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제철, 미국에 제철소 건립...정의선, 트럼프 보란듯 승부수 던졌다
10조 통큰 투자...현대차·기아 공급 위한 강판 생산 트럼프 2기 대비 목적...일본제철 US스틸 협상 참고 통상 장벽 극복 승부수...최대 20% 수준 관세 혜택
[인사이트코리아 = 심민현 기자] “변화와 혁신을 추구해온 현대차그룹은 어떤 시험과 어려움도 이겨내는 DNA를 갖고 있다”
신년사를 통해 변화와 혁신을 강조한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핵심 계열사 현대제철의 미국 ‘직접 투자’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업계에선 임기가 얼마남지 않은 바이든 행정부가 최근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를 불허한 것을 정 회장이 적극 참고했다고 본다. 정 회장이 미국 조야의 기류를 정확히 읽고 결정한 포석이라는 것이다.
현대제철, 10조원 들여 美 현지 제철소 건설
8일 철강업계에 따르면 현대제철은 미국 현지에 자동차용 강판을 생산할 수 있는 제철소 건설을 검토하고 있다. 이곳에서 생산한 자동차용 강판 등을 조지아주 현대차·기아 공장 등에 공급한다는 구상이다. 현대제철이 해외에서 ‘쇳물 생산’에 나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총 투자액은 10조원에 달할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그룹은 해외 투자 시 부품사와 함께 진출했다. 이 과정에서 현대제철은 현대차 공장 인근에 가공센터를 두는 수준이었다.
공장 부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텍사스, 조지아, 루이지애나 등 주(州) 정부와 투자 조건을 논의하고 있다. 현대제철은 이르면 내년 봄 착공해 2029년께 제철소를 완공할 계획이다.
현대제철이 미국에 추진하는 제철소는 고로 대신 전기로 방식이 유력하다. 고로 생산 방식은 탄소 배출이 많아 신규 허가를 받기 어렵다. 전기로는 고로에 비해 높은 전기료가 부담으로 작용하지만 미국은 산업용 에너지 가격이 한국보다 낮은 데다 시황에 따라 쇳물 생산을 일시 중단할 수 있어 효율성을 최대한 높일 것으로 기대된다.
연간 생산량은 수백만 톤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조지아주 기아차 공장(연 35만대 생산)과 앨라배마주 현대차 공장(연 33만대 생산), 조지아주 서배너 지역에 완공 직전인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아메리카(HMGMA) 전기차 공장(연 30만~50만대 생산 계획)을 고려한 수치다. 완성차 업계에선 자동차 1대당 필요한 강판을 약 1톤으로 본다.
현대제철 관계자는 "지속가능한 성장과 글로벌 경쟁력 확보를 위해 다양한 방안을 검토하고 있으나 현재까지 결정된 사항은 없다"고 말했다.
정의선 회장, 트럼프 2.0 시대 완벽 대비
정의선 회장이 이 같은 결단을 내린 이유는 트럼프 당선인 입맛에 맞는 당근책을 제시해야만 세계 주요 자동차 시장 중 한 곳인 미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조업이 쇠락한 중부 러스트벨트 지역에서 절대적 지지를 받고 당선된 트럼프 당선인 입장에선 철강업을 하루빨리 부흥시켜야 한다. 때문에 일자리 창출, 대규모 제조업 설비 확보 등이 보장된 정 회장의 이번 직접 투자는 반가울 수밖에 없다.
정 회장이 단순히 트럼프의 눈치를 보고 10조원이라는 당근을 내민 것은 아니다. 현대제철은 이번 결정으로 트럼프 2기 최대 악재로 꼽히는 관세 문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확실한 이점이 있다. 트럼프 당선인은 수입품에 대해 10∼20% 수준의 관세 부과 등을 예고하며 글로벌 기업을 상대로 미국 내 투자를 요구하고 있다. 현대제철의 쇳물이 한국이 아닌 미국 내에서 생산되면 관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
앞서 일본제철의 실패 사례도 정 회장에게 반면교사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제철은 최근 미국 철강기업 US스틸을 인수하려다 정치권과 노동조합 등의 반대에 밀려 인수에 난항을 겪고 있다. US스틸은 과거 미국 제조업의 상징으로 불려왔던 곳이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를 국정 목표로 삼은 트럼프 당선인 역시 지난달 초 “US스틸의 일본 기업 매각을 완전히 반대한다”며 “세제 혜택과 관세로 미국 철강업을 다시 강하고 위대하게 만들 것이며 그 일은 빨리 일어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미국의 자존심인 US스틸을 일본에게 내줄 수 없다는 것이 골자다.
김진범 상상인증권 연구원은 “현대제철이 미국 철강 기지 진출로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며 “이러한 결정에는 지난 7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일본제철-US스틸 인수 불허 사태로 드러난 미국 정치권의 반감을 의식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또 “트럼프 2기 행정부 주요 에너지 정책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철강 공급망 안정성 확보가 필수적이며 최근 트럼프 당선인의 특정 항목 관세 인상 보도 당시 철강 역시 방산 공급망으로 포함될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