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는 친구 간에 인정초요, 늙은 과부 심심초요, 내외간엔 사랑초
담배는 친구 간에 인정초요, 늙은 과부 심심초요, 내외간엔 사랑초
  • 이만훈 기자
  • 승인 2019.03.01 10: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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끽연하는 사람 죄인 취급하는 시대…담배의 역사와 향수

 

지난해 말 담뱃갑 경고그림 교체 시행으로 담뱃갑 면적의 50%를 차지했던
흡연 경고그림과 문구의 표기면적이 70%로 확대됐다.<뉴시스>

#.올 7월부터 폐암에 대해서도 국가 암검진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조기에 암을 발견해 치료율을 높이고 사망률은 낮추지는 취지로 1999년부터 시작한 국가 암검진 사업에 드디어 폐암까지 포함된 것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 대상이 ‘만 54~74세 남녀 중에서 30갑년 이상 흡연을 한 사람’이란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30갑년’이란 매일 한 갑씩 30년 동안 담배를 피우거나 하루 두 갑씩 15년 동안 흡연을 한 경우를 말한다. 해당되는 사람들은 2년마다 폐에 대한 CT검사를 받을 수 있는데 본인은 총 11만원의 비용 가운데 10%인 1만1000원만 내면 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폐암에 대한 국가검진 대상으로 왜 하필이면 담배흡연자로 했는가다. 폐암의 원인으로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도 그리 한 것을 보면 국가가 담배를 폐암의 ‘주적(主敵)’으로 명시해 공포한 셈이다. 그동안 툭하면 ‘담배와의 전쟁’ 운운 하던 것이 마침내 노골적으로 현실화된 것이다. 아, 담배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30갑년이란 걸 뒤집어 속살을 들여다보면 이래저래 30년이란 긴 세월을 담배와 ‘친구’로 지냈단 말이다. 30년간 대충 21만9000개비를 태웠을 테고, 한 대 빠는데 6분 정도이니 131만 4000분, 즉 2만1900시간을 꼬박 함께 한 셈이다. 날 수로 따지면 912일, 다시 말해 2년 6개월 동안 낮밤을 합쳐 쉬지 않고 ‘물고 빨고’한 사이인 것이다. 세상에 어떤 친구가 이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겠는가? 흔히 회자되는 관포지교(管鮑之交)도 이에 비하면 그야말로 ‘택도 없는’ 얘기다.

이걸 두고 요즘 의사들은 중독이니 어쩌구 저쩌구 하지만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담배의 정(情)이라고 여겼다. 담배를 달리 상사초(相思草)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고, 안 보이면 섭섭하고 그런….

 ‘tobacco’ 파이프에서 유래

#.담배를 인류가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4000~5000년 전쯤 안데스산맥 속 해발 3812m에 있는 티티카카호 주위에 자생하던 것을 인디언들이 애용하면서 점차 카리브해에 있는 쿠바까지 전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멕시코 원주민들의 전설에 따르면, 너무나 못생겨서 남자들이 다 피하는 것에 비관 자살한 여자가 죽기 직전 ‘세상의 모든 남자들과 키스하고 싶어요’라는 소원을 빌었고 그녀가 죽은 자리 위에서 생겨난 것이 담배라고 한다.

담배가 유럽의 문헌에 가장 처음 언급되는 것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1492년 항해를 통해 원주민에게서 잎담배를 받아온 뒤였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세력이 중남미에서 유럽으로 옮겨가 인기를 끈 품목 가운데 특히 흥미 있는 것은 담배 말고도 고추, 카카오, 코카, 키나피, 감자, 옥수수가 있다.

#.원주민들은 담배의 잎을 ‘cohabba’ 또는 ‘guioja’라 했고, 스페인 사람들은 한때 이것을 신령스런 마력을 지닌 식물, 즉 ‘yerba sancta(holy herb)’라고 했다.

그런데 이 식물의 잎을 원주민들은 tobacco 혹은 tabacco라는 구부러진 파이프에 담아 불을 붙여 흡입했다고 한다. 따라서 tobacco는 파이프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담배는 전 세계에 100여종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재배되는 것은 Nicotiana tabacum이다. 담배는 일년생 풀로서 잘 자란 줄기는 아기의 손목만큼 굵고 1.5~2m까지 자란다. 연한 녹색의 잎은 60cm정도의 타원형이다.

