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혁 칼럼] 류진 회장 취임사와 뭉크의 절규

2025-02-21     임혁 편집인

"친구 둘과 함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해질녘이었고 나는 약간의 우울함을 느꼈다.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멈춰선 나는 죽을 것만 같은 피로감으로 난간에 기댔다. 핏빛하늘에 걸친 불타는 듯한 구름과 암청색 도시가 있었다. 그때 자연을 관통하는, 그치지 않는 커다란 비명 소리를 들었다."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 뭉크가 자신의 걸작 ‘절규(원제:Schrei der Natur)’에 대해 설명한 글이다. 이 작품을 본 사람 중에는 그림 속 인물이 절규하는 것으로 오인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뭉크의 설명에 따르면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그림 속 인물이 귀를 막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일 류진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 회장의 취임사를 접하고 이 그림이 머리에 떠올랐다. 류 회장의 취임사 한마디 한마디가 피맺힌 절규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류 회장은 취임사에서 “현재 한국경제는 성장과 정체의 갈림길 수준을 넘어 벼랑 끝에 놓여 있는 심각한 상황이다. 한국 경제의 성장 엔진을 되살릴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어 “제도의 경쟁력이 곧 국가경쟁력인 시대에 우리 기업환경은 IMF 위기 때보다도 못하다. 낡고 과도한 규제가 기업의 발목을 잡고 저출생과 주력산업 노후화로 기초체력이 고갈되고 있다”고 탄식했다.

특히 정치권을 향해선 “첨단산업 육성법안은 국회에서 표류하고 정치적 갈등이 국민통합을 가로막는다. 상법 개정안 논의도 이사회의 정상적인 운영을 어렵게 하고 해외 투기자본이 손쉽게 경영권을 공격하는 심각한 부작용이 우려된다”고 쓴 소리를 토해냈다.

류 회장의 이 같은 절규 이전에도 우리 사회 곳곳에선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경제지표부터가 그렇다. 4년 만에 최악이라는 지난 1월의 청년층 체감실업률, 22년 만에 최고치를 찍은 지난해 어음부도율 등 지표들마다 아우성이다.

절규는 길거리에서도 들린다. 상가 건물마다 즐비한 ‘임대 안내문’은 자영업자들의 절규다. 더욱 염려스러운 것은 절규가 마치 공명처럼 퍼져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금융계의 한 원로는 “요즘 강남권 빌딩 1층에도 임대 안내문이 부쩍 늘어나고 있더라. 1997년 외환위기 직전보다도 더 스산한 느낌”이라고 걱정했다.

정치권은 이런 와중에도 온통 패를 나누어 싸움질에 매몰돼 있다. 하지만 정작 국민들의 소망은 사회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절규가 하루속히 잦아드는 것이다. 대권을 꿈꾸는 이라면 지금부터라도 각성해서 경제 활력 회복에 집중해야 한다. 그 첫 단추는 기업들의 기를 살리는 것이다. 기업이 기가 죽어서는 무슨 수로도 경제에 숨결을 불어넣을 수 없기 때문이다.

류진 회장은 앞서의 취임사에서 “기업이 없으면 일자리도 없고 국민소득도 없다. 기업 위기가 국민의 위기이고 국가의 위기”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순신 장군의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와도 닮은 이 경고의 말을 위정자들은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