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은 ‘흉노’가 무서워 만리장성 쌓았다 
진시황은 ‘흉노’가 무서워 만리장성 쌓았다 
  • 김석동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
  • 승인 2018.02.01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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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대초원에 최초의 제국 건설한 최강의 기마민족 ‘흉노’

흉노의 등장

터키교과서의 흉노 세력지도.<김석동>

흉노는 원래 중앙아시아, 중국북방지역과 몽골고원 서부 등 넓은 지역에 흩어져 살았다. 이들은 광활한 초원길을 장악하고 고대로부터 문명교류의 장을 열었다. 흉노는 BC 318년부터 중국 역사서에 본격 등장하는데 요임금 이전에는‘훈육’, 주 왕조에서는 ‘험윤’이라 했다가 진한(秦漢)때 부터는 흉노라 불렀다 한다. 

사마천의 ‘사기’ 흉노열전(권110)에 기록된 흉노에 관한 내용은 이렇다. “흉노는 하후씨 후예로 순유(淳維)라고 불렀고, 산융·험윤·훈육 등 여러 종족을 포함한다. 그들은 물과 풀을 따라 옮겨 살았기 때문에 성곽이나 일정한 주거지가 없고 농사를 짓지 않았으나 세력범위는 경계가 분명했다. 남자들은 자유자재로 활을 다룰 수 있어 전원이 무장기병이 되었다. 평상시에는 목축, 사냥을 직업으로 삼고 긴급한 상황에는 전원이 군사행동에 나설 수 있었다. 싸움이 유리할 때는 나아가고 불리할 경우에는 후퇴했는데 도주를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이는 유목민의 기마군단 스키타이에 대한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기록들을 연상시킨다. 기마유목민은 정착민들과 달리 그 삶의 특성상 역사기록이 취약하다. 흉노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들 자신이 기록한 역사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중국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중국의 흉노기록은 기본적으로 적대관계에서 남긴 것이어서 서술이 부정적이고 편견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다.

춘추전국시대 중국 북방 지역에는 흉노인들에 의해 거대한 유목민 사회가 등장했다. 흉노의 왕(王)은 ‘탱리고도선우(선우)’라고 불렸는데, 최전성기는 두만과 그의 아들 묵특 시대였다. 두만은 태자 묵특을 폐하고 이복동생을 태자로 세우려고 묵특을 알타이지역 동서교역로의 중심부에 위치한 강국인 월지에 볼모로 보낸 후 묵특을 제거하기 위해 불시에 월지를 공격했다. 그러나 묵특은 가까스로 월지를 탈출해 흉노에 돌아와 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는 장군이 됐다. 

묵특은 소리 나는 화살(명적)을 만들어 자기가 먼저 명적을 쏘면 군사들이 그곳을 따라 쏘도록 명령했다. 묵특은 부하들을 철저히 훈련시켰다. 처음에는 사냥터에서 자신의 명령을 따라 쏘지 않은 자를 잡아 죽였다. 다음은 자신의 애마 그리고 애첩에게 차례로 명적을 쏘았고, 차마 따르지 못한 자는 죽였다. 그런 후 두만이 타고 있는 말에 명적을 쏘았을 때 부하들은 다 따라 쏘았다. 마지막으로 아버지 두만 선우에 명적을 날려 그의 부하들이 두만을 죽이게 하고 묵특은 흉노의 왕이 됐다(BC 209).

당시 흉노와 더불어 세력을 떨치던 동호가 묵특에게 흉노의 보배 천리마를 달라고 청했다. 신하의 반대에도 묵특은 천리마를 보냈다. 동호는 다시 선우의 연지(후비) 중 한 명을 보내라 했다. 신하의 반대에도 묵특은 연지를 보냈다. 그러자 동호는 흉노와의 사이에 있는 이천 여리의 버려진 황무지를 차지하겠다고 했다.

신하들은 주어도 좋고 안주어도 좋다는 식으로 간언했으나 묵특은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 “땅은 나라의 근본이다. 어떻게 그들에게 줄 수 있다는 말이냐.” 그리고 주어도 좋다고 한 자들은 모조리 참수한 후 동호를 공격하여 대파했다. 이어 월지, 연 등을 차례로 공격해 빼앗겼던 땅을 모두 회복했다. 