Nicotiana란 말은 1500년대 프랑스 황제의 특사로 포르투갈에 파견돼있던 장 니꼬(Jean Nicot·1530~1600)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니꼬 대사가 포르투갈에 머물고 있을 때 미국 풀로리다로 여행하고 돌아온 사람으로부터 이 신비로운 식물을 선물로 받았으며 이를 정원에 심자 엄청나게 무성히 자랐다고 한다.

그 무렵 포르투갈에선 악성궤양이나 침식성 궤양, 코의 연골부위나 뺨 등에 생긴 질병에 이 식물의 뿌리, 잎 등의 즙과 가루를 발랐더니 싹 나았다는 얘기가 많았다. 뿐만 아니라 나라 곳곳에 이미 이 식물이 백선(白癬), 궤양, 연주창(連珠瘡) 등의 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마침내 이 식물은 프랑스까지 보내져 비슷한 의약용으로 많은 유명인사에게 제공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프랑스의 어느 성주와 수도원 수도사들은 니코틴 등을 함유한 담배성분을 뽑아내 다른 식물의 성분과 혼합해 기관지천식이나 호흡곤란 치료에 응용했다고도 한다.

또 이 무렵 영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의 명분 없는 불평 해소에 담배를 피울 것을 권장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사이에 드디어 포르투갈에 있던 니꼬대사가 당시 프랑스 황제 앙리 2세(Heny ll)의 왕비 까뜨린느 드 메디시(Catherine de Medicis)에게 담배식물을 선물로 보내면서 "황제께서 이것을 피우시면 정신이 안정되고 심성이 더욱 유순해지시며, 그에 따라 폐하의 정치력이 위대해져 국가가 영원히 발전하게 될 것“이라고 끽연을 권유했다.

이후 상류사회의 귀족과 문인들은 특히 니꼬 대사가 황제에게 추천해 보낸 이 식물의 신경안정 효과를 믿고 경쟁이라도 하듯이 애용하면서 서서히 일반 대중사회 속으로 깊숙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오늘날 세계 어디를 가나 많은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그 연유는 바로 이런 역사가 깔려있다.

조선시대 ‘환금작물’로 환영

#.남미가 원산인 담배가 동양에 전래되기 시작한 것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뒤 한참 지난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등 유럽인들에 의해 옛날 마르코 폴로(Marco Polo)의 이동경로를 따라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세계의 바다를 주름잡던 포르투갈 선박편을 통해 터키, 페르시아 등지에 전파됐고, 필리핀에는 1569년 스페인이 점령하면서 곧 멕시코산 담배가 옮겨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에서는 16세기 말경 명나라 군대가 운남(雲南·우리가 安南, 越南이라 부르는 지역)을 정복하러 갔을 무렵 이미 군인들이 가끔 담배를 이용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원정군 중에서도 담배를 피운 군인들은 월남의 정글 속에서도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아시아의 열대지방, 즉 동남아시아에서는 담배가 말라리아 특효약으로 인식돼 17세기에 대대적으로 담배가 확산됐다.

이 무렵 중국에는 서양풍의 담배가 지나치게 유행하는 바람에 1638년에는 금연령이 내려지기도 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점차 북부 산간벽지까지 전파되기에 이르렀다.

#.담배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이후 1618년 광해군 때 일본을 경유해 조선에 들어왔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 시기는 담배뿐만 아니라 호박, 고추, 고구마, 감자 등 신종 작물이 일본이나 중국을 통해 수입되던 시기였기도 하다. 그런데 이 중에서도 특히 담배는 인삼과 더불어 특용 작물의 대표적 작물로 인식돼 수입된 지 얼마 되지 않는 재배 초기부터 고급 기호품으로 애용되면서 재배가 급속도로 늘어났다.

담배는 심심함을 달래주고, 무료함을 풀어준다 해서 ‘심심초’, 술처럼 정신을 취하게 한다 해서 ‘연주(煙酒)’, 차와 같이 피로를 풀어준다 해서 ‘연차(煙茶)’, 한 번 맛보면 잊을 수 없다 해서 ‘상사초(相思草)’ 등으로 불렀는데, 이는 모두 담배의 기호품적인 속성을 담아 표현한 것들이다.

