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와 김정은 無知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트럼프와 김정은 無知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 이영환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 승인 2017.09.07 11:3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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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적 폭력과 파괴적 광기…독서로 ‘참지식’ 키워야
▲미국의 도날드 트럼프 대통령.<뉴시스>

최근 국내외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접하면서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인간에게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행동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인간 이성이 절정에 이른 21세기에 여전히 원시적인 폭력과 파괴적 광기가 도처에서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는 현상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은 권력을 장악한 소수 특권계층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권력을 장악하지 못해 몸을 낮추고 있는 다수에게도 똑같은 성향이 잠복돼 있기에 여건만 갖춰진다면 그들 또한 똑같은 광기를 드러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럼에도 인간이 여전히 ‘지구의 정복자’로 군림하고 있는 이유는 인류 역사에 등장했던 위대한 정신적 스승들과 오직 진리를 추구했던 탁월한 학자들 덕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들이 제시한 메시지와 참지식이 인간의 본성에 내재되어 있는 폭력적 성향을 상쇄해 주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정신과 의사이자 영성 지도자로 널리 알려진 데이비드 호킨스(David Hawkins)도 <의식혁명>이라는 책에서 이와 유사한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렇지만 이 짧은 글에서 인간 본성에 대해 상세하게 논의할 의도는 없다. 단, 인간이 저지르는 여러 악행은 대부분 인간의 어리석음, 즉 치(癡)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여기서 ‘치’는 곧 무지(無知)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무지는 단순히 실용적인 지식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참지식이 부족하다는 의미다. 그리고 참지식이란 인간이라면 반드시 궁구(窮究)해야 하는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을 구하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지식을 말한다. 이른바 빅퀘스천(Big Question)을 통해 얻는 지식을 의미한다. 이 점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격물치지(格物致知)일 것이다.

“지식의 섬 커지면 무지의 해변도 함께 커진다”

인간은 무지하기 때문에 자신을 되돌아보기 보다는 남을 원망하거나 시기하는데 에너지를 소진한다. 인간은 무지하기 때문에 자신의 몸이 곧 자기라는 착각 속에서 물질적 쾌락만이 궁극적인 가치를 갖는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은 권력욕과 재물욕으로 상징되는 탐욕의 늪에서 헤어나기 어렵다. 철학자 앨런 와츠(Alan Watts)가 적절하게 지적했듯 대부분의 인간은 “살가죽에 쌓인 에고(skin-encapsulated ego)”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다. 이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런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는 원인은 무엇보다도 무지에서 찾을 수 있다.

사람들이 무지한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경각심을 일깨우는 데 일생을 바친 대표적인 사람이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다. 그는 오늘날 ‘소크라테스식 문답법(The Socratic Method)’으로 알려진 변증법적인 질의-응답을 통해 스스로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을 깨우치도록 했다. 그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앎, 즉 지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선입관을 해체하고 그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

당시 아테네에서 누구든 소크라테스에게 걸리면 결국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진정 아는 사람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동양에서는 공자가 <논어> 위정편에서 자로에게 이르기를 “아는 것은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다(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고 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진리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아마도 공자가 이 말을 한 이유는 이 정도의 확신에 도달한 후에야 비로소 안다고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려 했던 것은 아닌지 추측해 본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조금이라도 이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만이 인간이 최선의 삶을 사는 방법이라고 본 것이다.

필자에게는 무지와 관련해 물리학자 존 휠러(John A. Wheeler, 1911~2008)가 한 말이 특히 가슴에 와 닿는다. 20세기 위대한 두 명의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닐스 보어와 공동 연구를 수행했던 물리학자이며 우리에게도 익숙한 블랙홀, 웜홀 그리고 양자거품과 같은 용어를 처음 만든 휠러는 <사이언티픽 어메리칸(Scientific American)>이란 대중과학 잡지에 인간의 무지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우리는 무지의 바다에 둘러싸인 섬에 살고 있다. 우리 지식의 섬이 커지면, 무지의 해변 또한 함께 커진다.”

오만과 착각, 욕심

우리는 남들보다 앞서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면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게 된 것처럼 오만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 자신은 다 알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의 견해는 무시해도 좋다는 식으로 행동한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우리가 조금 지식을 얻게 되면 이에 비해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이 늘어난다. 이것이 바로 휠러가 말한 무지의 해변에 해당한다. 즉 해변의 둘레가 점점 길어진다는 것은 곧 모르는 것이 점점 더 많아진다는 의미다. 따라서 우리는 결코 무지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항상 겸손하지 않을 수 없다. 2500년 전 소크라테스의 메시지와 휠러의 메시지는 본질적으로 같다.

무지한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가로막은 가장 큰 장애요인 또한 권력욕이라 할 수 있다. 무지와 권력욕은 서로 원인이자 동시에 결과다. 이 점은 정치권력이든 경제권력이든 마찬가지다. 크고 작은 권력의 달콤함에 취한 인간은 자신의 무지를 망각할 정도로 오만해진다.

완장을 차는 순간 다른 인간으로 돌변하는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자신 안에 잠재되어 있던 또 다른 자신이 드러나는 것일 뿐이다. 이른바 지킬 박사와 하이드 가운데 하이드가 발현하는 것이며 누구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 결과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고 착각해 모든 것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는 오만에 빠지게 된다. 게다가 주변에서 떡고물을 얻어먹으려는 인사들의 아부(阿附)로 인해 권력자는 이런 착각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그런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현재 미국의 도날드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 또한 대동소이하다. 기후변화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화석 에너지에 집착하는 트럼프 대통령이나 핵개발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려는 김정은의 무지는 막상막하다. 이들이 조금만 더 자기성찰의 노력을 기울인다면 결국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게 될 것이고 그래야 비로소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정녕 연목구어(緣木求魚)일 뿐인가?