흉노는 어떤 나라인가

흉노는 스키타이를 잇는 유목민의 기마군단으로, BC 4세기에 등장해 BC 3세기말 몽골고원을 통일해 최초의 스텝제국을 건설했다. 기마유목민 국가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흉노제국은 기마군단의 가공할 전투력을 바탕으로 단기간에 대제국으로 발전했다. 흉노는 중국 최초 통일국가인 진에 이어 한과 쟁패하면서 강대한 세력을 형성했으나, 중국 사서에 남은 기록만으로는 흉노의 실체를 알기 어렵다. 흉노의 실제 세력은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BC 4세기 후반 몽골고원은 흉노족, 동북지역(만주)은 동호족이 각각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전국시대에 흉노를 호(胡), 그 동쪽 세력을 동호(東胡)라고 불렀다. 흉노 기마군단의 등장은 보병을 주력으로 하는 정주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말의 기동력, 활의 파괴력, 강력한 금속무기, 대초원을 무대로 전개하는 특유의 기마전술, 광활한 초원을 이어주는 정보망 등으로 대표되는 흉노의 전투력은 공포 그 자체였다. 특히 기마군단의 기동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몽골제국시대 기마군단의 기동력을 보면, 로마군은 하루 20~30km를 진군했지만 몽골군은 60~100km 정도로 비교자체가 되지 않았다. 군대의 힘을 역학공식인 ‘힘=크기×속도’(f=m×a)를 빌어 가늠해보면, 기마군단의 전투력이 얼마나 위협적이었는지를 쉽게 상상해 볼 수 있다.

흉노는 전성기에 동쪽은 요하, 서쪽은 아랄해·카스피해, 남쪽은 황하와 티베트고원, 북쪽은 바이칼호수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흉노제국이 지배했던 영역은 600만㎢를 훌쩍 넘어섰다. 무엇보다 지배하는 땅이 넓어야 강대국이었던 시절이다. 기원전 6세기경 페르시아 제국이나 그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제국의 최대 영토는 600㎢ 안팎이며, 로마제국의 최대영토는 기원후 2세기 초  스페인·터키·북아프리카를 모두 포함해 650만㎢ 정도였다. 중국이 가장 융성했던 한나라 한 무제 시대 최대 영토는 720만㎢였다. 이를 보면 흉노제국의 세력을 능히 가늠해볼 수 있다. 

흉노는 면적뿐 아니라 영향력 면에서도 그에 걸맞게 막강해 유라시아 양단에 강력한 흔적을 남겼다. 흉노는 진, 한 등 최강의 중국 왕조를 위협하면서 세력을 확장 시켜왔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서진하면서 유라시아 양단에 걸쳐 역사를 바꿔 놓았다. 흉노는 기마유목민이 세운 국가의 전형이 되었고, 이후 수많은 국가들이 유목민에 의해 탄생하게 됐다.

흉노와 중국 왕조의 전쟁

BC 221년 진시황의 중국통일 무렵 두만의 지휘 하에 부족을 통합한 흉노는 진을 위협하는 존재로 급부상 했다. 이에 놀란 진시황은 몽염에게 10만 군사를 주어 흉노에 뺏긴 땅을 되찾고 만리장성을 쌓았다. 흉노와 접한 진·조·연나라 등이 쌓았던 기존의 성곽을 기반으로 한 지구 최대의 건축물이라는 이 장성은 중국의 기마군단에 대한 공포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후 장성을 사이에 두고 북방민족과의 대결이 지속되는 것이 중국 역사다.

BC 202년 황제로 즉위한 한 고조 유방도 바로 이 흉노와 전쟁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진에 이어 중국통일을 이룬 유방은 북방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흉노를 정복하기 위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전쟁에 나섰다. 현재의 산서성 동쪽의 평성에서 공격에 나섰던 때는 겨울이라 몽골지역에는 매서운 추위와 눈이 엄습했다.

영특한 묵특은 패배를 가장해 한나라 군을 계속 유인했고, 한나라 보병 32만은 모두 추격에 가담했다. 이때 묵특의 정예부대 40만 기병이 백등산에서 유방을 포위했다. 보급과 구원병이 끊긴 절대 절명의 순간 유방은 몰래 묵특의 아내 연지에게 후한 선물을 보내 구명운동을 했다.

