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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벌었다고 내 돈은 아니다”
“내가 벌었다고 내 돈은 아니다”
  • 박흥순 기자
  • 승인 2016.03.30 13: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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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타타그룹 창업자, 잠셋지 타타

“두 말할 필요 없이 도시의 성장은 국민의 삶과 국가의 번영에 훨씬 많은 향상을 가지고 와야 한다.” 타타그룹은 성공, 성장, 수익을 추구하는 다른 기업과 달리 조국애에 근간을 두고 발전한 기업이다. 창업자 잠셋지 타타(1839~1904)는 카네기, JP모건, 존 록펠러와 같은 시기에 활동한 기업인이다. 인도의 영웅을 논할 때도 독립영웅 마하트마 간디, 자와할랄 네루, 라빈트라나트 타고르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잠셋지 타타의 업적은 그들에 비해 결코 손색이 없다.

타타그룹은 덩치와 비중으로 볼 때 인도 내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자동차, 철강, 화학, 소비재, IT, 중공업 등 7개 분야에서 98개 기업군을 거느리고 그룹의 총 가치는 850억 달러(약 103조 원), 고용인원 29만여 명, 인도 국내총생산의 3%를 차지하니 명

▲ 50세의 잠셋지 타타

실상부 인도의 간판기업이라 할 수 있다. 타타그룹은 규모와 외형뿐만 아니라 ‘문어발식 지배구조’로 볼 때 사회의 지탄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사후 1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통찰력과 비전, 국민들에 대한 애정으로 사랑받는 창업자 잠셋지 타타의 존재가 그 원인일 것이다.

잠셋지 타타는 1839년 인도 서부 구자라트 나브사리의 파르시(Parsee : 배화교도) 사제가문에서 태어났다. 파르시족은 본래 이란에서 살았으나 종교 박해를 이유로 인도 서해안에 자리 잡은 사람들이다. 토착 인도인들의 눈으로 보면 파르시인들은 외부인에 이교도다. 그럼에도 타타는 이국땅인 인도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 셈이다.
종교적 색채가 짙은 가문에서 태어나 비즈니스와 거리가 멀었던 잠셋지 타타는 그의 아버지가 집안내력을 깨고 사업을 시작하면서 기업세계에 발을 내딛었다. 작은 무역회사에서 시장과 상품 교역 등 비즈니스를 배운 타타는 29살이 되던 해 자신의 회사를 설립한다. 젊은 잠셋지 타타는 유럽, 중국, 일본 등에서 물건을 구입해 인도에 판매하는 무역회사를 경영하면서 해외의 발전된 문물과 산업을 자주 접했다. 그 중 타타의 눈길을 가장 끈 것은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영국의 섬유산업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섬유산업을 인도에서 개발해 보겠다고 생각하고 1869년 이를 실행에 옮겼다.

친족 배제, 이사회 중심 경영 고수

잘 나가던 무역회사를 접고 자신의 판단에 의해 방직업에 뛰어든 잠셋지 타타의 행보는 당시로서는 파격에 가까웠다. 19세기 말 인도의 비즈니스는 고리대금업 같은 금융업이나 상품교역이 주를 이뤘다. 생산 제조업에 투신하는 기업인은 극히 희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익숙한 무역업을 포기하고 불확실한 시장에 뛰어든 것이다.
혁신으로 대변되는 잠셋지 타타의 기업가 정신은 방직공장을 외진 곳에 세우면서 빛을 발한다. 당시 인도 서부에서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인도 최대 상업도시인 뭄바이에 공장을 세우는 것이 기본 상식이었다. 하지만 타타는 나그푸르라는 작은 도시에 공장을 세웠다. 그는 “첫째 방직공장은 면화 생산지와 가까워야 하고, 둘째 수송을 위해 철도에 공장이 인접해야 하며, 셋째 물이 풍부해야 한다”는 세 가지 이유를 들며 자신의 의지대로 나그푸르에 엠프레스 방직공장을 설립했다.

