정말 매력적인 고대 도시다. 언젠가는 일주일 정도 이곳 실크로드의 옛 향기 속에서 푸근하게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났다.

칼타 미나레트.지평인문사회연구소
칼타 미나레트.<지평인문사회연구소>

45m 높이의 초대형 ‘홋자 미나레트’, 미완성인 아름다운 ‘칼타 미나레트’, 중앙아시아 최고의 회교사원인 ‘주마 모스크’, 궁전, ‘마드라사(신학교)’ 등 즐비한 유적들이 이 도시의 화려했던 영광을 웅변하고 있다. 서문 밖에는 이곳 출신 대수학의 시조 ‘알콰리즈미(알고리즘의 유래)’의 좌상이 있고 인근 대형 벽면에 그려진 실크로드 지도가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

히바는 걸어서만 다니는 고대 도시로 유적지는 물론 카펫을 비롯한 수많은 수공예품 가게들이 여행객의 눈길을 끈다. 다시 우르겐치로 가서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동남쪽으로 450km 떨어진 ‘부하라’로 이동했다. 지난번 방문할 때는 7시간 이상 걸려 차량으로 카라쿰 사막을 횡단해서 갔다.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실크로드의 중심 도시 부하라는 수많은 외침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고색창연한 도시의 모습을 간직하며 25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교역과 문화의 중심인 이 도시는 몽골 제국에 의해 철저히 파괴됐으나 티무르 제국 시대에 부활했고 이후 부하라 칸국 시대에도 수도였다. 시간이 멈춘 도시답게 시내 곳곳에는 과거의 영화를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성서에 등장하는 ‘욥의 샘’이라는 ‘차슈마 야유부’에서는 신비한 샘물이 솟아나고 있는데, 한쪽 켠에 순례자의 무덤이 있고, 북방 문화의 상징인 ‘솟대’가 서있어 실크로드 문명 교류의 또 다른 단면을 보여준다.

2400년 전 처음 만들어져 개축을 거듭해온 ‘아르크성’에는 사원, 광장, 감옥, 박물관 등이 자리 잡고 있다. 1만2000여명이 예배를 보던 웅장한 규모의 ‘칼리안 모스크’에는 부하라의 상징이자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미나레트(첨탑)가 우뚝 서있는데, 옛날에는 밤이 되면 불을 밝혀 사막의 등대 역할을 했다고 한다. 캐러반을 위해 실크로드를 밝혀준 등대는 지금은 조용히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동쪽으로 더 가서 조그만 골목길을 굽이굽이 돌면 과거 신학교였던 ‘초르 미노르’가 갑자기 나타나 우아한 자태로 방문객들을 놀라게 한다. 초르 미노르는 4개의 미나레트라는 뜻으로 신학교는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4개의 미나레트만 남아 있다. 4개 종교를 상징하는 첨탑의 청록색 타일이 인상적이다. 첨탑 내부의 좁은 계단으로 중앙돔까지 올라가 구경할 수 있는 구조로 돼 있고, 아래층에는 여러 민속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자리 잡고 있다. 부하라에는 예전에는 캐러반의 숙소인 ‘카라반사이’가 곳곳에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거나 레스토랑 등으로 용도를 바꾼 곳만 있다.

티무르의 무덤에 담긴 놀라운 祕史

다음 목적지인 사마르칸트는 실크로드의 중심 도시이자 시가지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매력적인 도시다. 기원전 5세기경 소그드인들이 오아시스가 있던 아프라시압 언덕에 도시를 건설한 이후 수많은 외침을 받아왔다. 특히 칭기즈칸이 철저하게 파괴했지만 티무르가 화려하게 재건했다. 티무르는 이 도시를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기 위해 원정 때마다 건축가와 예술가를 데려왔다. 지금도 이 도시는 티무르가 좋아했던 ’푸른색의 도시‘의 면모를 자랑하고 있다.

부하라에서 사마르칸트까지는 300km 정도 거리지만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서 버스로 거의 5시간 걸려서 도착했다. 버스가 사마르칸트 시내 외각 울룩벡 천문대에 당도했으나 예고 없이 갑자기 폐쇄됐다고 한다. 알아보니 얼마 전 서거한 카리모프 대통령(2016년 9월 사망)의 묘소가 사마르칸트에 있고, 마침 벨로루시 대통령이 묘소에 참배하는 날이어서 귀빈 영접을 위해 유적지 등은 모두 폐쇄되고 시내 도로 교통도 통제됐다는 것이다.

