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에는 발해와 항일투쟁의 숨결 살아 숨 쉰다  
연해주에는 발해와 항일투쟁의 숨결 살아 숨 쉰다  
  • 김석동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
  • 승인 2019.12.02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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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 러시아 곳곳에 남아있는 한민족의 역사와 독립운동의 ‘얼’
항일 독립운동 근거지였던 연해주 연추마을.<지평인문사회연구소>

한민족의 고대사는 물론 근세 역사와도 뗄 수 없는 곳, 러시아 연해주(沿海州)를 다시 찾았다. 필자는 세 번에 걸쳐 연해주 여행을 했다. 인천공항에서 출발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발해 역사와 항일운동 역사의 현장인 핫산, 크라스키노, 우수리스크 등을 탐방하는 여정이었다. 크라스키노의 염주 성터는 여름철에는 늪지가 돼 접근이 어려워 다소 추운 계절이지만 지표면이 얼어붙어 차량 운행이 가능한 11월을 택했다.

연해주에서 찾은 순국선열의 흔적

연해주는 헤이룽강·우수리강 그리고 동해로 둘러싸인 땅으로 러시아 83개 연방 지역의 하나인 ‘프리모르스키(Primorskiy) 지방’을 말한다. 프리모르스키라는 말은 러시아어로 ‘바다에 접해 있다’를 뜻하고, 한자로 표기하면 연해(沿海)가 된다. 면적은 약 16만4700㎢로 러시아의 0.92%에 불과하나 우리나라의 1.6배 크기다. 80%가 ‘시호테-알린산맥’ 등 산림 지대이며 평균 기온은 1월 영하 20도, 7월 영상 20도다. 인구 약 200만명으로 러시아 전체의 1.4%가 살고 있다.

연해주는 북방 기마민족이 세운 금(金)·원(元)·청(淸)이 차례로 지배하였으나 16세기 들어서면서 러시아가 시베리아와 극동지역에 강한 집념을 보이며 진출했다. 17세기 초 태평양 연안까지 진출한 러시아는 연해주 접경인 헤이룽강 일대에서 청나라와 분쟁을 벌였다. 청나라는 1653년 헤이룽강에서 러시아 공격에 실패하자 조선에 원병을 청했고 이에 따라 1654년·1658년 2차례 ‘나선정벌’이 이루어졌다. 러시아가 18세기 유럽지역 전쟁에 참여하면서 연해주가 소강상태였으나, 19세기 들어 러시아의 동방 진출은 가속화됐다. 그 결과 1858년 청과 ‘아이훈 조약’을 체결해 헤이룽강 이북을 차지하고 우수리강 동쪽 지역은 청나라와 공동 관할 지역으로 두게 되었다. 1860년에는 청과 ‘베이징 조약’을 체결해 연해주는 러시아로 완전히 넘어가게 된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동방정복’의 뜻을 가진 이름이라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일찍 남쪽으로 출발해 연해주 최남단 지역인 핫산으로 향했다. 두만강과 북한·중국·러시아 3국이 만나는 국경 지역을 보기 위해서다. 네 시간 남짓 SUV로 달려 도착한 핫산군 남쪽 끝에 있는 핫산읍의 모습은 군 시설, 그리고 무장한 군인들만 간혹 보이는 그야말로 음침하고 삭막한 국경 마을 그 자체였다. 핫산읍은 중국의 팡촨, 북한의 두만강과 접경하고 있어 출입 자체가 엄격히 금지되어 있고 방문하기 위해서는 러시아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그 허가가 중앙에까지 가서 내려온다고 한다. 당연히 미리 신청을 하지만 현지에 가서도 당일 아침에야 허가 여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다행히 당일 아침 허가 통보를 받고 방문하게 되었다. 그러나 필자가 2년 후 다른 일정으로 이곳을 다시 방문했을 때는 허가가 나지 않아 쉽지 않은 일임을 실감했다.