▲ 엠프레스 방직공장의 의료소

그가 판단할 때 나그푸르는 최적의 장소였다. 굳이 땅값이 비싼 뭄바이를 고집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의 이런 결정을 두고 크게 우려했다. 자금을 융통해 준 금융회사는 “나그푸르에 공장을 세운 것은 황무지를 파고 그 속에 황금을 묻어 버리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비판에도 타타는 흔들리지 않았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사고를 통해 보란 듯이 방직업에서 성공한다. 
방직회사를 세우면서 잠셋지 타타는 기업 경영에 대한 개념조차 없던 인도에 현대적인 경영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는 친족과 같은 외부세력이 경영권을 좌우하던 관례를 버리고 CEO와 이사회에 힘이 집중되도록 했다. 경영진이 이사회에 실적을 보고하도록 하고 CEO인 자신도 경영 실적에 따라 월급을 받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많은 인도기업들이 요즘도 친족 위주의 전근대적 경영방식을 유지하고 있는데 반해 백년이상을 앞선 혁신적인 경영방식이었다.

눈 앞의 이익만 좇지 않은 애국자

인도 제일의 섬유사업자로 발돋움한 잠셋지 타타는 안주하지 않았다. 산업혁명이 일어난 적이 없어 기반이 매우 취약한 인도의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철강 산업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방직업에 뛰어들 때와 마찬가지로 코웃음 쳤다. 어떤 이는 수지맞는 섬유산업에서 돈이나 벌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철강이 중공업의 모태가 되고 이것이 경제발전의 토대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미국여행 중이었다. 1870년대 말 미국 맨체스터를 방문한 그는 그곳에서 당대 최고의 학자 토마스 칼라일의 강연을 듣게 된다. 칼라일은 “앞으로 철강을 좌우하는 나라가 세계를 좌우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 말에 감명 받은 타타는 1800년대 말부터 철강회사 설립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 
그러나 해결해야할 외부요인이 산적해 있었다. 당시 인도를 지배하던 영국이 가장 큰 문제였다. 영국 식민지 정부는 타타가 철강회사를 설립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속 발목을 잡았다. 식민지 기업인이 철강과 같은 국가 기반 사업에 뛰어든다는 것이 지배자 입장에서 곱게 보였을리 만무하다. 또, 전례없던 사업이기 때문에 타타는 기술력, 자본력, 국제 법률에서 문제에 부딪쳤을 뿐 아니라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특히 전문가들은 그가 철강회사를 만든다고 했을 때 수익성이 전혀 없다며 반대했다. 
당시 인도 철도의 최고 권위자였던 프레데릭 업코트 경은 “만약 잠셋지 타타가 철강회사 설립에 성공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호언하며 반대했다. 그럼에도 타타는 철강회사를 설립하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철강 산업 육성은 인도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업이라고 확신했다. 
1900년 영국정부가 그의 끈질긴 노력에 못 이겨 철강회사를 설립해도 좋다는 허가를 내린다. 가장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타타는 철강회사 설립위원회를 세우고 미국과 영국 등 철강산업이 발달한 선진국을 찾아다니며 철강회사 설립이라는 꿈을 완성시켜 나갔다. 하지만 1904년 독일 방문 중 오랜 지병으로 인해 숨을 거둔다. 그의 두 아들은 타타가 다져놓은 토대를 바탕으로 3년 후인 1907년 벵골에 타타스틸 설립을 완성한다. 수익성이 없고 비현실적이라던 우려를 극복한 타타스틸은 성장을 거듭했고 인도 철강 산업의 중추로 자리매김한다. 

▲ 타타스틸 최초의 고로

눈앞의 이익만을 좇지 않았던 기업가 잠셋지 타타의 헌신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비단 타타스틸에만 그치지 않는다. 뭄바이 전력수요가 크게 부족한 것을 알게 된 후 수력발전회사를 설립해 뭄바이의 홍수도 막고 전력을 생산했으며, 인도사람들이 자국에 있는 호텔을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후 타지마할 호텔을 세워 세계 최고의 호텔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정치인에게 돈이나 편의를 제공하지 말라”