요즘 상식으론 기겁할 얘기지만 당시엔 담배가 거담(去痰)이나 각성(覺醒) 효과에 뛰어난 약용품(藥用品)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담배의 또 다른 별칭인 ‘남령초(南靈草)’나 ‘반혼초(返魂草)’ 등은 담배가 지니고 있는 약용 기능을 담아 표현한 별명들이다.

담배가 갖고 있는 이러한 다양한 기능 때문일까? 18세기 후반 서유구(徐有榘·1764~1845)의 <임원십육지>에 나타난 남한강변 주요 장시의 거래품목들을 살펴보면 쌀, 면포, 마포, 소, 소금 다음으로 담배가 많이 거래됐음 알 수 있다.

담배는 생활필수품이 아닌 기호품임에도 당시 생활필수품에 버금가는 상업적 비중을 차지했던 농작물이었다. 그래서 18세기 중엽과 19세기 초엽에 이르러서는 담배 재배가 전국적으로 확산돼 평안도의 경우 담배 밭의 수익이 수전(水田)의 최상급 밭보다 10배나 이익이 많게 됐고, 주민들이 담배재배만을 전업으로 삼고도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진안(鎭安)과 같은 담배 산지가 형성되기도 했다.

이후로도 담배 재배는 곡물 재배보다 이로운 것으로 인식돼 농작물을 심어야 할 비옥한 밭이 담배를 재배하는 밭으로 바뀌는 부작용도 생겨나게 됐다. 이에 대한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상소문 일부와 조선 후기 정상기(鄭尙驥)의<농포문답(農圃問答)>에 실린 담배재배 금지에 대한 글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무릇 남초라 하는 것은 남녀노소 누구 하나 안 피우는 사람이 없습니다. 피우는 사람이 많으니, 심는 사람도 따라서 많아지고, 그러한 까닭으로 최고로 비옥한 땅이 전부 남초 밭으로 바뀝니다. 팔도를 모두 합해 계산해 보아도 몇 평쯤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천산, 만산이 모두 연초 밭으로 되고, 평원과 광야의 태반이 연초 밭으로 되니 곡식이 자라나는 땅은 점점 줄어들고, 백성들은 비싼 돈을 들여 연초를 사서 피우니 재정난이 막심합니다.”

“밥은 안 먹어도 담배는 피워야 하니 옷을 팔고 그릇을 팔아 담배를 사먹는다. 재물을 축내고 사람을 해롭게 하기가 이렇건만 사람들은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

담배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곱지 않았음에도 줄기차게 담배가 재배되고 판매된 까닭은 무엇보다도 담배 한 근의 가격이 은(銀) 한 냥으로 교환될 정도로 고가의 환금작물(換金作物)로 취급됐기 때문이다.

특히 여주, 광주, 용인지역에서 재배되던 담배는 일명 ‘용인엽(龍仁葉)’이라 해서 평안도의 ‘성천초(成川草)’, 영월의 ‘영월엽(寧越葉)’과 더불어 가장 품질이 우수한 고가품으로 대접을 받았다.

유해무익, 요망한 풀

#.인조 16년(1638년) 8월 4일자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이 풀은 병진·정사년(1616~1617년)간부터 바다를 건너 들어와 피우는 자가 있었으나 많지 않았는데, 신유·임술년(1621~1622년) 이래로는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어(중략) 서로 교역(交易)까지 했다. 오래 피운 자가 유해무익한 것을 알고 끊으려고 해도 끝내 끊지 못하니, 세상에서 요망한 풀이라고 일컬었다.’

이옥(이옥)의 <연경(煙經)>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담배가 처음 들어온 때에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백 명에 한둘이었고, 그리 멀지 않은 옛날에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열에 한둘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남자들은 모두 피우고, 부녀자들 역시 모두 피우며, 천한 사람들까지도 모두 피운다. 온 세상에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다. 어린아이가 한 길이나 되는 긴 담뱃대를 입에 문 채 서서 피운다. 젊은 계집종이 부뚜막에 걸터앉아 안개를 토해내듯 담배를 피워댄다. 망가진 패랭이를 쓴 거지가 지팡이와 길이가 같은 담뱃대를 들었다. 길 가는 사람을 가로 막고 한양의 종성연(鐘聲烟) 한 대를 달랜다. 대갓집 종놈이 짧지 않은 담뱃대를 가로 물고 그 비싼 서초(西草)를 맘껏 태운다. 손님이 앞을 지나가도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몽둥이로 내리칠 놈!”