두만강 철교 앞에 서 있는 김석동 소장.
<지평인문사회연구소>

차에서 내려 오솔길을 걸어서 두만강 쪽으로 가니 수풀 사이로 두만강 철교가 예스러운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 나타나는 회색 줄기의 두만강, 아! 두만강이다. 감회가 새로워지며 ‘두만강수음마무(豆滿江水飮馬無·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라)’라는 남이 장군의 시구가 떠올랐다. 저 너머가 바로 북한 땅인데 좁은 강폭의 강물은 무심코 국경을 가르고 있다. 핫산에 접경한 중국은 훈춘의 팡촨에서 국경이 끊어져 태평양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육로로 단 16km에 지나지 않는 거리다. 중국은 이곳에 태평양이 보이도록 팡촨탑을 세웠다. 태평양을 향한 중국의 염원이 엿보이는 상징물이다.

두만강을 뒤로하고 다시 북쪽으로 차를 돌렸다. 1시간가량 달려 핫산 군의 북쪽에 자리 잡은 크라스키노에 도착했다. 이곳은 동해에 접하고 있는, 약 3500명의 인구가 사는 작은 해변 마을인데 발해의 염주성이 자리 잡았던 곳이다. 뒤에 소개하겠지만 어렵사리 옛 발해의 항구에 자리 잡았던 염주성을 찾아 성터를 두루 둘러보았다. 성터는 남북 380m, 동서 300m의 넓이로 많은 유물이 발굴된 바 있고 지금도 발굴이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크라스키노 인근에는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연추 마을(연추상·중·하리)이 있다. 크라스키노의 높은 지대에 세워진 핫산 영웅탑에서 보면 이 마을이 내려다보인다. 연추 마을은 ‘지신허’와 함께 연해주의 대표적 초기 한인 마을로, 지리적으로 두만강과 가까워 한인들이 가장 많이 살았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수많은 애국지사가 국경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했고 연해주 의병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안중근 의사 등이 창설했던 ‘동의회’의 본부가 연추에 있었으며 안 의사를 비롯한 12명의 동지가 무명지를 끊었던 곳이다. 안중근 의사는 이곳에서 때를 기다리다 1909년 10월 26일 헤이룽장성의 하얼빈으로 가서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하는 거사를 단행했다. 이를 기념해 크라스키노에는 2011년 한국기업 유니베라가 후원하고, 운영하는 농장 인근에 단지동맹비가 세워졌다.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연해주의 주도(州都)로 62만명이 사는 러시아 극동의 부동항이자 군사 요충지로 태평양함대 사령부가 있는 도시다. 시내에서 신한촌 기념비를 방문했다. 당초 시내 중심지에 ‘개척리’라는 집단 거주지가 있었는데 러시아 당국은 콜레라를 명분으로 강제 철거하여 그 땅을 군용으로 전환했다. 한인들은 1911년부터 피땀 흘려 다시 시외곽에 ‘신한촌’을 건설했다. 신한촌은 망명 항일애국지사들이 한인 결사체 ‘권업회’를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의 중심축이 됐다. 이곳은 1937년 한인 강제이주 때 폐쇄됐고 지금은 1999년에 세운 기념비만 남아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북쪽으로 112km 떨어진 우수리스크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작은 역 ‘라즈돌로예’에 잠시 들렀다. 1937년 연해주에 거주한 한인들의 이주 역사의 현장이자 ‘회한의 역’이다. 오가는 이도 보이지 않는 한적한 역 건물은 을씨년스런 분위기 속에 말없이 서 있었다. 역사 내부까지 살펴봤으나 쓰라린 과거에 대해서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다시 우수리스크로 향했다. 우수리스크는 연해주 한인들의 본거지이며 항일운동의 거점이었던 곳이다. 시내에서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이 일본 헌병대에 의해 총살당하기 전까지 살았던 자택을 방문했다. 한·러 수교 20주년을 기념해 이 집 담벼락에는 최재형 선생을 기념하는 현판이 달렸다. 고려인 문화센터에도 들러 고려인들의 애환의 역사를 실감케 하는 자료들을 둘러보았다. 시립공원에 가니 금나라 시대라는 팻말이 있으나 발해풍 유적임을 알아볼 수 있는 거북 모습의 비석 하단부를 볼 수 있었다.

