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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2024-04-26 09:29 (금) 기사제보 구독신청
떨어진 재계의 ‘별’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
떨어진 재계의 ‘별’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
  • 박흥순 기자
  • 승인 2015.01.07 10: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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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섬유산업 개척자, 경제발전 이끈 1세대 기업인

“코오롱이여~ 영원하라!”

우정(牛汀) 이동찬(李東燦)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이 지난달 8일 오후 4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 이 명예회장은 1957년 4월 12일 부친과 함께 ‘한국나이롱주식회사’를 창립하고 국내 최초로 나일론사를 생산해 한국 섬유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설립 20주년이 되던 1977년에 코오롱그룹 회장으로 취임해 화학 건설 제약 전자 정보통신 등 다양한 사업을 펼치며 국가경제 발전을 이끌었다. 이 명예회장은 1982년부터 1996년 1월까지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올바른 노사관계 정립과 기업윤리의 확립에 앞장섰으며 1983년부터 3년간 한국섬유산업연합회 회장을 역임하며 섬유인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섬유백서’를 발간하는 등 섬유산업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 2002월드컵 조직위원회 위원장시절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그는 대한농구협회 회장과 대한골프협회 회장, 2002 한일월드컵대회조직위원회 초대 위원장도 역임하며 아마추어 스포츠 발전과 국가 이미지 제고에 이바지했다. 특히 코오롱구간마라톤대회, 코오롱마라톤팀 등을 창설해 대한민국 마라톤의 전성기를 이끌어 손기정 선수 이후 56년 만에 올림픽에서 우리나라가 마라톤 금메달을 따내는 쾌거에 기여했다.

“기업은 국가경제의 주요한 주체이며 사회발전의 원천이고, 직장인의 생활터전입니다. 따라서 후손에게 풍요로운 정신적 물질적 유산을 남겨 놓아야 한다는 것은 기업가의 사명입니다.”
기업의 정체성에 대한 정의, 사람의 소중함과 그에 대한 책임을 담은 이 명료한 어록은 향년 92세로 타계한 고 이동찬 명예회장이 1987년 중앙대학교 정경대학에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했던 내용의 일부다. 짧은 내용이지만 그의 행동하는 삶과 노력이 오롯이 드러나 있다.
산업화와 근대화의 격변의 시기를 거치며, 우리나라 화섬 산업의 최선두에서 국민 의(衣)생활의 혁명을 일으키며 국가 경제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해 온 코오롱. 그 뿌리에는 부국을 위해 청춘을 쏟아 부은 그의 삶이 있었다. ‘이상은 높게’ 설정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등산식 경영과 ‘눈은 아래를’ 바라보며 임직원을 비롯한 사회의 문제들을 따듯한 보살핌으로 살피는 공동체적 책임경영이 그의 경영철학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상은 높게…눈은 아래로’