담배를 싫어했던 이덕무(李德懋)는 <한죽당섭필(寒竹堂涉筆)>에 ‘담배, 고기, 술의 우열(煙肉酒)’이란 글을 남겼다.

“우연히 여러 손님들과 함께 있었다. 손님들이 제각기 좋아하는 것을 말했다. 어떤 사람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나는 담배와 술, 고기 세 가지를 모두 즐기지요.’ 그래서 내가 그 세 가지를 다 갖추지 못할 때는 어느 것을 버릴지 물었다. 그러자 손님은 대뜸 ‘먼저 술을 버리고, 다음엔 고기를 버릴 테요’라고 말했다. 내가 다시 그 다음엔 무엇을 버리겠냐고 물었다. 손님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만일 담배를 버린다면 비록 살아 있다 해도 무슨 재미가 있겠소?’라고 했다.”

#.17세기 이래 한국인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열렬히 담배를 피웠고, 자연스럽게 산업과 문화를 비롯한 인간생활 전반에 그 자취를 남겨놓았다. 따라서 담배는 한국인의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코드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다.

조선에 처음 담배가 들어왔을 당시에는 담배에 위아래를 따지는 예절이 없어서 신하들마저 너도나도 임금 앞에서 담배를 피워대는 통에 조회를 하는 정전(正殿)이 너구리굴이 될 정도였다고 한다. 심지어 서당에서도 훈장과 학도가 같이 맞담배질을 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또 할애비가 손주한테 담배를 피우게 하고선 귀엽다고 칭찬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어른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이 예절이 된 것은 광해군 때부터였다. 담배를 지독히 싫어한 광해군이 맞담배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또한 나중엔 담배 때문에 하도 화재가 자주 생겨서 금연령을 내린 적도 있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정조는 담배 예찬론자였는데 아들 순조는 혐연가였다고 한다.

어쨌든 담배는 ‘친구 간에 인정초요, 늙은 과부 심심초요, 가장에는 열녀초요, 내외간엔 사랑초, 형제간에 우애초’였다.

양반의 상징이 된 ‘장죽(長竹)’

#.우리나라의 담배문화 가운데 독특한 것은 담뱃대다. 담뱃대는 담배를 담아 불태우는 담배통과 입에 물고 빠는 물부리, 그리고 담배통과 물부리 사이를 연결하는 설대로 구성되어 있다. 담배통은 대꼬바리·꼬불통, 물부리는 물추리·빨부리 등으로 일컫기도 한다. 옛 문헌에서는 연죽(煙竹)·연관(煙管)·연배(烟盃) 등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 중 연죽이 일반적이다. 설대가 긴 것은 장죽(長竹), 설대가 없거나 짧은 것은 곰방대(短竹)라 부른다. 대통은 지름 2.3cm, 깊이 3.5cm로 담배를 한 번 재우면 20∼30분 동안 피울 수 있다. 설대는 지름 7∼8mm, 마디 사이는 20cm 정도의 가는 대를 사용하는데, 흑단재로 만든 것 외에 붉은 칠을 한 목관(木管)의 것도 많다. 설대가 길어서 연기가 식어야 맛이 좋다고 한다. 설대가 길고 대통이 작은 것이 파이프와 다르며, 한국·중국·일본 등에서 주로 사용한다. 대통을 안수(雁首)라고도 하는데, 마치 기러기의 목과 비슷해 붙은 이름이다.

담배는 일본을 통해 들어온 까닭에 초기의 담뱃대는 역시 일본 양식이 이식됐으리라 추정된다. 그래서 담뱃대는 대일무역의 창구구실을 했던 동래(東萊)에서 일찍부터 제작되기 시작해 명성을 굳혔던 것으로 보인다. 19세기의 <오주연문장전산고>나 <규합총서>에서 ‘동래연죽’을 유명 물산의 하나로 꼽았고,<춘향전>에서도 “왜간죽 부산대에 담배를 너훌지게 담는다”는 구절이 보인다.