이에 연지가 묵특에게 “지금 한나라 땅을 얻는다 해도 선우께서 가서 살 수도 없는 것 아니냐”고 설득하여 흉노 군은 한쪽 포위망을 풀어 주었고, 유방은 장안으로 도망쳤다. 역사는 이를 '평성의 치'라 한다. 이후 흉노와 한 사이에는 ▶한 황실 여인을 선우의 연지로 바친다 ▶매년 한이 비단, 솜, 식량 등을 바친다. ▶형제의 맹약을 맺고 화친한다는 내용의 한나라로서는 굴욕적인 조약이 맺어졌다. 그만큼 흉노의 세력은 막강했다.

흉노와 한의 화친은 60여 년간 지속되었고, 흉노는 BC 176년 월지마저 정벌하고 북아시아를 완전 재패하였다. 이후 한나라 7대왕으로 등극한 무제(BC 140~ BC 87)는 굴욕적 화친에서 벗어나 흉노 정벌에 나섰다. BC 139년 장건을 서역에 파견해 월지와의 연대를 모색하는 한편 BC 133년에는 흉노와의 결혼동맹을 파기하면서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 무제는 흉노에게 병력은 물론 영토, 경제력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결정적인 정벌은 이루지 못했으나, 이후 흉노의 세력은 분열되고 약화됐다.

한 무제 사후 한과의 전쟁 중에 흉노는 질지가 이끄는 서흉노(BC 56), 호한야가 이끄는 동흉노(BC 58)로 분열됐다. 서흉노는 BC 36년 역사에서 사라졌고, 동흉노는 다시 내몽골 및 화북지역의 남흉노와 외몽골지역의 북흉노로 갈라졌다(AD 48). 그 후 남흉노는 중국에 동화하였고, 북흉노는 후한과 선비의 공격으로 AD 151년 멸망하면서 잔존세력은 서쪽으로 이동했다.

흉노를 보는 극과 극의 다양한 인식

중국은 사기·한서·전국책 등에 흉노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북쪽 오랑캐로 잔인하고 두렵고 대적하기 어려운 공포의 집단으로 보았다. 진시황, 한 무제 등 국력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도 흉노침공을 제대로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마군단의 전투력을 무서워했고, 대응전술을 찾지 못했다. 흉노가 타는 말들을 얻는 것이 꿈이었던 한 무제가 대군을 동원해 대원을 공격하고 한혈마(붉은 땀을 흘리는 말) 수십 필을 얻고는 크게 만족했을 정도다. 또 만리장성이라는 대역사를 통해 이들을 막아보려 했으나 바람 같은 기병의 진군을 약간 더디게 하는 효과밖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지금의 중국은 고대의 흉노·선비·여진·몽골·거란 등 북방민족도 중화민족의 일부라고 하면서 과거의 ‘한족 중심주의’를 포기하고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으로 바꿨다. 역사공정의 출발점이 바로 여기다.

터키는 초등과 중등 역사교과서에서 그들은 몽골고원에서 유래한 투르크족의 후예로, 투르크의 최초국가는 흉노이며 그 영역은 오늘날 만주, 몽골, 남시베리아, 북중국, 위구르, 티베트, 중앙아시아 지역에까지 이른다고 밝히고 있다. 또 동쪽의 흉노는 대흉노제국, 서쪽의 훈족국가는 유럽훈제국이라 하고 있는데, 중국의 주서(周書) ‘돌궐열전’은 “돌궐은 대개 흉노의 별종이다”라고 하여 흉노와 튀르크의 친연관계를 추정하고 있다.

몽골에서는 중등교과서에서 흉노·선비·유연뿐 만 아니라 투르크, 위구르, 키르키스, 거란까지도 몽골영토상의 고대국가로 규정하고 있다. 특히 흉노는 유목민이 몽골에 세운 최초의 국가로 정치규범, 경제생활, 문화면에서 기마유목국가의 전형이 되는 강력한 대제국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흉노는 중앙아시아, 서북인도, 동유럽까지 진출했는데, 이중 유럽에 세운 나라가 훈제국이라고 했다.

