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빼닮은 정기선 HD현대 부회장의 K조선 ‘불도저 경영‘
호황 앞두고 업계 최초 해외 조선소 건설 추진 세계 인구 1위 인도, 조선업 발전 잠재력 높아 지리적 이점도 뛰어나…美 MRO 협력 요충지
[인사이트코리아 = 심민현 기자] “이봐, 해보기나 했어?”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생전 직원들에게 이 말을 종종 건넸다고 전해진다. 실제 그는 어떤 사업을 추진하고자 하면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불도저처럼 밀어붙여 성공시켰다.
HD현대 모태가 된 울산조선소 건설이 대표적이다. 당시 나라 형편상 조선소 성패는 외자 확보에 달려있었다. 정 명예회장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 지시를 받고 영국 바클레이은행과 4300만 달러에 이르는 차관 협상을 벌였다. 하지만 은행은 우리 조선 능력과 기술 수준 부족을 이유로 거절했다.
정 명예회장은 영국 조선산업 컨설팅 회사 ‘애플도어’의 롱바텀 회장을 만나 바클레이은행을 설득해 줄 것을 간청했다. 하지만 그 역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때 정 명예회장은 지갑에서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 그림이 그려져 있는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들어 “우리나라는 영국보다 300년 앞선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었다”고 호기롭게 말했다.
롱바텀 회장은 마음을 돌려 바클레이은행에 추천서를 써줬다. 영국 차관이 바탕이 돼 1974년 6월 28일 울산조선소가 설립됐다. 울산조선소에서 시작된 K-조선은 2025년 현재 미국의 러브콜을 받을 정도로 성장, 중국과 세계 1, 2위를 다투고 있다.
조부 불도저 정신 이어받은 정기선, 인도 조선소 관철시킬까
50여년이 지나 손자 정기선 HD현대 수석부회장이 조부 정 명예회장 불도저 정신을 이어받아 한국 조선 역사상 첫 해외 조선소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성공한다면 아버지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도 해내지 못한 바다. 공략지는 최근 몇 년간 급속한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는 인도다.
지난달 4일 인도 경제매체 이코노믹타임즈는 HD현대중공업이 인도에 조선소 설립을 검토하고 있으며 지난 2월 회사 관계자가 현지를 찾아 부지를 물색했다고 보도했다. HD현대중공업은 인도 남동부 타밀 나두주의 항구도시 투티코린과 커들로어 등을 둘러본 것으로 알려졌다.
HD현대중공업 관계자는 “인도 조선소 설립에 대해서는 아직 세부적으로 결정된 사항이 없다“고 말했다. 다만 정 수석부회장이 주도적으로 추진하고 있어 설립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정 수석부회장은 부사장 시절부터 해외 조선소 건설에 사활을 걸어 왔다. 2015년 사우디아라비아 국영회사 아람코와의 전략적 협력관계 구축사업을 진두지휘하며 현지 합작조선소 IMI 설립을 주도, 내년 완공을 앞두고 있다.
인도는 글로벌 조선 시장에서 ‘블루오션‘으로 통한다. 세계 인구 1위(14억5093만명) 거대한 시장을 갖고 있으며 평균 연령 28세로 성장 잠재력도 충분하다. 즉, 인건비가 저렴하며 조선소 운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기술자를 젊은 인력으로 꾸릴 수 있다는 뜻이다.
국가 차원의 지원 사격도 예고돼 있다. 나렌드라 모디 총리를 중심으로 한 인도 정부는 제조업 육성 정책 ‘메이크 인 인디아(Make in India)‘에 따라 자국 조선업 역량을 2030년 세계 10위, 2047년 세계 5위까지 키우겠다는 계획이다.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2023년 기준 세계 선박 제조 시장에서 인도 점유율은 1%에도 못 미친다.
인도 정부입장에선 다른 조선 강국의 기술력을 전수받아야 한다. 앙숙관계인 중국을 제외하면 선택지는 사실상 한국밖에 없다. 한승한 SK증권 연구원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반중 감정이 짙은 인도 입장에서는 중국이 아닌 한국 조선소와 협력에 나서는 것이 선박 건조 능력을 보유하는 현실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인도 정부는 지난해 12월 3일 인도 항만해운수로부 알락슈마난 차관보, 인도 최대 국영 조선사 코친조선소 마두 나이르 대표, 인도 최대 국영 선사 인도해운공사(SCI) 비네시 쿠마르 티아기 대표 등으로 구성된 인도 조선업 대표단을 HD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에 파견했다. 이들은 울산조선소를 둘러본 뒤 인도 현지 조선소 설립과 상선 발주, 기술이전 등 협력 가능성을 타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HD현대중공업은 미국 해군 MRO(유지·보수·정비) 사업 확대 등을 위해 글로벌 거점 마련을 타진하고 있었다. HD현대중공업은 지난해부터 MRO 시장 진출을 타진했지만 울산조선소 특수선 도크가 풀가동되며 뜻을 접은 바 있다.
인도는 인도양과 아라비아해를 모두 오갈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이 있다. 국내 최대 해운사 HMM은 지난해 5월 인도와 북미 동안을 오가는 IAX(India America Express) 항로를 추가로 개척했다. HD현대중공업의 인도 현지 조선소 설립이 현실화될 경우 HMM과 협력해 MRO 물량 운반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 전망이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국내 조선업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성장했지만 해외 조선소 설립은 미지의 영역이나 다름 없었다“며 “정기선 수석부회장이 이를 해낸다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꿨던 할아버지의 불도저 정신을 계승하는 것은 물론, 인도라는 엄청난 잠재력을 갖고 있는 시장을 개척하는 일석이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