초창기 오래 된 양식의 담뱃대는 담배 담는 통이 작고 설대도 짧았다. 그러나 18세기 풍속도를 보면 이미 장죽이 유행됐음을 알 수 있다. 장죽이 양반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처럼 된 것이다. 유득공(柳得恭)의 <경도잡지(京都雜志)>에 따르면 “조관들이 담배합과 담뱃대를 말 뒤에 달고 다닌다”며 “비천한 사람들은 존귀한 분 앞에서 감히 담배를 피우지 못한다”고 했다. 실제로 서민이나 하인은 상전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했다. 재상이나 고관이 지나갈 때 담배를 피우는 자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담뱃대를 빼앗아 꺾어 버리고 잡아다 볼기를 쳤다.

또, 서유구(徐有榘) 역시 <금화경독기(金華耕讀記)>에서 “전국에 걸쳐 다투어 사치하는 자들이 백통이나 오동(烏銅·검은빛이 나는 구리)으로 담뱃대를 만들뿐더러 금은으로 치장함으로써 쓸데없는 데 막대한 비용을 허비한다”고 한 것으로 미뤄 당시 담뱃대에 대한 사치풍조가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골초였던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 중 큰 갓을 쓰고 장죽을 문 조선 양반의 스케치를 보곤 “나도 죽기 전 저렇게 한 번 담배를 피우고 싶다”고 부러워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한편 양반의 담뱃대는 담배를 피우는 기능 말고도 아래 것들을 부르는 초인종 역할도 했다. 즉, 양반은 가능하면 말을 적게 하고 높은 소리를 내지 않아야 하므로 사랑방에서 아랫사람한테 용무가 있을 때는 장죽의 대통으로 쇠화로나 놋재털이를 두드리면 하인이 득달같이 달려오게 마련이었다. 또 담뱃대는 아랫사람을 부릴 때 방향을 가리키는 지휘봉으로도 쓰였고, 꾸짖거나 벌 줄 때는 매로도 쓰였다. 보통은 화가 날 경우 대통으로 머리를 조아리고 선 아랫사람의 뒷통수를 때렸는데 대통이 쇠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통증이 대단했으며 심할 경우 피가 나기도 했다. 그래서 남에게 얻어맞거나 의외의 일을 당해 정신이 멍해진 사람을 “대통 맞은 병아리 같다”고 하는 말이 생겼다.

‘소통의 장’ 담배댁 사랑방의 추억

#.어릴 적 우리집을 두고 동네에선 ‘담배댁’이라고 불렀다. 집안의 어른이신 할머니의 친정동네 이름을 따서 ‘마침이댁’이라고도 했지만 그저 편하게는 ‘담배댁’이 택호였다. 우리 집에서 담배를 팔았기 때문이다. 위아래 다해 100호 가까이 되는 마을에서 담배를 파는 집은 우리 집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집엔 담배가 떨어질 날이 없었고, 그 바람에 사랑방은 늘 공 담배를 얻어 피우려는 동네 남정네들로 북적이곤 했다. 전쟁이 훑고 간 뒤 워낙 없던 시절이라 피우고는 싶은데 담배를 살 형편은 안되니 ‘동냥뻐끔’이라도 할 수 밖에. 특히 농한기인 한겨울엔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하면 머슴 형이 군불을 뜨끈히 지핀 뒤 화롯불까지 대령해놓고 말꾼들을 기다렸다. 그러면 할머니께서 시키시는 대로 ‘풍년초’ 한 봉초와 책 한 권을 등잔바탕 곁에 가져다 놓았다. 이윽고 헛기침소리가 이어질 때마다 방문 여닫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안채에까지 전해지곤 했다. 어쩌다 열 명이 넘기도 하지만 얼핏 인원이 넘친다 싶으면 그냥 돌아가거나, 아니면 먼저 와서 이미 몇 모금이라도 빤 이가 자리를 비켜주는 덕에 늘 예닐곱 정도가 정원(?)이었다. 특히 나이가 많은 축에 속하는 어른들은 초저녁에 일을 보곤 젊은 패들이 올 참이 되면 슬며시 일어나 노소가 맞담배질하는 상스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담배는 엄지와 검지로 살짝 꼬집듯이 적당량을 덜어 찢은 책장 위에 얹어놓고 가루가 빠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말아 침을 발라 고정시키면 완성됐는데 누구라도 담뱃가루를 욕심 부리는 일은 없었다. 나름대로 눈치껏 하는 규칙이 있었던 셈이다. 어차피 얻어먹는 판에 자칫 나쁜 소문이라도 나면 그나마도 왕따당하기 십상이어서 결국 자기만 손해를 보리란 걸 서로 잘 알았으니까.

