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구르제국, 몽골고원서 새 기마유목민 역사 펼치다
위구르제국, 몽골고원서 새 기마유목민 역사 펼치다
  • 김석동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
  • 승인 2018.10.31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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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4년 돌궐 멸망시키고 제국 건설…고려 말 관리·역관으로 한반도 정착
투르탄벽화.<김석동>

위구르인은 누구인가?

기마유목민족의 진원지 몽골고원은 흉노(BC 3C~AD 2C), 선비(1~3C), 유연(4~6C), 돌궐 (6~8C) 등이 차례로 지배하다 위구르가 이어 받았다. 위구르는 돌궐시대까지는 몽골고원에서 활동하였으나 이후 중앙아시아까지 활동 무대를 넓힌 민족이다. 이들은 BC 3세기경 진(秦)시대에 몽골고원에 살던 정령(丁零)부족에 이어 5세기경 남북조시대에 천산산맥일대에 살던 철륵(鐵勒)부족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수·당 시대에는 회흘(回紇, 위구르), 회골(回鶻), 송·원 시대에는 외오아(畏吾兒)로 불렸다. ‘구당서’회흘전은 다음과 같이 위구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회흘(回紇)은 그 선조가 흉노인데 후위시대에 철륵 부락이라고 불렀다. 그 무리는 아주 작았으나 그 습속이 용맹하고 강했는데 고차(高車)에 의탁 했다가 돌궐에 속하게 되면서 근래에는 특륵(特勒) 이라고 한다. 군장이 없이 주거가 일정하지 않게 물과 풀을 따라 옮겨 다니는데 사람들의 성격이 흉악 하고 잔인하나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을 잘했으며 탐욕이 아주 심해 도둑질 하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다. 돌궐이 나라를 건국한 이래 동쪽과 서쪽으로 정벌을 할 때 모두 그의 힘을 밑천으로 삼아 북방의 땅을 제압할 수 있었다. (구당서 외국전, 동북아역사재단)” 이 기록은 기마유목민 위구르의 조상은 흉노족이 라고 밝히고 있는 것과 동시에 기마군단에 대한 당시 중국인들의 두려움과 적대감을 적나라하게 담고 있다.

1930년대 들어 중국 신강성(新疆省) 정부는 위구르 인들에 대해 유오이(維吾爾·웨이우얼)라는 호칭을 정했다. 위구르인은 현재 중국의 신장웨이우얼자치구(면적 약 166만㎢)에 약 880만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중국내 위구르인의 99%에 해당한다. 이들은 중국 소수 민족 가운데 인구 규모로 보면 장족, 만주족, 회족, 묘족에 이어 다섯 번째다. 위구르인들은 신장위구르자치주 내의 타림분지, 투르판, 하미, 이리, 우루무치 등 톈산산맥 북부에 다수 거주하고 있으며, 중국 외에 중앙아시아 지역에도 일부 산재해 살고 있다.

돌궐 멸망시키고 초원의 강자로 등장

터키교과서의 위구르 지도.<김석동>

위구르는 설연타, 돌궐 등에 복속하다가 8세기 초후 돌궐 혼란기를 틈타 세력을 키웠다. 744년 돌궐 제국을 멸망시키고 쿠틀룩 빌게퀼카간이 즉위하여 위구르제국을 건설했다.

이즈음 당나라에서는 안사의 난(755~763년)이 일어난다. 현종 때 소그드 출신의 안록산과 사사명이 반란을 일으켜 현종과 양귀비가 피신한 사이에 장안을 점령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756년). 그러나 반란 우두머리 두 사람이 모두 살해되면서 실패한 유명한 사건이다. 당나라는 반란진압을 위해 주변국들에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위구르는 강력한 기마군단을 보내 반란군을 격파하고 낙양과 장안을 수복해 당나라를 구했다. 다시 왕권을 회복한 당나라는 공주를 위구르 카간에게 시집보내고 방대한 공물로 보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위구르는 동방세계의 최강 세력으로 급부상, 100년 가까이 존속한 초원제국으로 역사에 이름을 올렸다.

위구르 시대에는 유목민문화에 농경문화가 도입되면서 도시화와 정착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이를 토대로 유목민 최초로 성곽도시가 건설됐다. 몽골의 오르혼강 상류에 있는 위구르제국의 수도 카라발가순은 초원로의 행정 및 교역 요충지로 비문과 성벽이 발굴돼 그들 문명의 흔적을 짐작하게 한다. 이 일대는 이전의 돌궐, 이후의 몽골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몽골제국의 초기 수도였던 카라코룸이 이곳에서 수십킬로미터 불과한 곳에 있다.

