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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2024-04-25 15:26 (목) 기사제보 구독신청
[인터뷰] 국내 유일 ‘3D 의수족’ 전문가 허준성 나만애실리콘하우스 대표
[인터뷰] 국내 유일 ‘3D 의수족’ 전문가 허준성 나만애실리콘하우스 대표
  • 강민경 기자
  • 승인 2020.02.02 17: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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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지게 짊어진 이들 일으켜주는 손과 발 되겠다"
허준성 대표.이원근
허준성 대표.<이원근>

[인사이트코리아=강민경 기자] 인간의 발전을 이끌어 온 테크놀로지에 인간에 대한 사랑을 더해 ‘휴먼테크놀로지’를 몸소 선보이는 벤처사업가가 있다. 허준성(47) 나만애실리콘하우스 대표는 국내 유일 ‘3D 의수족’ 제작자다. 의수족은 갑작스러운 사고나 작업 중 절단, 화상, 당뇨 합병증 등으로 신체 일부가 절단된 사람들을 위한 보조기구다. 허 대표는 기계·설비업계와 IT업계를 거쳐 2014년 의수족 제작 업계에 첫 발을 들였다.

스무 살 때 파병 병사로 갔던 소말리아에서 참혹한 현실을 목격한 것이 의수족을 만들게 된 배경이 됐다. 오른손을 잃은 여성을 아내로 맞으면서 그의 인생에서 의수족 제작은 숙명이 됐다. 아내를 위해 만드는 의수처럼 정성을 다해 만들어야 절단으로 상처받은 이들에게 작은 힘을 건넬 수 있다는 것이 허 대표의 생각이다.

허 대표가 개발한 ‘3D 의수족’은 고체 실리콘 재질에 3D 프린터 기술을 적용한 것이 핵심이다. 현재 국내 3개의 특허를 출원했고 해외 특허도 보유 중인 그는 국내 유일 3D 의수족 전문가다.

<인사이트코리아>는 지난 1월 10일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서울지사 사무실에서 허 대표를 만났다. 1시간가량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의 희로애락을 들었다. 아내와의 러브스토리를 얘기할 때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던 허 대표는 가장 기억에 남는 고객의 사연을 말할 땐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허 대표는 자신의 꿈 하나를 꽤 오랜 시간 강조했다. “무거운 지게를 지고 일어설 때 누군가 옆에서 손가락으로 엉덩이를 살짝만 들어 올려주면 지게를 진 사람이 쉽게 일어날 수 있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큰 도움이나 거창한 계획이 아닌 작은 도움으로 그들을 일으켜 세워주고 싶다.”


- 의수족 제작 업계에 어떻게 발을 들이게 됐나.

“얘기는 대략 2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3년에 UN 평화유지군으로 소말리아 파병을 갔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내전이 잦던 때였다. 소말리아에 가서 보니 폭격과 지뢰 때문에 다친 분들이 많았다. 특히 아기부터 성인까지 팔과 다리가 절단된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땐 ‘의수족’이라는 것도 생소할 때라, 부상을 입은 사람들은 나무 막대기를 짚고 다니곤 했다. 그때 그 참혹했던 기억이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었고, 세월이 많이 흘러 지금으로부터 6~7년 전 우연한 기회에 의수족 제작이란 것을 접하게 되면서 이 업계에 발을 들이게 됐다.”

- 최초의 동기는 이타심에서 비롯된 건가.

“그렇다. 물론 적성에도 맞았다.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있어서 무언가를 만들고 다듬는 것을 좋아했고 대학교에서도 기계·설계 관련 분야를 전공했다. 당시 신체가 절단된 소말리아 사람들을 보면서, 의수족 제작을 배운 적은 없었지만 뭐가 됐든 무언가를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 마음이 최근의 여건과 맞아 떨어지면서 시작하게 됐다.”

허준성 대표가 개발한 3D 의수족은 손가락의 주름과 각질까지도 표현이 가능하다.이원근
허준성 대표가 개발한 3D 의수족은 손가락의 주름과 각질까지도 표현이 가능하다.<이원근>

- 의수족 제작 기술은 어디서, 어떻게 배우게 됐나.