이동찬 명예회장은 1922년 4월 1일 경북 영일군에서 이원만 코오롱 창업주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호방한 성격의 창업주 이원만 선대회장(전 기업인, 전 국회의원)이 일본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기에, 이동찬 명예회장은 고향에서 넉넉지 않은 유년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런 가운데도 소학교를 수석 졸업한 이 명예회장은 어린 나이에 포항에 있는 일본인 상점의 점원으로서 사회에 첫 출발을 내딛게 되며, 얼마 지나지 않아 도일(渡日) 하라는 부친의 편지를 받고 일본으로 떠나 당시 부친이 설립한 ‘아사히공예사’에서 열다섯 살의 나이로 경리를 맡아 아버지를 돕기 시작했다. 
낮에는 일터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흥국상업학교’ 야간부에 들어가 주경야독의 생활을 했다. 그 후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어느덧 청년이 되었지만 학구열은 사그라지지 않았고, 와세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강의하던 조선인 교수의 권유로 시험을 준비해 이후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에 당당히 합격해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입학한 후에도 평소의 취미와 소질을 살려 정구, 축구, 기마 등의 스포츠는 물론 영어회화부, 변론부 그리고 정치학회인 동아협회 같은 학내 동아리에 적극 참여하며 대학시절을 보냈다. 
1944년 1월 13일 이 명예회장은 그의 나이 스물 세 살일 때 입영 1주일을 앞두고 신덕진 여사를 아내로 맞았다. 결혼한 지 1주일째인 1월 20일, 쯔루가(敦賀)의 중부 36연대에 조선학도특별지원병으로 입대해 식민지 청년으로서 감내해야 했던 울분과 고난을 겪으며 조국해방과 부국의 꿈을 키우던 중 조국은 해방을 맞았다.  
광복 후 귀국한 청년 이동찬은 한국전쟁의 여파로 국민의 기초생활마저 위협받던 그 때, 헐벗은 국민에게 따뜻한 옷을 입게 하여 사회봉사와 애국을 실천하겠다는 신념 아래 경북기업이라는 직물공장을 설립하며 이 땅에 섬유산업의 횃불을 처음 들어올렸다. 이동찬 명예회장은 더 큰 사업에 뜻을 품고 경북기업을 정리한 후 상경하여 단칸 사무실에 삼경물산 서울사무소와 후일 코오롱상사㈜의 모태가 되는 개명상사를 1954년에 설립해 한국과 일본의 무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나일론의 개화기를 앞당겨 나갔다.

“안정 바탕 속 발전, 그리고 사회적 책임 다하겠다”

그 후 1957년 4월 12일, 부친 이원만 선대회장과 함께 ‘한국나이롱주식회사’를 창립하고 우리나라 최초로 나일론사를 생산하며 한국 섬유산업의 기수로 등장해 한국 섬유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당시는 나일론사가 큰 인기를 얻으면서 품귀현상까지 빚었던 시기로 한국나이롱은 1963년 국내 최초로 일산 2.5톤 규모의 나일론사 준공을 시작으로 1967년 공장을 증설, 10톤 공장으로 도약하게 되었다. 한국의 섬유산업을 개척하며 증흥의 밑거름을 마련한 것이다. 나일론사의 수요확대에 따라 1968년 판매전담회사로 코오롱상사를 창립, 이동찬 사장이 초대 사장에 취임했다. 당시 사장 취임사를 통해 밝힌 이 명예회장의 경영지침은 향후 코오롱그룹의 반세기 역사 속에 뿌리 깊게 전해져 오고 있다. 
당시 이동찬 사장은 기업의 건강한 이윤추구를 통해 소비자를 보호하고 국가발전에 기여하는 등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는 약속’과 내적인 충실도를 높여 확고한 기반 위에서 회사를 육성, 발전시켜나가겠다는 ‘안정을 바탕으로 한 발전’을 선언했다. 
이어 폴리에스터사의 제조에도 착수해 1968년 한국폴리에스텔 등을 설립하게 되었고, 1970년 한국나이롱 사장에 취임하면서 원숙한 경영인으로서의 길을 걷는다. 1960년대와 1970년대는 국내 나일론섬유업계의 호황기인 동시에 화섬업계가 크게 도약한 시기였다. 설립 20주년이 되던 1977년 코오롱그룹은 그룹의 종합적인 발전과 경영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그룹 회장제를 신설하고 이동찬 대표이사 사장을 코오롱그룹의 회장으로 추대했다. 코오롱그룹의 최고경영자가 되기까지에는 열다섯 살의 나이로 부친인 이원만 선대회장을 도왔던 때로부터 기산하면 실로 40년 만의 일이자, 경북기업의 설립으로 본격적인 사업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 때로부터 셈하더라도 30년이란 오랜 세월이 걸린 셈이었다. 
이 명예회장은 취임 후 신년사를 통해 경영다각화의 성공적인 출발을 기뻐하며 기업의 생명과 같은 경쟁력의 제고를 강조했다. 그리고 회장 취임해인 1977년, 한국나이롱과 한국포리에스텔을 주식회사 코오롱으로 상호 변경하였으며 급변하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해 제조업에 첨단 경영을 도입함으로써 새로운 도약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특히, 1970년대 나일론사 공급이 수요를 앞지르게 되자 한국나이롱은 사업다양화와 제품다양화를 모색하며 타이어코드 등 신제품 개발에 주력했다. 격동의 1980년대에 들어서는 ‘변신’이라는 모토 아래 기존의 섬유산업은 양적, 질적 성장을 함께 도모하면서 필름, 비디오테이프, 메디컬 등 관련 사업 분야로 사업영역을 확대해 사업다각화에 성공하며 오늘날 코오롱그룹을 국내 유수의 그룹으로 성장시켰다. 
또한, 1983년에는 한국섬유산업연합회 회장에 취임, 섬유인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섬유백서’를 발간하는 등 한국 섬유산업의 선진화에 힘썼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21세기형 산업의 총아로 떠오른 정보통신산업으로의 진출을 적극 추진, 그룹 내에 정보통신회사를 설립해 집중 육성했다. 또 다른 신성장 산업의 하나인 유통업에도 적극 진출함으로써 코오롱그룹을 21세기 신경제의 주체로서 자리 잡을 수 있는 확고한 교두보를 마련해 놓았다. 이원만 선대회장의 뒤를 이어 제2대 그룹회장에 오른 이 명예회장은 재임기간 동안 그룹 총수로서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코오롱을 명실상부한 그룹으로 성장시켰다.