울룩벡이 지은 '사국사'의 중세 페르시아본.지평인문사회연구소
울룩벡이 지은 '사국사'의 중세 페르시아본.<지평인문사회연구소>

필자는 이전에 전문가의 안내를 받으면서 울룩벡 천문대와 ‘구르 에미르’를 방문했다. 티무르의 손자인 울룩벡은 왕위를 물려받아 40년간 통치하면서 티무르 제국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그는 천문학에 정통한 천재적인 학자로 1429년 천문대를 건축하고 놀라운 천문학적 업적을 남겼다. 또한 ‘사국사’라는 칭기즈칸과 몽골 제국 후손들의 왕가가계 역사를 밝히는 놀라운 책을 저술한 역사학자이기도 하다. 이 책은 중세 페르시아어로 쓰였고 근대에 우즈벡어로 번역된 바 있으며, 현재 필자가 북방 사학자인 전원철 박사의 국문 번역을 지원하고 있다. ‘구르 에미르’는 티무르가 지은 정교하고 아름다운 능묘인데 티무르와 그의 손자이자 위대한 천문학자인 울룩벡 등이 묻혀 있다. 그의 무덤과 관련해 아래와 같은 일화가 있다.

1941년 스탈린은 티무르의 무덤을 찾아내서 그 유골을 모스크바로 가져오도록 명령했다. 아마도 ‘전쟁의 신’이라 불리는 티무르와 자기를 싱크로나이즈 하려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둘은 전쟁을 앞둔 제국의 지배자이자 절름발이라는 동일한 신체적 조건을 갖고 있었다. 티무르는 젊은 시절 전쟁터에서 오른쪽 다리에 화살을 맞아 절름발이가 됐고, 스탈린도 절름발이였다.

저명한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이 고증 끝에 티무르의 무덤 구르 에미르를 발굴해 500년 만에 관 뚜껑을 열었다. 이때 지역 원로들이 관을 열면 전쟁이 일어난다는 예언을 전하며 극력 말렸으나 무시됐다. 다다음 날인 1941년 6월 22일 히틀러의 독일은 불가침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 스탈린그라드에서 6개월간 200만명이 전사하는 대전투가 벌어졌다. 소련 군사령관 주코프는 티무르 무덤을 열면 전쟁이 일어난다는 예언이 있었음을 나중에야 듣고 스탈린에 건의해 티무르의 유골을 다시 무덤에 가져가 관 뚜껑을 닫게 했다. 이틀 뒤 러시아군은 밀리기만 하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처음 승리했고, 결국 전승국이 됐다. 티무르의 유골을 다시 관에 넣도록 한 스탈린은 추후 누구도 그 관을 열지 못하도록 지시했다는 일화가 있다.

구르에미르 지하의 티무르 실제 관.지평인문사회연구소
구르에미르 지하의 티무르 실제 관.<지평인문사회연구소>

지금 티무르의 무덤 구르 에미르는 사마르칸트에 잘 보전돼 있고, 지하에 그의 관이 안치돼 있다. 관람객들은 지상에 있는 모형관만 볼 수 있을 뿐 지하에 있는 실제 관은 공개되지 않는다. 저자가 지난번 사마르칸트를 방문했을 당시 우즈베키스탄 측의 호의로 구르 에미르의 지하까지 내려가 티무르의 실제 무덤을 볼 수 있었고, 그때 사진이 남아있다.

실크로드에 남겨진 한민족의 흔적

행선지를 바꾸어 티무르의 왕비 묘소인 비비하님 모스크를 둘러보고 맞은편에 있는 전통시장에서 시간을 보내다 시내 쪽으로 나와 대기했으나 계속 통제가 안 풀려 결국 한 시간 남짓 걸어서 호텔로 향했다. 권위주의적 통치체제가 남아있는 이 나라만의 이색적인 모습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아프로시압 박물관으로 향했다. 이곳에는 7세기 영주의 궁전에서 발견된 벽화가 있는데, 그 벽화에 고구려인으로 추정되는 두 명의 사신 모습이 등장한다. 당시 한반도와 실크로드 사이에 교류가 있었음을 입증하는 생생한 증거다. 한편 고구려의 벽화에서도 중앙아시아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중앙아시아와 실크로드는 고대로부터 한민족과 교류했다는 추정을 쉽게 할 수 있게 한다. 동북아역사재단이 벽화의 보존과 아프라시압 벽화의 3D 영상 재현을 지원해서 박물관 측은 물론 세계 각국 관광객으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 박물관장이 동북아역사재단의 지원에 거듭 감사를 표하면서 직접 벽화를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레기스탄 돔 내부.지평인문사회연구소
레기스탄 돔 내부.<지평인문사회연구소>