“우리나라에 의수족이 등장한 때는 6·25 전쟁 직후다. 신체 절단 부상자들이 크게 늘어나면서 우리나라에 도입됐는데 특히 부산역과 서울역 근처에서 의수족을 만드는 업체들이 생겨났다. 그땐 재료가 없었기 때문에 선진국에서 의수족을 만들다가 남은 재료들을 받아서 만들곤 했다. 우리나라 정부가 장애인들을 위한 복지나 환경에 신경을 쓰게 된 것도 불과 몇 년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우리나라의 의수족 기술 수준은 선진국인 미국·독일·영국 등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 세계적으로 의수족 제작 기술이 발달된 곳은 위 세 나라다. 그 중에서도 ‘Ottobock(오토복)’이라는 독일 기업이 있는데, 이 회사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매회 패럴림픽 기술 지원 후원사로 중요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다. 오토복은 주로 실리콘으로 의수족을 만드는데, 이 회사가 운영하는 아카데미에 지원해 그 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독일까지 가기엔 현실적으로 어려워 태국 방콕에 있는 아시아·태평양 본부에서 기술을 처음 접했다. 독일 오토복의 실리콘하우스 연수는 내가 국내 최초였고, 그 회사로부터 인증도 최초로 받았다.”

- ‘오토복’에서 배운 실리콘 의수족 제작 기술에 3D 프린터 기술을 적용시킨 배경은?

“실리콘 의수족 기술을 배워서 국내에 갖고 들어왔는데 문제가 있었다. 막상 해보니까 이 기술을 실제 사례에 적용하기가 꽤 까다로웠고 굉장히 어려웠다. 몇 달 동안 계속 혼자 연습 해봐도 원하는 정도의 성과가 나오질 않았다. 거기서 배웠던 것은 실리콘 재료를 손으로 하나하나 다듬어서 만드는 것이었다. 손기술만 좋으면 될 줄 알았는데, 여기서 필요한 것은 디자인 감각이었다. 의수족을 제작자가 직접 디자인해야 했는데, 디자인적 측면에서 내가 많이 약했다. 해결을 해보려고 미술 조소 전문 선생님께 배우기도 했는데 발전이 크게 없었다. 나름대로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는데도 되질 않으니 고민이 참 많았고 포기하려고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정말 문득 생각이 들더라. ‘최근 기술 트렌트가 3D 프린터인데, 이걸 여기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그 이후부터는 국내외 3D 프린터 전문가들을 만났다. 의수족 제작업계와 3D 프린터 업계는 동떨어져있는 분야였지만, 이 두 분야를 융합해보자는 생각이 들었고 그 방안을 모색했다.”

- 기술 융합에 성공했나.

“3D 프린터 기술을 배운 지 몇 달 후, 현재 특허등록이 돼있는 3가지 방법을 고안했고 금세 마무리 지었다. 이후엔 일사천리로 제작에 들어갔다. 완성된 ‘3D 의수족’ 제품을 가지고 다시 오토복 아시아·태평양 지사에 찾아갔다. 기술을 비교해보고 싶었다. 나를 가르쳤던 선생님께 보여주니 깜짝 놀라더라. 거기서 인정을 받으니 더욱 자신감이 들었다. ‘아, 이정도면 전 세계에 내놔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외에도 특허를 출원한 이후엔 국내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의수족 기술을 배우고, 여기에 3D 기술 적용에 성공한 이 스토리는 1년 남짓 동안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내 인생을 바꾸게 했다.”

- 전엔 무슨 일을 했나.

“1996년 대학 졸업 후 LG전자 연구소에서 근무했다. 당시 드럼세탁기 기술을 국내 1호로 개발한 팀에서 개발설계를 담당했다. LG전자에서 3~4년간 근무하다가 퇴직 후 IT 관련 회사를 차렸다. 의수족 업계에 발들이기 전까지 약 15년간 IT업계에 있었다. 지금껏 내가 해온 모든 이력들이 총집합된 것이 ‘3D 의수족’ 개발이다.”

- 1년 안에 2가지 기술을 각각 배워 이를 융합할 정도면, 어떤 기술이든 굉장히 빨리 습득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이전에 몸담았던 기술업계와 IT업계의 베이스가 있었던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성격’ 덕분이다. 한국 사람들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내 성격이 유독 좀 급한 편이다. 그러다보니 엄청나게 부지런하다는 장점도 있다. 다른 사람들이 퇴근해도 나는 밤을 새서 원하는 만큼의 업무를 진행해서 끝을 봐야 직성이 풀렸다. 그래서 남들보다 2배, 3배 빨리 배울 수 있었다. 의수족 제작을 가르쳐 준 선생님께선 ‘10년쯤 지나면 어느 정도 숙련될 것’이라고 하셨지만, 10년간 연습만 하고 있을 순 없었다. 지금도 개발할 것이 많은데, 나는 여전히 시간을 넉넉히 잡고 일하지 않는다. 기술에 대한 나 자신의 갈증도 있지만, 무엇보다 의수족이 필요한 절박한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기존 의족 제품(왼쪽)과 ‘3D 의족’을 비교 설명하고 있는 허준성 대표.이원근
기존 의족 제품(왼쪽)과 ‘3D 의족’을 비교 설명하고 있는 허준성 대표.<이원근>

- ‘3D 의수족’은 기존 제품과 어떤 차이점이 있나.