“기업은 내 것이 아니라 국민 모두의 것”

‘산업인의 사명에 투철하고 능률과 창의로써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는 보람찬 일터를 만들며 인간 생활의 풍요와 인류 문명의 발전에 이바지한다’ 
이 명예회장의 경영이념은 한국 경제의 성장과 그 맥락을 함께 해온 지난 반세기 코오롱의 역사 속에 묻어있다.  광복 후 일본에서 귀국한 청년 이동찬은 경제인으로서의 입신을 모색하게 되는데, 이는 반드시 몸을 바쳐 애국하는 것만이 최선이 아니라, 피폐한 조국의 경제를 일으켜 세우고 헐벗은 국민에게 따뜻한 옷을 입게 해주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큰 애국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이 명예회장의 경영이념에도 반영되어, 고도 산업사회를 건설하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 빈곤으로부터 해방되어 얻어 낸 자랑스러운 유산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것이 모든 산업인의 고귀한 사명이자, 역사적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기업은 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 임직원 모두의 사회생활의 터전이며 원천인 사회의 기업(企業)으로서 기업의 부실은 사회에 대한 배신이며 배임이라고 봤다. 이동찬 명예회장의 이 사회적, 공동체적 책임의식에 입각한 기업 경영이념으로 코오롱은 국가 경제 성장을 선도하며 그 맥을 같이 할 수 있었고, 60년의 역사를 간직한 기업으로 현재도 인류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기업으로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 78년 코오롱 울산공장 준공식(가운데 故 이동찬 명예회장)

‘이상은 높게 눈은 아래로’. 이동찬 명예회장의 경영철학이자 등산을 통해 터득한 이 교훈은 정상에 대한 목표를 세우고 겸허한 마음으로 한발 한발 오르다 보면 어느덧 정상에 서게 되고, 호연지기를 만끽하게 된다는 이 명예회장의 경험에서 배어 나온 것이다. 무리하게 스피드를 내거나 성급한 경영을 지양하고 그룹 전체가 서서히 산을 오르고 있다는 등산할 때의 마음가짐으로 그룹을 이끌어 왔다. 특히 무리를 지어 등산을 할 때 뒤에서 따라 갈 때는 힘들고 짜증스럽지만 앞장서서 산을 오를 때는 뒷사람을 인도한다는 사명감과 보람으로 고된 줄 모른다는 교훈을 기업경영과 결부시켜 회사 임직원들에게 자주 들려주었다. 이 명예회장에게 등산은 인생의 지혜와 슬기를 터득케 했던 스승이며, 동시에 그 스스로 임직원이 직접 산을 오르며 교훈을 얻어가길 바라는 등산 예찬론자이기도 하다.