이어 시외곽 스위픈 강변에 있는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를 보며 다시 한번 독립운동을 했던 주인공들의 노고를 생각하며 머리를 숙였다. 1시간 정도 차를 타고 이동해 발해 성터를 찾았다. 우수리스크는 옛 발해의 솔빈부 자리로 추정되고 있으며 성벽터로 보이는 언덕에서 넓은 들판으로 연결되는 성터는 남북 1.2km, 동서 350m에 달한다. 성벽이 3~5m에 달하는 토성으로 외성은 전체 길이가 8km가 넘는다고 한다. 이상설 선생 유허비에서 스위픈강을 보면 이 산성이 보인다.

연해주와 고려인, 그리고 한민족 근대사

1863년 함경도 지역 농민 13가구가 연해주로 이주한 이래 ‘조러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는 러시아와의 우호적 분위기에서 한인 이주가 계속 늘었다. 이어 1910년 일제의 조선 강점을 전후해서는 독립운동을 하는 애국지사의 망명과 이주가 이어졌다. 일제강점기에도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이 대거 연해주로 이주했다. 이들은 지신허·연추 등에 한인 마을을 형성해 살았다.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과 관련해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지역이다. 또한 블라디보스토크에는 한인 집단 거주지인 ‘신한촌(‘개척지’에서 이주한 지역)‘이 세워졌다. 한민족의 본격적인 이주가 이뤄진 것이다.

연해주는 두만강으로 한반도와 접하고 있는데 겨울에는 강이 얼어 이동이 쉽다. 연해주 남부는 지형·토질뿐 아니라 나무와 야생화 등 식생이 우리나라 중남부 지역과 대단히 흡사하다. 이 또한 한인들의 이주가 늘어난 배경이 아닐까 한다.

1910년을 전후해서는 애국지사의 망명과 이주가 줄을 이어 연해주는 만주의 북간도와 함께 조직적인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1908년 최재형·이범윤·안중근·이위종 등은 연추에서 ‘동의회’를 결성했고, 이듬해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12명의 동지는 왼손 무명지를 끊어 조국 광복에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이 맹세는 안 의사에 의해 1910년 봄 여순 감옥에서 지켜졌다. 이범진·이준·이상설·이위종은 잊을 수 없는 ‘헤이그 특사’ 사건의 주인공들이다. 이범진 초대 러시아 공사는 헤이그 밀사를 발 벗고 후원했다. 1906년 이준·이상설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합류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도록 했고 그의 아들 이위종도 합류시켰다.

러시아 우수리스크에 위치한 애국지사 이상설 선생
유허비에 사람들이 모여있다.<뉴시스>

그러나 나라를 잃은 직후 이범진은 1911년 1월 13일 전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은 후 조국의 절망적 상황에 저항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나는 우리의 적들에게 복수할 수도, 그들을 벌할 수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부딪혀 있다. 이것이 내가 오늘 자살로 생을 마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죽어서라도 조국에 가고팠던 이상설의 유해는 동해로 흐르는 스위픈강에 뿌려졌다. 2001년 러시아 정부의 협조를 얻어 스위픈 강변에 세워진 ‘이상설 선생 유허지’ 비석에는 “그 유언에 따라 화장하고 그 재를 이곳 스위픈 강물에 뿌리다”라고 쓰여 있다.

이어 의병부대 ‘13도 의군’과 독립군 양성을 위한 ‘권업회’가 창설되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대한광복군정부’가 수립됐다. 1919년 연해주에 최초의 임시정부인 ‘대한국민회의’가 세워졌고, 그해 상해임시정부와 통합됐다. 3·1운동을 계기로 연해주 한인들의 독립운동이 요원의 불길같이 확산하자 이를 크게 겁낸 일제는 1920년 봄 연해주 한인 학살에 나서 살인과 방화를 자행했다. 신한촌에서만 300명 이상이 죽었고, 항일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도 이때 순국했다. 하지만 연해주의 한인들은 일제에 대항해 무장투쟁을 계속하였다.