잠셋지 타타는 과학과 기술 인력의 중요성을 일찍 깨달은 사람이다. 뛰어난 인력이 국가와 산업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다. 근래 들어 정립된 인적자원이라는 개념이 정립되기 100여년 전 부터 그는 인재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다.
최고의 과학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고자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재산 중 3분의 1을 헌납했는데, 이로 인해 인도의 싱크탱크 ‘인도과학대학원(IISc: Indian Institute of Science)’이 설립됐다. 그의 측근들은 IISc에 타타의 흔적을 남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타타는 “IISc는 내가 인도에 기부하는 것”이라며 거절했다.(그러나 훗날 동상이 세워졌다.)
인도 사회 전반에서 활약하고 있는 ‘타타장학생’을 설립한 이도 잠셋지 타타다. 그는 1892년 ‘JN타타재단’을 설립해 인종이나 카스트, 신념 등에 관계없이 장학금을 지원해 주었다. 이것이 타타장학생의 시작이었다. 카스트제도나 종교적 차별이 엄격한 사회에서 이는 매우 혁신적인 장학금 제도였다. 

▲ 인도과학대학원(Indian Institute of Science. IISc)

또, 타타는 직원들의 복지가 보장돼야 생산성이 증가할 수 있다는 생각에 복리후생을 적극적으로 실천했다. 나그푸르 엠프레스 방직공장에 환풍기와 습도조절기, 의료소 등 복지시설을 인도 최초로 설치했다. 당시 ‘노동자는 수탈의 대상’으로 여기던 풍토에서 타타의 이런 생각과 조치는 급진적이고 혁명적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영국에서도 하루 12시간 노동제가 1911년에야 처음으로 도입됐다는 점을 고려할 때 타타의 복지후생제도가 얼마나 앞선 생각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지난 1970년대 우리의 청계천 피복공장과 비교해 봐도 그의 선구자적 기업가정신은 칭송받아 마땅하다.
후진국이 대개 그렇듯 인도도 정경유착이 매우 심하다고 알려져 있다. 정치인과 기업인은 상호 끈끈한 부패의 고리로 연결돼 있어 정치·경제·사회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하지만 인도의 정치인들은 적어도 타타그룹에는 손을 벌리지 못한다. 타타그룹의 윤리강령에는 정치인에게 돈이나 편의 제공을 금지하는 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타타그룹과 함께 인도를 대표하는 기업인 릴라이언스그룹과 대비되는 이런 정신은 창업주 잠셋지 타타로 부터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성공하려면 우선 정직하고 솔직한 비즈니스 원칙을 지녀라. 아무리 사소한 일이어도 함부로 생각하지 말고 주의 깊고 세밀하게 처리하라. 우호적 환경과 기회를 자신의 것으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라. 성공은 기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잠셋지 타타)

▲ 청년기의 잠셋지 타타

 

 잠셋지 타타의 성공 포인트

- 앞을 내다보는 혜안과 뛰어난 실행력 -

타타는 섬유산업이 발전할 것임을 예견하고 철강산업이 미래 산업이 될 것임을 내다봤다. 인재가 중요하고 이를 위해 인재교육기관을 설립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이는 보통 사람들도 예측해 볼 수 있는 사안이다. 그러나 잠셋지 타타가 다른 점은 실제로 자기 사업에 적용했다는 점이다. 실행의 차이는 사소해 보이지만 이것이 성공하는 사람과 보통 사람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 높은 위험을 피하지 않았다 -

그의 인생은 모험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업가의 삶을 살기로 한 것부터 잘 나가던 무역사업을 접고 섬유사업을 시작한 것, 나그푸르 지역에 섬유공장을 설치하고, 수력발전회사와 타지마할 호텔을 세운 것 등 거의 모든 일이 위험을 무릅쓰고 단행된 일이었다. 도전하지 않는 곳에는 성과도 없다는 말이 있다. 위험을 감수하고 도전하는 가운데 성공의 기회가 열리는 법이다. 잠셋지 타타의 삶을 돌아보면 기업가에게 도전하는 정신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할 수 있다.

- 고정관념에 대한 무한 도전 -

그의 인생은 기업가정신이 끝없이 살아 숨쉬는 삶이었다. 동시에 편견과 고정관념에 대한 대결이었다. 그가 추진하고 이룩한 성취들은 고정관념의 파괴에서 이어졌다. 남들이 기존의 생각과 고정관념 때문에 주저하는 분야에 과감히 진출함으로써 기회를 잡았다. 블루오션을 창출한 것이다. 기존의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신선한 사고, 창의적인 사고가 식민지의 우울한 외부환경을 이겨내고 그를 성공으로 이끌었다.

 

인사이트코리아, INSIGHT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