위구르인들은 실크로드의 중심지에서 동서교역에 큰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유목과 농경, 동서 문화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위구르문화를 구축했다. 그들은 초기에는 돌궐문자를 썼으나 소그드인의 영향을 받아 스스로 위구르 문자를 만들어 사용했고, 높은 수준의 문화 예술을 꽃피우면서 쿠차·둔 황·투르판 등지에 문서와 벽화 등 다수의 문화유적을 남겼다.

위구르제국은 840년 투르크계 키르키즈에 멸망했으나, 위구르인들은 제국의 멸망 후에도 간쑤, 둔황, 투르판 등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지역과 중앙아 시아에 투르크계 국가들을 건설했다. 9세기 중반 위구르인들은 실크로드의 하서회랑 서부지역에 하서위구르를 세웠으나 1026년 티베트계 탕구트에 멸망했고, 비슷한 시기 더 서진해 천산산맥 일대에 천산위구르세력을 형성했으나 13세기 초 칭기즈칸 군에 멸망했다.

중앙아시아에서 전개되는 기마유목민 역사

터키국기와 동투르키스탄국기가 비슷하다.<김석동> 

중앙아시아 지역은 투르키스탄(Trukistan)이라 불렸고 이는 ‘투르크인(Turk)의 땅(Stan)’이란 뜻이 다. 투르키스탄은 톈산산맥과 파미르고원을 경계로 동서로 나누어지는데, 동투르키스탄은 지금의 중국 신장웨이우얼자치구이며, 서투르키스탄은 중앙아시아 지역이다.

신장지역은 1760년 청나라 건륭제 때 중국으로 편입되었으나 그 후에도 민족적 전통을 유지하며 분리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30~40년대 2차례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이란 이름으로 일부 지역이 독립을 선언했으나, 1949년 중국이 재점령해 독립이 무산됐다.

서투르키스탄은 오늘날 카자흐스탄·키르키스탄·타 지키스탄·우즈베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아프가니 스탄 등이 있는 땅으로, 이들 국가는 1990년대 초소련이 해체되면서 독립했다. 이 여파로 동투르키스탄 지역인 중국의 신장위구르에서도 분리 독립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중앙아시아 지역은 오래전부터 기마유목민이 활동 해오던 곳이다. 몽골고원을 평정한 흉노제국은 중앙아시아 지역 일대까지 정복하여 실크로드를 장악했다. 흉노 이후 이 지역은 유연·돌궐·위구르 등이 지배했는데, 특히 9세기부터 위구르인들이 중앙아시아 오아시스지대에 본격적으로 이주 정착하면서 투르키스탄이라 불리는 계기가 됐다. 10~11세기 에는 투르크계 유목민인 카라한 왕조가 중앙아시아에서 세력을 떨쳤으나, 11세기말~12세기 셀주크 제국과 거란이 서진한 세력인 카라기타이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13세기에는 몽골제국의 차카타이한국, 15세기에는 티무르제국 등이 차례로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기마유 목민족 국가들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청·영국·러시아 등이 이 지역을 놓고 각축을 벌였다. 그 결과 동투르키스탄 지역은 1760년대 청나라가 차지했고, 서투르키스탄 지역은 1880년대 러시아가 대부분 장악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위구르인들의 이동 등으로 투르크화가 이루어지면서 동시에 종교적으로는 이슬람 화가 진행됐다. 8세기에 당나라는 실크로드를 지배하기 위해 중앙아시아까지 세력을 확장해 힌두쿠시 산맥까지 정복했고, 이슬람화한 아랍세력도 부하라, 사마르칸트까지 진출하는 등 양 세력은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두고 격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751년 톈산산맥 서북쪽 탈라스강에서 벌어진 전투 에서 고구려 출신 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당나라군 대가 압바스의 이슬람 연합군에 패퇴한 이후 파미르고원 서쪽의 중앙아시아 지역은 급속히 이슬람화 했다. 당나라시대에 위구르는 회흘(回紇)·회골 (回鶻)로 불렸는데, 위구르인들이 이슬람화하면서 이슬람교가 중국에서 회교(回敎) 또는 회회교(回回 敎)로 불리게 되었다.