그렇다면 인간이 무지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유일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필자는 창조적인 독서(creative reading)가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독서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축적한 지식과 생각을 이해하려는 정신 활동이다. 우리 모두 시공간의 제약 속에서 살고 있기에 모든 것을 직접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간접 경험이라도 제대로 하려면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책을 통해 전하는 메시지를 이해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이런 책으로는 무엇보다도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들이 있다. 최근의 책 가운데는 객관적인 논리에 바탕을 두었으며 기존 사고방식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는 책들이 중요하다.

이것은 반드시 주류(main stream)에 속하는 사람들의 책을 읽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쓴 책이라도 깊이 생각할 기회와 동기를 제공하는 책이라면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예컨대 영국의 생물학자 루퍼트 셸드레이크(Rupert Sheldrake)가 쓴 <Science Set Free>와 같은 책은 주류 과학계의 이론에서 발견한 10개의 도그마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공개 토론을 제안한 책이다.

이 책은 최근 <과학의 망상>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필자는 이런 책들을 읽음으로써 이미 확립된 지식이라도 틀릴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질 필요가 있으며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의 사고 폭을 넓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훈련을 반복함으로써 창조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된다고 믿는다.

“인간은 배우기 위해 이곳에 왔다”

▲ 북한의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뉴시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독서를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하철에서 보면 다른 나라와는 달리 독서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경향은 스마트폰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다.

독서를 기피하는 이유는 돈을 벌거나 출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문화체육관광부가 밝힌 독서에 관한 공식 통계에 의하면 이런 생각이 틀린 것 같다. 과연 그러한가? 문화관광부가 2014년 10월부터 1년 동안 전국 19세 이상 남녀 5000명과 초·중·고교생 3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공개한 <2015년 국민 독서 실태 조사>에 의하면 일반도서를 기준으로 한 성인의 연평균 독서율은 2013년보다 6.1%포인트 하락한 65.3%로 집계됐다. 독서율이란 1년에 1권 이상 책을 읽은 사람들의 비율을 말한다.

또한 성인의 연평균 독서량은 9.1권으로 2013년에 비해 0.1권 줄었다고 한다. 비록 몇 해 전보다 줄긴 했어도 필자가 생각했던 것보다 높은 수치다. 이 조사를 통해 드러난 독서와 관련된 다양한 통계자료의 핵심 내용은 한국인의 독서율은 OECD국가나 유럽연합에 포함된 국가들과 비교할 때 평균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 오히려 우리보다 독서율이 낮다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조사 내용과 관련해 상세하게 논의할 수는 없지만 OECD 국가들의 평균 수준에 해당한다는 통계자료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점은 지적하고 싶다. 또한 일본은 독서 강국으로 알고 있었는데 조사 결과는 그 반대라고 말한다. 통계자료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간다.

이것은 특히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인의 성향으로 보아 독서량과 관련된 부분에서 사실보다 과장해 보고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나아가 독서의 질적 측면을 거의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조사가 갖는 의미가 상당히 반감된다. 앞으로 정기적으로 이런 조사를 한다면 독서의 질적 측면에서 어떤 변화가 있는지 추정할 수 있는 항목을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독서는 양보다는 질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100권의 엉성한 책을 읽는 것보다는 한 권의 좋은 책을 읽는 것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훨씬 바람직하다. 그래야만 의식의 전환이 가능하고 이를 바탕으로 진정한 사회발전을 이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우리 사회 어느 부분을 봐도 의식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징후를 발견하기 어렵다. 이것은 창조적인 독서가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는 명백한 증거다. 이런 상황에서 독서율 운운하는 것은 그야말로 가소로울 뿐이다. 독서는 양이 아니라 질이 중요하다.

그러면 독서의 질적 측면에 관해서는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바로 여기에 포인트가 있다. 창조적 독서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질적으로 높은 수준의 독서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독서는 단순히 많이 읽었다고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단편적인 지식을 얻기 위한 수단도 아니다. 독서는 우리가 지구상에 하나의 생명으로 등장해 육신을 가진 삶을 마감할 때까지 궁구해야 하는 대명제(Big question)에 대한 답을 구하는 여정(旅程)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보다 앞서 살았던 많은 현자들은 공통적으로 인간은 배우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말한다. 무엇을 배워야 하며 이것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창조적인 독서를 통해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어수선한 시국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뜬금없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어수선해도 자신의 존재 이유와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에는 한 치의 쉼도 없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글은 인터넷 <논객닷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 이영환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지식협동조합 경계너머 아하! 이사
 미시경제학 등 다수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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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lsfl 2017-09-08 16:01:28
기존의 과학과 종교 이론을 180도 뒤집는 혁명적인 이론으로 우주와 생명을 새롭게 설명하는 책(제목; 과학의 재발견)이 나왔는데 과학자와 종교학자들이 반론을 못한다. 그리고 이 책이 창조의 불가능성을 양자와 시간 이론으로 입증했기 때문에 소셜댓글 ‘라이브리’는 이 책에 대한 글이 올라오면 모두 삭제한다. 이 책은 서양과학으로 동양철학을 증명하고 동양철학으로 서양과학을 완성한 통일장이론서다. 이 책을 보면 독자의 관점, 지식, 가치관이 변한다.

내세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현세의 부귀영화는 중요한 의미가 없다. 성직자들을 포함해서 많은 구도자들이 경전이나 명상에만 의존해서 우주와 생명의 본질을 탐구했기 때문에 올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그들의 탐구는 결국 우물 안의 개구리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들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와 종교학자도 유능한 학자로 출세하기 위해서 무비판적이며 맹목적으로 기존학문을 배우고 익히는 데만 치중하므로 학문의 오류를 탐지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