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찬 칼럼] 한강 신드롬과 문화 강국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문화현상이 바뀌고 있다. 서점가가 아연 활기를 띤다. 오랜 만에 책을 구매하거나 독서를 다시 시작하는 사람도 늘었다. 한강의 작품을 읽는 것을 계기로 다른 책도 읽게 됐거나 독서모임에 가입했다는 경우도 나타났다.
스마트폰이 제공하는 자극적인 짧은 영상물에 물들어 있는 현실을 비켜난 반가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지방자치단체도 “시민들이 책을 많이 읽고, 많이 구입하는 도시 그리고 작가에게 도움이 되는 도시로 만들어줬으면 좋겠다”는 한강 작가의 뜻을 수용해 의미 있는 결정을 했다.
광주광역시는 시민에게 매해 책 한 권을 구입할 수 있는 바우처(1인당 1만5000원씩)를 제공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아울러 광주를 ‘인문학의 도시’로 만들기 위해 공공도서관과 작은도서관을 활성화하기로 했다. 소설 <소년이 온다> 무대인 광주 중흥동에 ‘인문학 산책길’을 조성하고 북카페도 운영하기로 했다.
광주시는 당초 광주 출신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을 기념해 무등산 옛 신양파크호텔과 부지를 활용해 복합문화공간을 조성하려고 했다. 한강 작가가 부친인 소설가 한승원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딴 건물을 원하지 않는다고 알려오자 보류했다. 광주 시민이 한 권씩 책을 사면 매해 광주에서 150만권의 책이 팔리게 된다.
광주시교육청과 전라남도교육청도 나섰다. 11월에 ‘제1회 광주 독서교육 우수학교 공모’를 진행해 초·중·고교 15개 학교를 선정한다. 전남도립도서관에서는 50개 학교가 참여하는 ‘나도 작가 프로젝트 학생 책 출판 작품전시회’가 열린다.
그러나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탄생시킨 나라치곤 국민 독서 실태와 도서관 및 서점이 처한 현실이 초라하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 4월 발표한 ‘2023 국민 독서실태 조사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성인 가운데 일반도서를 한 권이라도 읽거나 들은 사람의 비율인 종합독서율은 43.0%에 불과했다.
9월말 대전의 대표적 향토서점 계룡문고가 29년 만에 문을 닫았다. 대전시는 올해에 이어 내년에도 지역서점 지원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 경기도 고양시 관내 작은도서관 5곳이 올해 폐관될 위기다.
대한민국은 자랑스러운 ‘한글 보유국’이다. 지구촌에는 3000여 민족이 7000개 언어를 쓰며 살아간다. 그런데 현재 인류가 쓰는 글자는 스물여덟 가지만 남아 있다. 그 가운데 누가, 언제, 어떻게, 왜 만들었는지가 확실한 글자는 한글뿐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펄 벅은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단순하면서도 훌륭한 글자라고 평가하며, 한글(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을 ‘한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비유했다. 세계적으로 한류가 인기를 끌면서 한글을 배우는 외국인이 늘고 있다. 우리가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을 원어로 읽는 뿌듯함을 느끼는 사이 해외에선 외국인들이 한강 작가의 한글 원서를 찾고 있다.
선진국은 경제력이나 정치외교력, 군사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문학과 출판 등 문화의 힘 도 강하다. 이런 점에서 크고 작은 도서관을 시민이 접근하기 편리한 곳에 두고 문화 활동 중심지로 삼는 지자체 행정력이 필요해 보인다. 한강 신드롬과 젊은 세대가 책을 읽는 것을 멋진 행위로 여기는 텍스트 힙(Text Hip) 트렌드가 맞물려 독서 붐이 지속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