그러다 보니 대부분 담배말이의 꽁무니가 타들어갈 때까지 쪽쪽대며 빨아대는 통에 엄지와 검지는 노랗게 익어있게 마련이고 이따금 입술을 데는 촌극이 빚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 사랑방이 단순히 ‘담뱃방’ 역할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하루 두 세순 돌다보면 다녀간 연인원이 스무 명 정도가 되곤 하는데 동네 대소사는 물론 나라 돌아가는 형편까지 온갖 소식을 주고받는 자리여서 요즘으로 치면 ‘포럼’이나 마찬가지였다. 담뱃꾼들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자정 전에 흩어졌다. 그네들이 가고 난 자리엔 담뱃재와 꽁초로 수북해진 재털이용 방구리와 반 넘어 찢겨져나간 책, 그리고 진하게 뿜어내는 담배연기에도 용케 견뎌낸 등잔불이 가물거리고 있었다.

#.예전엔 담배를 배우기가 좋았다. 어릴 적부터 할머니께 담뱃불을 부쳐드리다 보면 한두 모금 빠는 건 일도 아니었고, 꼬맹이들끼리 불장난을 할 때도 으레 담배를 꼬불쳐오는 놈이 있게 마련이어서 연기를 넘기는 내기를 하곤 했다. 중학생이 되면서 도시로 나가자 양아치 친구들이 수시로 겁박 반 꼬득임 반으로 담배를 권했고, 대학에 다닐 때는 담배를 피우지 못하면 ‘갱충이’취급을 받을 정도였다.

사회분위기 역시 그랬다. 흡연이 일반화되면서 손님 접대에는 담배가 빠질 수 없었다. 손님이 오면 주안상이 차려질 때까지 우선 담배를 권하는 게 우리네 풍속이었다. 손님의 신분이 높거나 연장자일 경우엔 주인이 담뱃대에 불을 부쳐 권했다. 행세하는 집안에선 ‘객죽(客竹)’이라고 해 정교하게 만든 접대용 담뱃대가 따로 있었으며, 제일 좋은 고급 담배는 특별히 보관해 뒀다가 손님이 왔을 때만 꺼내놓는 객초(客草)로 사용했다.

뿐만 아니라 버스와 지하철 안에서도 어른들은 버젓이 담배를 피워댔고, 비행기에서의 흡연이 금지된 것도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정작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것은 군에 입대하고 나서였다. 말하자면 당시로서는 늦깎이 데뷔였다. 그때까지 흡연의 유혹을 잘도 뿌리칠 수 있었던 것은 담배를 살 돈도 없었지만 담배가 떨어지면 전전긍긍 어쩔 줄 몰라 하는 골초의 궁상이 지지리도 역겨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단 금연의 둑이 무너지자 대책이 없을 정도로 담배를 피워댔다. 더구나 행정병으로서 만날 ‘야작(야간작업의 줄임말)’을 해야 하는 통에 하루 서너 갑씩은 보통이었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는 말이 딱 맞았다.

제대 후 하루 한 갑 정도로 줄였지만 그렇게 40여년을 담배와 함께 했다. 그러다 이 오랜 친구와 절연(絶緣)을 한 게 두해 됐다. 건강을 생각해서도 아니고 단지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마치 염병덩어리마냥 대하는 세상이 더럽고 아니꼬와서였다. 오소리 잡는 굴마냥 연기로 가득한 고깃집에서조차 못 피우게 하니 원.

오호 애재(哀哉)! 삼가 담배의 거시기를 조문하노라-.

인사이트코리아, INSIGHT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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