유럽에서는 흉노의 후예 훈족의 습격을 받아서인지 흉노를 극도의 공포와 증오의 대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역사가 A. 마르켈리누스가 “훈족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야만적이다…경장으로 말을 타고 민첩하게 산개하여 질주하면서 무시무시한 살육을 자행한다… 고정된 주거 없이 수레를 타고 피난민처럼 방랑한다…그들은 누구도 자신이 어떤 출생인지 모른다”고 할 정도다. 

유럽인들도 중국 한나라 사가들이 흉노에게 느꼈던 공포와 경외심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훈족의 예기치 않은 유럽 침공이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과 이에 따른 유럽사의 대변혁을 초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흉노와 한민족 역사와 연결 관계

우리의 국사교과서에는 흉노에 대한 서술이 없다. ‘한국사 신론(이기백)’에는 ‘이방족속 흉노’라는 표현이 단 한군데 있다. 그러나 단재 신채호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흉노, 선비, 몽골은 아(我)에서 분리…, 여진, 선비, 몽고, 흉노 등은 본래 아(我)의 동족이었다, 흉노는 조선의 속민이었다” “조선족이 분화하여 조선, 선비, 여진, 몽고, 퉁구스 등의 종족이 되고, 흉노족이 흩어져 돌궐, 헝가리, 터키, 핀란드 등의 종족이 되었다”라고 썼다. 

윤치도의 ‘족정사’는 “3대 가륵단군 시절에 요동태수 삭정을 징계하여 약수변에 유배하였는데 그들이 후에 흉노족이 되었다”고 했다. 위서 논쟁이 있지만, ‘단군세기’는 3세 가륵단군 시대에 지방장관 삭정을 유배에서 풀어 약수지방에 봉한 것이 흉노의 시조라고 했다. 

흉노와 한민족 사이에는 유적, 유물, 언어, 풍속 등에 있어 친연성을 추정할 단서가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첫째, 신라·가야지역에서 발굴된 고분들의 대표적인 형태는 적석목곽분으로 스키타이-흉노로 이어지는 북방민족의 무덤양식일 뿐아니라, 매장된 부장품 또한 이들의 친연성을 웅변하고 있다. 사적 제341호 김해 대성동 고분군은 4~5세기에 번성했던 금관가야가 소재했던 지역의 무덤으로, 3~6세기경의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이곳에서 북방민족과의 연관을 추측해 볼 수 있는 유물인 토기, 마구, 갑옷, 투구, 철제무기 등이 다수 등장해 세인을 놀라게했다. 

특히 청동 솥인 동복이 발견되었는데, 동복은 잘 알려진 대로 북방민족의 전형적인 유물이며 특히 흉노의 주요 거점에서 발굴되는 유물이다. 6세기 초 무덤인 경주 금령총에서 1924년에 발굴된 기마인물형 토기에서도 말 뒤에 동복을 얹고 있는 모습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한반도 남부에서 발견된 동복은 북방민족인 흉노가 한반도 남부, 가야, 신라지역으로 이주했다는 가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둘째, 고대 북방 유목민들에게는 금으로 치장하는 풍습이 널리 퍼져있었고, 이는 알타이를 고향으로 하는 북방민족의 상징이었다. 알타이지역은 지금도 중요한 금의 산지다. 신라는 금을 세공하여 금관과 다양한 장신구를 만들었으며 세계적으로 동물형 장식 등 고대 금 세공기술은 스키타이와 신라가 가장 뛰어났다. 고대 한국은 금관의 나라라고 할 만큼 우수한 기술로 금관을 제작했다. 고대에 금으로 왕관을 만든 것은 북방민족 밖에 없다. 

경주 황남대총에서 발굴된 신라금관은 영락없는 유목민 기마군단의 유산이다. 중앙에 우뚝 선 나무 형상, 양 옆의 사슴뿔 형상, 그리고 관 상단의 새의 형상, 수많은 곡옥 등 금관전체가 유목민의 엠블럼으로 그득하다. 얼마 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 되었던 아프가니스탄의 금관도 형상과 구조가 신라금관과 흡사하다. 

셋째, 가야·신라에서는 고구려·백제에는 없는 순장하는 풍속이 나타난다. 왕의 시종이나 동물 등을 함께 무덤에 묻는 순장은 흉노 등 북방민족의 전통이었다. 뿐만 아니라 흉노는 다른 민족에 흡수되어 사라졌으나, 우리의 씨름, 언어, 습속, 의복, 풍습 등에 흉노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한국어에는 북방알타이계 언어들과 연결된 다수의 일상어휘가 나타나며 삼국시대에도 왕을 뜻하는 간(干), 각간(角干) 등을 비롯한 관직명에서도 알타이계 명칭이 쓰였다.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혁거세’는 돌궐어로 통치자 즉 천자(天子)라는 뜻이라 한다.