아프로시압 언덕 남쪽에 있는 티무르 일가 등의 영묘 샤히진다를 보고 드디어 사마르칸트의 심장이자 실크로드의 상징적인 건축물인 레기스탄 광장에 다다랐다. ‘레기’는 모래, ‘스탄’은 땅이란 뜻이다. 이곳은 15세기 티무르의 손자 울룩벡이 건축한 신학교 등 3개의 웅장한 건축물에 둘러싸인 넓은 광장이다. 이곳에서 칸의 알현식과 사열식이 거행됐다. 지금도 인근에 있는 시장에서는 활발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다.

다음 목적지인 타슈켄트까지 300km는 기차를 타기로 했다. 고속열차가 다니지만 시간이 맞지 않아 6인 1실의 일반열차로 5시간 가까이 달렸다. 지난번 방문했을 때는 타슈켄트에서 사마르칸트까지 고속열차를 탔다. 일반 철로에 고속열차를 운행하다보니 무척 흔들렸다. 타슈켄트는 ‘돌의 나라’라는 뜻으로 중국 기록에는 ‘석국’으로 남아있다. 여느 도시와 같이 이슬람, 몽골, 차가타이 칸국, 티무르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966년 타슈켄트에 대지진이 일어나 도시 대부분이 파괴돼 고대 도시의 흔적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국립역사박물관, 아미르 티무르 박물관의 유물들만이 영화로웠던 고대사의 편린을 보여주고 있다. 타슈켄트 인근에는 김병화 협동농장 박물관이 있다. 김병화 선생은 연해주에서 태어나 다른 연해주 한인과 함께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했다. 그는 집단농장을 이끌면서 수백만 평의 황무지를 농토로 개간해 고려인들의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소련 정부로부터 두 차례 영웅 훈장을 받았다. 현재 CIS국가 거주 한인(고려인) 총 50만명 중 중앙아시아에 30만 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우즈베키스탄에 가장 많은 18만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렇게 2000km에 이르는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탐방을 마무리했다. 캐러번의 낙타가 지나던 그 길을 비행기와 기차, 버스 등으로 다녔지만 그들의 호흡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한민족은 고대부터 실크로드를 통한 외부 세계와의 끊임없는 교류 속에서 살아왔으며 한반도는 동서문명의 교역로인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자 종착역이다. 중앙아시아는 우리나라와 생활·문화·언어적으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고, 북방 알타이 문명에 같은 기원을 두고 있다. 신라·발해·고려시대에 이미 실크로드의 ‘소그드인’ 등을 통해 중앙아시아와 교류해왔다. 중앙아시아를 비롯한 북방 대초원의 암각화와 기마민족 삶의 흔적들, 고대 무덤을 비롯한 유적과 유물, 오르혼 강변의 퀼테킨 비문에 기록된 고구려 사신, 아프로시압 궁전의 고구려 사신 벽화, 투르판의 베제크리크 천불동 벽화의 한반도인 등 한민족과 실크로드의 수많은 교류의 흔적은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다.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역사의 중심, 몽골 제국과 그 후예들

중앙아시아는 실크로드의 관문으로 스키타이 이래로 몽골제국 시대를 거쳐 이후 18세기까지 동서문명 교류의 중심지였다. 이 지역 실크로드의 번영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세력은 몽골제국이다.

몽골제국은 유라시아 전역을 지배하면서 실크로드를 장악한 후 광활한 영토를 4개 국가로 나누어 통치했다. 세계 제국인 몽골제국의 출현으로 통합된 세계가 시작되고 동서문명 교류와 정착민과 유목민 사이의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팍스 몽골리카’가 실현된다. 그러나 3000만㎢를 넘는 이 세계 제국도 정치적 분열과 내분, 봉기에 의해 차례로 쇠락의 길을 걷는다.

원(元)은 1368년 명(明)에 나라를 넘겨주고 몽골 고원으로 쫓겨난다. ‘일 칸국’도 1330년대부터 전쟁과 혼란이 이어지다 1353년 80년 만에 막을 내렸다. 비교적 오랜 기간 존속하면서 러시아를 240년간 지배한 ‘킵차크 칸국’도 역시 내분과 피정복민족의 반란으로 1480년 멸망했다. 동서 교역로인 비단길에 위치한 ‘차가타이 칸국’은 혼란과 불안정이 지속되다 1334년 이후 분열되고 이에 따라 실크로드도 차단됐다.