연해주는 또 다른 슬픈 역사의 현장이다.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러시아의 스탈린은 연해주에 살던 전체 한인들을 강제 이주시켰다. 이유는 어이없게도 일본과 내통할 수 있다는 것이었고, 총 17만1781명이 ‘라즈돌로예 역’ 등에서 무작정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향했다. 굶주림과 공포 속에 열차가 도착한 곳은 연해주에서 6000km 떨어진 반사막 지대인 카자흐스탄의 알마티,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 인근 지역이었다. 이들의 삶이 얼마나 처참했던지, 처음 2년간 1만2000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한인들의 생명력은 강인했다. 척박한 땅에 버려진 이들은 결국 소비에트 최고의 모범 집단을 일궈내면서 살아남았다. 소련 해체 후인 1993년 러시아는 고려인 명예회복 법안을 채택했고, 고려인이 연해주로 가는 길은 다시 열렸다. 현재 연해주에 거주하는 고려인 5만여명 중 3만여명은 재 이주해 정착한 사람들이다.

연해주의 한민족 고대·중세 역사

발해강역도.<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연해주는 한반도와 가장 인접한 지역으로 고대로부터 한민족 역사의 무대였다. 이 지역의 고대사는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극동연방대학 박물관에는 BC 1만5000년 전 구석기 유물이 있다. 이후 청동기 시대를 거치면서 이곳은 고조선의 역사 무대였고 그 뒤를 부여·고구려가 이어받았다. 

고구려는 668년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으나 698년 발해라는 이름으로 부활했다. 중국 사가들은 만주와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고대민족에 대해 시대별로 숙신(愼), 물길(勿吉), 말갈이라고 부르다가 발해 멸망 후에는 그 땅은 여진(女眞)으로, 그 사람은 여진족으로 불렀다. 이 연해주 땅이 우리 역사와 깊은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연해주에서는 발해 유적지가 계속 발굴되고 있다. 발해 5경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으나 대체로 동경 용원부는 3대 문왕 후기부터 5대 성왕 초까지 10년간 발해 수도였고, 그 위치는 두만강 인근 간도의 중국 헤이룽장성으로 추정된다. 이 동경 용원부에 소속된 연해주의 크라스키노에서 발해의 성터와 독창적인 유물이 발굴됐다. 특히 크라스키노(염주)는 일본으로 가는 해로(日本道)의 출발점이 된 곳으로 당시 활발한 대외 활동을 말해준다.

발해 유적 중 크라스키노 성터는 발해 역사 규명에 있어 기념비적인 발굴로 평가되고 있으며 지금도 발굴이 계속되고 있다. 크라스키노 마을에서 서쪽으로 약 2.5km를 가면 좌측으로 드넓은 습지가 나타난다. 이 습지에서 고상버스를 타고 0.9km 정도 남쪽으로 가면 철길을 만나고, 이 철길을 지나 수풀을 헤치고 걸어 1.8km 정도 더 가면 발해의 크라스키노 성터에 이른다. 1960년 러시아 학자가 이 성의 성격을 밝힌 이후 지금도 한·러 학자들이 발굴을 계속하고 있다. 성벽 외곽과 세 군데 성문, 옹성의 흔적이 뚜렷하게 존재한다.

크라스키노에서 농업 생산을 하는 한국 ‘유니베라’의 현지 법인장이 위성 좌표로 어렵사리 현지까지 안내해주었는데, 학술탐사팀 외에는 첫 방문이라 귀띔해주었다. 우수리스크 시 인근 지역의 발해 성터도 답사했는데, 연해주에서만 발해 유적지가 280여 곳에 이르지만 제대로 발굴이 이뤄진 곳은 몇 곳에 불과하다고 한다. 니콜라예프카 성터, 콕샤롭카 유적지 등 이름난 발굴지 외에도 수많은 발해 시대 흔적이 남아있어 한·러 학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를 계기로 우리의 고대사 연구가 진일보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nbsp;김석동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
김석동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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