넷째, 통일신라를 완성한 30대 문무왕의 묘비다. 682년 건립된 이 비석은 1796년경 경주에서 발견되어 청나라 유희해의 ‘해동금석원’에 탁본이 남아있고 서울대에도 탁본이 남아 있으나 비석자체는 한 때 사라져버렸다. 이후 1961년 경주 동부동 민가 근처에서 농부가 밭일을 하던 중 비석 하단부가 기적적으로 발견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비문에 의하면 신라 김씨 왕족은 투후의 후손이라 한다. 투후에 대해서는 기록이 상세히 남아있다. 사기에 의하면 지금의 중국 감숙성과 돈황 등 서역지역을 지배하던 흉노의 우현왕이었던 휴도왕이 암살된 후 태자인 김일제 등 일족은 한 무제에게 포로로 잡혀갔다. 김일제는 노예 신분으로 마부생활을 하다 한나라 황실에 대한 역모가 일어나자 한 무제를 구하고 반란을 진압하는데 결정적 공을 세운다. 이에 감읍한 무제는 투후라는 관작을 만들어 김일제에게 부여하고, 흉노인들이 금으로 사람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하는 풍습을 보고 김(金)씨 성을 하사 하였다.

이렇게 해서 김일제는 최초의 김씨가 된 인물이다. 이후 투후 김일제는 수만 명의 흉노인들을 이끌고 산동의 하해현 지역에 땅을 받아 ‘투국’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갔다. 그런데 왕망이 한나라를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김일제의 가문이 직접 연루되었고, 이후 왕망의 신(新)이 멸망하면서 이들은 후한의 압박을 피해 한반도로 이주하게 된 것으로 추정됐다. 

그런데 문무왕비는 신라 김씨 왕족은 바로 이 흉노인인 투후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비문에 명백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문무왕비에 나타나는 투후는 김일제가 바로 신라왕가 김 씨의 시조 김알지와 동일인물이라고 추정하는 근거다. 

흉노에는 선우가 직접 다스리는 중심부와 동·서부지역을 다스리는 좌현왕·우현왕 제도가 있었는데, 이는 고조선 등 한민족의 고대정권 구조와 유사하다. BC 174년 흉노의 영걸 묵특 선우는 돈황 넘어 서역을 정벌하고 실크로드를 장악한 후, 우현왕을 두어 다스리게 했다. BC 121년 흉노의 우현왕(휴도왕) 사후 태자 김씨 형제(김일제, 김륜)가 중국으로 들어와 한 왕실에서 활약했고, 전한 멸망 후 세운 것이 ‘신’나라다(왕망:원래 김망이라한다.).

이들 후예가 김해와 경주 일대에 들어와 신라·가야를 형성했다. 따라서 한국과 중국의 모든 김씨는 흉노인이며 김해 가야는 흉노인 김씨의 나라였다. 또한 신라로 진출한 것은 김씨 왕국을 확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서동인, 흉노인 김씨의 나라‘가야’)

이외에도 고대부터의 연결고리도 눈길을 끈다. 남부시베리아의 스키타이 지역, 중앙아시아, 몽골고원 그리고 한반도로 이어지는 곳곳에서 발견되는 바위에 새겨진 암각화에서도 북방민족의 삶의 흐름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북방민족 흉노와 한민족 사이에는 끊을 수 없는 연결고리가 많이 있는 것이다.

흉노 스스로의 문자 기록은 없으나 수많은 고고학 유물과 유적이 남아있고 또 발굴됨에 따라 흉노가 세계사에 미친 영향은 점차 더 많이 밝혀질 것이다. 이와 함께 유목민에 대한 기록도 튀르크, 위구르, 몽골, 만주, 티베트어 등으로 다수 발견되고 있어 앞으로 한민족을 포함한 기마민족의 활약상과 친연관계가 더욱 더 밝혀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 민족 형성에 흉노, 선비 등 북방계 민족의 비중이 크다는 논의도 검증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김석동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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