혼란에 있던 차가타이 칸국에서 1336년 ‘철의 군주’라 불리는 아미르 티무르가 사마르칸트 부근 케쉬에서 태어났다. 티무르는 몽골제국 재건을 기치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중앙아시아를 통일해, 1370년 ‘티무르 제국’을 건설했다. 그는 유목민의 군사력과 정주민의 경제력을 통합해 칭기즈칸 이후 최초이자 최후의 대륙 지배자가 됐다. 티무르 제국은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실크로드의 중심이 됐고, 사마르칸트는 크게 번성했다.

티무르는 칭기즈칸이 이뤘던 실크로드의 대 통일을 다시 이루기 위해 정복 여정에 나섰고, 1398년 북인도를 정복한다. 1402년에는 실크로드의 기능을 차단하던 오스만 제국군을 터키 앙카라에서 섬멸한다. 이로 인해 유럽은 오스만 제국의 공격에서 살아남았고, 실크로드도 부활했다. 오스만군은 이 전쟁 후 50년간 존재감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는 연이어 실크로드의 또 다른 핵심축인 명나라 원정에 나섰으나 1405년 병사하고 말았다.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동서 교역로를 활짝 열고자 했지만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티무르 제국이 멸망한 이후 중앙아시아 카불 지역에서 티무르의 5대 손인 ‘바부르’가 등장했다. 바부르는 1526년 술탄 대군을 격파하고 델리를 점령했다. 이렇게 세운 나라가 330년간 지속된 무굴 제국이다. 몽골 제국이 인도 땅에서 무굴 제국으로 역사에 재등장한 것이다. 바부르는 몸소 전쟁터를 지키고 전투에 앞장서며 유라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사마르칸트에 진출해 티무르 제국을 복원하는 꿈은 이루지 못했다.

티무르 제국이 멸망한 후 우즈베키스탄 지역에는 16세기 이후 칭기즈칸의 후손들이 우즈베키스탄 3대 칸국을 출범시킨다. 15세기 초 아불카이르칸이 우즈베크 부족을 통합해 부하라를 수도로 샤이반 왕조를 세워 20세기 초까지 존속했다. 호라즘 지역에서는 16세기 초 히바를 수도로 히바 칸국이 세워져 20세기 초까지, 페르가나 지역에는 18세기 초에 코칸트를 수도로 코칸트 칸국이 세워져 19세기 중엽까지 이어졌다. 이와 같이 몽골 제국과 그 후예들은 광활한 실크로드의 주인이 됐고 동서양을 망라한 제국 안팎을 연결하는 거미줄 같은 통상 루트를 통해 세계 교역을 혁명적으로 확대시켰다.

우즈베키스탄의 역사.지평인문사회연구소
우즈베키스탄의 역사.<지평인문사회연구소>

실크로드의 중심축인 우즈베키스탄 지역을 차지했던 세력들을 보면 기원전 6세기경 페르시아에서 시작해 스키타이, 마케도니아 제국, 훈족, 압바스 왕조의 이슬람 세력, 사만 왕조로 이어지다 이후에는 투르크 왕조의 영역이 된다. 카라한, 가즈나 왕조에 이어 셀주크 제국(1307~1194년), 호라즘 제국(1077~1231년), 몽골 제국(1206~1368년), 차가타이 칸국(1227~1367년), 티무르 제국(1370~1526년)으로 이어졌다. 티무르 제국이 사라진 16세기 이후에는 우즈베크 칸국이 세워져 19~20세기까지 이 지역을 차지했으나 19세기 들어 러시아 세력이 중앙아시아를 점령하기 시작해 1924년에는 소련 연방에 편입됐다. 이후 1991년 소련 붕괴로 중앙아시아 5개국이 독립할 때 우즈베키스탄도 독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세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몽골계 투르크인들이 여러 나라를 건설했는데 이에 대해 북방사학자 전원철 박사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고구려의 후예들이 서진하면서 건설한 나라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티무르 제국의 건설자 티무르는 발해 건국자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의 19세손이자, 칭기즈칸의 방계 5대손이라 한다. 물론 티무르는 스스로 칭기즈칸의 후예라고 했다.

또 중앙아시아의 중심지였던 우즈베키스탄 등지에 건설한 여러 거대 왕조들도 고주몽의 후예이자 발해 대조영·대야발 가문의 선조격인 오구즈칸의 후손들이 건국한 나라들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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