▲ 2001년 통의동 화실에서의 故 이 명예회장

청렴결백한 기업인으로서 “기업은 내 것이 아니라 국민 모두의 것”이라는 소신으로 산을 오르듯, 마라톤을 하듯 같은 보폭으로 사업 보국을 위해 힘써온 이 명예 회장 같은 기업인이 있었기에 코오롱은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었다.

기업인 최초 국민훈장 ‘무궁화장’ 받아

이 명예회장은 49년간의 기업 활동 중 화려한 수상경력이 입증하듯 대내외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1982년 기업인으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금탑산업훈장’을 받았으며 같은 해 체육훈장 ‘백마장’을 수장했다. 1984년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나일론을 도입한 공로와 ‘산업발전을 통한 사회봉사’를 기업사명으로 하여 새로운 산업분야를 꾸준히 개척해 발전시켜온 공로로 ‘한국의 경영자상(한국능률협회)’을 수상했다. 그리고 중앙대학교 ‘명예경제학 박사학위(1988)’를 받은데 이어 고려대학교 최고경영자교우회의 ‘최고경영자대상(1988)’도 수상했다. 
또한 1992년에는 개인에게 수여되는 국내 최고의 훈장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장했다. 국가발전에 지대한 공로가 있는 자에게 수여되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은 개인에게 수여되는 국내 최고의 훈장으로 기업인으로서는 이 명예회장이 처음이었다. 이는 기업 경영인으로서 지난 40여 년 간 성실하게 우리나라 경제발전을 선도해 온 것에 대해 인정받은 것이며, 1982년부터 10여 년 간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을 맡으며 노사문제 안정화에 기여해 왔음은 물론, 1989년 경제단체협의회 회장으로서 산업평화 정착에 이바지하여 사회적인 책임을 다한 것에 대해서도 인정을 받은 것이다. 
특히, 1982년 숨 가쁘게 돌아가는 우리나라의 경제 환경 속에 누구도 맡기를 꺼려할 정도로 어려운 자리였던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높은 수출장벽과 노사분규로 대두한 심각한 위기 상황 타개를 위해 임기 2년의 경총회장 자리를 무려 14년간이나 맡으면서 바람직한 노사관계 진입을 위해 노력했다. 대내외적인 어려운 환경의 변화를 극복하고 노사 양측에 서서 각각의 입장을 이해하고 반영하기 위해 몸소 뛴 노력으로 이 명예회장은 취임 초기의 포부대로 산업평화 정착에 많은 기여를 했다. 
경총 회장으로서 이 명예회장은 지난 1989년 경제 5단체가 참여하는 경제단체협의회 창설을 주도해 한국 경제의 최대 걸림돌이던 노사문제를 풀어가는 데 주역으로 활동했으며, 1990년에는 노사와 공익대표가 참석하는 국민경제사회협의회를 발족시켰다. 기업주와 근로자가 첨예하게 대립했던 1993년에는 경총회장으로서 한국노총과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냄으로써 한국 노사관계의 새 장을 열었다.  
노사분규가 심했던 1993년, 이 명예회장은 당시의 상황을 경영자, 근로자, 정부 3자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보았으며 기업을 이끄는 4가지 핵심요소로 자금, 근로자, 시설, 경영자를 꼽으며, 그 중 근로자는 이들 4가지 요소의 핵심이며 기업의 기둥임을 강조했다. 이동찬 명예회장은 기업주와 근로자가 상호 대등한 위치에서 대화와 타협으로 분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런 노력의 결과로 한국노총과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냄으로써 한국 노사관계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4년에는 산업평화 선언을 통해 노사협력의 시대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는 이동찬 명예회장의 기업주와 근로자는 상호 공생 공영하는 공동 운명체라는 인식의 바탕위에서 이루어진 일련의 활동이며, 이는 코오롱그룹의 경영이념에도 반영되어 보람의 일터 운동을 탄생시켰다. 
보람의 일터 운동은 기업주와 근로자의 공생공영 정신에 기반을 둔 것으로 신명나게 일하는 일터 만들기를 목표로 첫째, 참여의 보람, 둘째, 성취의 보람, 셋째, 대가의 보람을 이룩하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근로자는 정당한 임금을 받되 일 자체에서 성취의 보람을 느끼고, 이룩한 결과에 따른 승진과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경영자와 종업원이 다 함께 노력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정신은 후대 이웅열 현 코오롱그룹 회장의 경영방침에도 이어져, 산업계 전반의 변화로 말미암아 노사갈등이 극심했던 화섬업계에서 2007년 항구적 무분규를 골자로 하는 노사상생동행을 선언함으로써 강성노조로 경쟁력을 잃어가던 화섬업계에 노사 상생 기류를 확산시키고 기업의 실적 또한 크게 개선해 코오롱의 미래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비인기종목 마라톤·육상 중흥, 골프 대중화 앞장

