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성 탁월한 혁신의 리더
창조성 탁월한 혁신의 리더
  • 박흥순 기자
  • 승인 2015.04.03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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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류성룡인가?

류성룡을 평가한 여러 연구서들에서 공통적으로 말하는 그의 리더십은 ‘실용(實用)’이란 한 단어로 압축할 수 있다. 관념적으로 말로만 떠드는 탁상공론이 아닌 실생활에 필요한, 다시 말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과학기술과 같은 ‘실사구시(實事求是)’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과 다소 동떨어진 이념이 통치하던 당시의 조선은 몹시 폐쇄적인 사회였다. 특히 조선 건국 이래 200여 년간 거의 큰 전쟁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예컨대, 숭문천무(崇文賤武)의식도 팽배했다. 지금으로선 실용적이라 평가받는 그의 비책은 당시 시대상황에 비춰봤을 때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다. 

무엇보다 류성룡은 케케묵은 낡은 원리인 관념론을 배격하며 탈(脫)이데올로기를 적극 실천했다. 겉과 속, 말과 행동의 일치를 강조하며 위기에 빠진 조국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헌신했다. 
위대한 ‘천재 왕’ 세종대왕이 휼륭히 기반을 닦아놓은 나라를 망치고 백성들을 굶주리게 하는 경직된 이념에 사로잡힌 채 파벌 싸움에 몰두하던 당시 벼슬아치들과 다르게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세상의 변화를 먼저 읽고 대처하는 창조성이 뛰어난 혁신의 리더였던 셈이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도 진충보국(盡忠報國), 위민(爲民) 정신으로 나라와 백성을 우선시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제도와 법안들을 잇달아 내놓고 시행한 점에서 부국강병과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그의 줄기찬 노력을 읽을 수 있다.

‘훈련도감’ 설치, 징병제를 직업군인제로 바꿔

명 재상 류성룡이 시행한 제도 중에서도 손꼽히는 ‘훈련도감’의 설치는 조선의 군사체계를 확 바꿔놓는 계기가 됐다. 임란 전 조선의 군사체계는 군역을 부담한 양인들로 구성된 징병제였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용될 수 있는 인원은 모두 차출돼 국방을 책임졌다. 이런 군사체계에 ‘훈련도감을 설치해 모병체계를 송두리째 바꿔 직업군인화 했다. 

군역이라는 형식으로 징집된 기존의 군사들과 다르게 군복무를 본업으로 삼는 직업군인들은 동기부터 남 달랐다. 임란 직후부터 조선의 베테랑 정예군으로 활약하며, 매월 쌀 6말을 보수로 받았던 훈련도감 출신 군사들은 임진왜란 이후 18세기까지 조선군의 중추적인 역할을 도맡았다.
류성룡은 전란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구휼(救恤)에도 앞장서는 정책을 펼쳤다. 
기상학 연구에 따르면 임진왜란은 시기상 소빙기(Little Ice Age)의 대자연 재난에 위치했다. 13세기 초부터 대기권에 쌓인 우주먼지가 태양의 빛과 열을 차단해 전 지구 상에 재난을 불러왔던 시기다. 대기권의 기상이변은 농사를 망치고 병충해와 전염병을 불러왔으며, 많은 백성들이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굶어 죽는 일도 벌어졌다. 
이는 농민이 군사가 되는 조선에 치명적이었고, 가뜩이나 기상이변으로 식량이 풍족하지 않은 상황에서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이에 류성룡은 조선 내에 곡식이 모자라자 압록강 변에 위치한 중강진에 대규모 시장을 세워 곡식을 수입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생육기간이 짧고 생산량이 많은 구황작물의 생산을 장려하면서 백성들의 굶주림을 해결하고자 했다. 이밖에도 둔전경영은 물론 백성들의 실생활에 도움이 될 만한 염업, 광업, 수공업, 상업 등을 전방위로 지원했다. 수도 한양을 수복한 후 경기 이북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실시된 이 정책은 백성들의 경제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을 줬고 정유재란 때 왜군의 북상을 저지하는 원동력이 된 것으로 평가된다. 정유재란 때 한강변에서 군사를 열병하던 선조도 “군사의 위용이 이 정도가 된 것은 오로지 경(류성룡)의 힘이다”며 크게 칭찬했다.

기상이변 맞서 전방위 산업 지원 

류성룡이 시행한 구휼정책에는 작미법(作米法)도 있다. 작미법은 훗날 대동법의 모태가 된 정책으로, 조세의 단위를 가호(家戶)에서 전결(田結), 즉 농지로 바꾸고 세금을 특산물이 아닌 쌀로 통일하는 제도였다. 조광조와 율곡 이이 등도 이를 주장했지만 직접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농지단위로 납부하면 세금이 늘어날 것을 우려한 양반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작미법을 시행하자 굶주림에 지쳐 있던 백성들은 크게 환호했다. 
류성룡이 시행한 사회관련 법으로 가장 혁신적이라 평가받는 제도는 ‘면천법’이다. 면천법은 문자 그대로 천한신분(賤)을 면(免)해주는 정책이었는데, 전쟁에서 공을 세우는 자는 신분을 상승시켜 줬다. 노비의 신분을 벗고 양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천민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사농공상의 조선사회에 충격을 불러왔다. 특히 사대부들은 이 같은 류성룡의 정책에 강력히 반발했다. 노비가 개인의 사유재산으로 인식되던 시절 자신들의 재산을 국가에서 징집하니 그 반발은 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류성룡은 양반도 군사로 징집해야 한다는 의견으로 맞섰고 ‘속오군’이라는 양반부대를 별도편성하기에 이른다. 
면천법은 조선의 신분사회를 뛰어넘는 혁신적인 제도이자,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 운동의 시발점 역할을 했지만, 결국 기득권층에 의해 류성룡 자신이 임란 말기 파직당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인사이트코리아, INSIGHT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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