위구르-중앙아시아와 한민족의 교류

아프라시압 궁전벽화와 복원묘사도.<김석동>

중앙아시아 지역은 한민족과 뿌리를 같이하는 기마군단이 활약해 온 땅이자 실크로드의 관문으로 18세기까지 동서 간 문명 교류의 중심이었다. 이 실크로드는 스텝지역 중심을 통해 동서를 연결하는 통로로, 한반도는 유라시아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자 종착역이라 할 수 있다.

오래전부터 이 지역은 우리와도 많은 교류가 있었다. 신라·발해·고려시대 줄곧 실크로드에서 활약한 상인인 소그드인 등을 통해서 중앙아시아 및 서방과 교류해 왔고, 이러한 흔적은 우리 문화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한반도의 수많은 고분과 유물은 스텝지역 기마유목민과 한반도의 교류를 말해주고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와 뿌리를 함께 하는 고대 북방유목민의 생활·관습·문화 등에 주목 할 필요가 있다. 수·당나라와 고구려가 대항할 때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던 돌궐이 고구려와 동맹관계였다는 사실은 군사적 이해관련 뿐 아니라 알타이 민족으로서의 친연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신라는 실크로드를 통해 페르시아 등 서역문화권 과도 활발하게 교류했다. 신라의 무덤에서는 북방계는 물론 다양한 서역 문화의 흔적이 나타난다. 신라에서 발굴되는 유리제품은 로마문화권 등 서역 에서 유래했고, 경주의 괘릉에서는 서역인의 모습을 한 무인상이 발견됐다. 처용가의 처용도 신라 헌강왕 때 귀화한 이슬람계 사람이라는 설이 있다.

고구려 벽화에서도 중앙아시아 인을 볼 수 있으며, 사마르칸트에 있는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는 고대 한민족 특유의 복식을 하고 있는 2명의 사신 모습이 그려져 있다.

고려에서도 위구르인들이 활약했다. 몽골제국은 몽골인과 위구르인의 연합정권 성격으로, 위구르인들은 준 지배계층을 형성했다. 이 위구르인들은 몽골군의 한반도 침입 때 참전하거나, 이후 고려가 몽골 영향력 하에 있을 때 관리와 역관 등으로 한반도에 와서 정착하기도 했다.

고려에 들어온 위구르인들은 대부분 이슬람교도로 ‘고려사’ 등에 회회인(回回人)으로 묘사돼 있는데, 개경에 회회인의 집단 거주지가 있을 정도였다. 고려 가요 쌍화점에 등장하는 회회아비는 이들을 일컫는다. 설장수라는 위구르인은 고려 관리가 되어 정몽주와 고려왕조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으나 이후 조선조 때도 등용돼 외교에 공을 세웠다.

몽골과 고려의 혼인정책으로 고려 왕비가 된 몽골 공주는 대규모 시종들을 대동하였는데, 이때 다수의 위구르인들이 포함되었다. 충렬왕비가 된 쿠빌라이의 막내딸 제국대장공주를 따라와 귀화한 장순룡은 장군까지 올라 덕수 장 씨의 시조가 되었다.

세종 때 학자 설순은 고려 말 귀화한 위구르인의 후손이다.

근세에 들어서도 우리와의 관계는 지속됐다. 중앙아시아는 한인(고려인)이 1937년 강제 이주된 후 70여 년간 거주한 지역으로, 지금도 30만 명 이상이 살고 있다. 중국·미국·일본 다음으로 많은 한인이 살고 있는 지역이다. 이슬람교는 조선시대 유교에 배척돼 사라졌으나, 6·25 참전 터키 군에 의해 다시 전파되었다.

우리나라는 아시아의 동쪽 끝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한민족은 오랜 역사 속에서 북방기마 유목민족과 끊임없이 교류해왔고, 그 역사도 유라시아 스텝제국들의 역사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보다 긴 시간의 흐름과 넓은 공간적인 이해 속에서 한민족의 형성과 삶의 흐름을 읽어나가는 것이 현대에 들어 기적을 이룬 국가 대한민국을 해석하고 미래의 모습을 그려나가는데 필요하다고 하겠다.

김석동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

금융위원회 위원장

재정경제부 제1차관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

재정경제부 차관보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

인사이트코리아, INSIGHT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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