이외에도 이동찬 명예회장은 통일문제와 관련해 민간단체인 민족통일중앙협의회 임원으로서 조국 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특히 170여개의 지역협의회 구성에 앞장서 통일과 관련된 사업에 있어 많은 지원을 했다. 개인에게 수여되는 최고훈장인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장은 이 명예회장이 그 동안 국가와 사회 발전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가를 가장 객관적으로 입증해주는 사례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명예회장은 기업가로서뿐만 아니라 공인이자 더불어 사는 이웃이 되기 위해 사회공헌활동도 적극적으로 해 왔다. 1974년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사회활동을 시작한 이래 1975년 대한농구협회 부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 등으로 각종 단체에서 활약했으며, 1980년에는 대한농구협회 회장에 취임한데 이어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으로서 스포츠를 통한 외교에도 일익을 담당했다. 또한 대한골프협회 회장을 맡아 ‘골프백서’를 발간하는 등 골프 대중화사업에 힘씀으로써 오늘날 한국선수들의 세계 골프대회 재패를 위한 토양을 마련했다. 
특히, 한국 마라톤의 열성적인 후원자로서 널리 알려져 있는 이 명예회장은 비인기종목이었던 마라톤과 육상의 중흥을 위해 1985년부터 현재까지 매년 ‘전국 남녀고교 구간마라톤대회’를 주최해 마라톤 선수의 저변확대와 인재의 조기 발굴 육성을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코오롱마라톤 팀을 창단해 우수한 선수들을 육성하고 있다. 또한, 한국마라톤 기록 갱신을 위한 활력소의 일환으로 기록 갱신자에 대해 연구장려비를 지급한다는 일련의 내용을 발표하여 마라톤 선수들을 격려했다. ‘손기정 선수 이후 맥이 끊겼던 국내 마라톤 선수의 올림픽 금메달 획득’이라는 이동찬 회장의 바람은 청년기 마라톤 기록갱신으로 1억 원의 연구장려비를 받은 황영조 선수의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 제패(1992)를 통해 현실화되기도 했다. 
1992년 체육훈장 청룡장을 받은 이동찬 명예회장은 1993년에는 21세기 경영인클럽의 ‘신산업경영대상’, 1994년 한국경영학회의 ‘한국경영자대상’을 받아 대외적으로 탁월한 경영인으로서의 위상을 인정받았다. 또한 이 명예회장은 2002 한일 월드컵 초대 조직위원장을 역임하며 월드컵의 성공적인 개최와 축구 전용경기장 확충 등에 많은 기여를 했다.
한편, 이웃과 더불어 번영하는 것을 기업인의 소명이라고 믿으며 ‘더불어 사는 우리사회’ 만들기에 노력해온 이 명예회장은 기업경영활동을 마감한 후 코오롱그룹 오운문화재단의 이사장으로 활동하면서 ‘살맛나는 세상’ 캠페인 사업을 하는 등 사회봉사 활동에 힘썼다. 산간벽지 학교에 학습기자재 보내기 운동을 벌여오고 있으며 “어려운 이웃들에게 용기와 자활의 기회가 되고, 지역 주민들에게도 편안한 쉼터가 되기를 바란다”며 1992년에는 12억 원 상당의 서울 강북구 길음동에 길음사회복지관을 건립해 기증하고 2003년에도 사회복지법인 운가자비원에 27억 원 상당의 수유종합사회복지관을 건립해 기증했다. 1995년에는 충북 괴산에 청소년 수련마을인 보람원을 개원함으로써 한국 청소년 교육의 새장을 열었다. 또한 살맛나는 세상 캠페인의 일환으로 사회의 선행?미담사례를 발굴해 널리 알리기 위해 그의 호를 딴 ‘우정선행상(牛汀善行賞)’을 제정해 2001년부터 매년 4월 시상식을 통해 선행을 격려해 왔다.

▲ 2009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이 미수전 개최

이동찬 명예회장의 경영어록

* 불황은 기업으로 하여금 호황 때보다 더 큰 번영을 가져오게 하는 경쟁력 강화의 계기가 되는 것이니 모든 사원은 합심하여 불굴의 의지와 인내로 슬기롭게 이를 극복해야 한다.
-1982년 자서전 <이상은 높게, 눈은 아래로> 

* 현상유지란 퇴보와 일치되는 개념이다. 혁신적 사고로써 창의력을 발휘하여 어려운 경영여건의 탁류를 헤어날 수 있는 집념이 요구된다.
-1982년 자서전 <이상은 높게, 눈은 아래로> 

* 기업가는 우선 종업원과 그들의 가족을 생각해야 되고 일반 소비대중도 생각해야 되며 나아가서 국자적인 차원에서 기업의 사회성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기업의 사회봉사정신이야말로 오늘날 한국적 사회풍토에서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기업가의 윤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1982년 자서전 <이상은 높게, 눈은 아래로> 

* 수익이 부진한 원인을 불황이나 자금부족에 전가하는 안이한 버릇을 버리고, 계수를 정확히 분석하고 예측함으로써 흑자를 내는 여건을 만들도록 해야 한다. 그러한 자세의 차이가 잘하는 회사와 못하는 회사를 구분하는 요소가 된다.
-1982년 자서전 <이상은 높게, 눈은아래로> 中

* 노(勞)도 없고 사(使)도 없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존경하고,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사랑하며, 대우도 좋고 임금과 생산성도 높아서 직원들이 노조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 회사가 가장 바람직한 회사.
-1989년 8월 코오롱 구미공장 survival 보고대회 특강 

* 기업인만 잘 한다고 해서 경제가 잘 되는 것은 아니다. 기업의 양대 지주 중 하나인 근로자도 기업인과 함께 우리의 후손에게 물려줄 풍요로운 나라 건설에 참여한다는 공감대를 갖고 열심히 일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1991년 3월 <매일경제신문> 대담

* 마음의 평안과 건강 유지를 위해 다양한 취미 활동을 해왔지만 배낭을 메고 아름다운 자연을 찾아 마음에 비춰진 자연의 모습을 화폭에 담는 것이야말로 나의 최고 여가.
-1992년 자서전 <벌기보다 쓰기가 살기보다 죽기가> 

인사이트코리아, INSIGHT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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