“기존 의수족의 주재료는 가죽과 고무·비닐(PVC)이었다. 지금도 대부분의 업체에선 이 2가지 재질로 만들고, 또 액체 실리콘으로 만들기도 한다. 액체 실리콘은 붕어빵 틀처럼 만들어진 틀에 액체를 부어 만드는 방식이다. 기성복처럼 정해진 디자인이 있기 때문에 본인의 손과는 다른, 정해진 틀 모양의 손을 착용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내가 개발한 ‘3D 의수족’은 고체 실리콘으로 제작된다. 100% 1 대 1 맞춤식인데, 고객의 오른손을 제작해야 하는 경우엔 왼손을 기반으로 디자인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 손톱의 때까지 만들 수 있다던데.

“맞다. 고체 실리콘을 이용해서 손톱의 때, 잔털, 주름, 핏줄 등을 만들 수 있다. 피부 톤도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맞출 수 있다. 예전엔 피부 톤을 정해진 컬러 차트 표에서 골라 만드는 방식이었는데, 이제는 본인의 피부 톤을 기계로 측정해 본인 피부 톤 그대로 만들 수 있다. 깨끗하고 예쁜 손을 만들 수도 있지만 본인의 손처럼 자연스러운 손, 자연스러운 발을 만드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 고체 실리콘으로 만든 의수족의 장점은 무엇인가.

“가죽으로 만든 의수족의 경우엔 땀이 차면 냄새가 나기도 하고 세균 번식이 잘된다. 또 PVC 재질은 처음 사용할 땐 말랑말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딱딱해져서 착용하기 불편하고 닿는 피부 면에 상처가 나기도 한다. 그러나 고체 실리콘은 성분 자체가 인체에 무해하고, 잘 늘어나니까 웬만해선 찢어질 우려가 없다. 방수가 되니 때가 타도 물에 씻으면 금세 새 것처럼 이용할 수 있다. 사고나 의외에 당뇨 합병증으로 신체가 절단된 분들도 있는데, 그 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상처가 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 상처가 추가 절단으로 이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 실리콘 의수족은 청결도 측면에서 탁월하다.”

- 우리나라 의수족 업계의 기술력은 어느 정도인가.

“기술력, 인력 등 전반적으로 선진국 대비 크게 낙후됐다. 동남아시아보다도 낮은 기술력이다. 나는 이 업계를 독점하길 원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의수족 업계의 전반적인 기술력이 높아지길 바란다. 그래서 사업을 시작한 이후 아카데미를 열어 기술을 다른 이들에게 가르쳐주고 전파하고 있다. 현재 부산·대구·안산 등에 지점을 운영하며 기술자들을 양성하고 있다. 단순한 영업소를 차려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보급하고자 한다. 태국 방콕에서 예전 나를 가르쳤던 선생님이 퇴직 후 이 기술을 다시 배우고 계신다. 그 곳에도 지사를 차려 동남아로 진출할 계획을 구상 중이다.”

- 손님-제작자 사이로 아내와 처음 만났다고 들었다. 러브스토리가 궁금하다.

“사업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어떤 여자 분이 문의를 해왔다. 어렸을 때 철길을 건너다 잘못돼 사고가 나면서 오른 손이 절단됐다고 했다. 기존 의수족을 착용해봤지만 너무 불편해서 한 번 착용한 이후로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번엔 한 번 만들어보고 싶다고 하더라. 그런데 문의를 하고 나서 추가 연락이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좀 지났다. 이후 그녀와 비슷한 장애를 가진 분들이 올 때면 그 분 생각이 났다. 그래서 처음엔 세일즈를 한다는 명목으로 연락을 했다. 그녀와 비슷한 사연을 가진 고객이 요청한 완성품이 나오면 사진을 찍어서 보냈다. 사실 이걸 꼭 팔아야겠다는 것이 아니었고, 그냥 잘 만들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몇 개월 후에 그 여자 분이 다시 연락을 해왔고 작업실로 직접 찾아왔다. 유독 그녀 제품의 완성도가 높았고 그녀도 매우 만족했다. 그렇게 여운이 계속 남아있을 무렵, 몇 달 후에 또 다시 연락이 왔다. 컴플레인 건이었다(웃음). 당시 기술이 초기 단계이다 보니 좀 미숙한 부분이 있어서 표면이 좀 벗겨졌더라. 보통의 경우엔 택배로 보내라고 했을 텐데, 당장 내가 가겠다고 했다. 그때 내가 경상남도 진주에 위치한 작업실에 있었는데 서울로 바로 올라갔다. 터미널 근처서 만난 그녀에게 새로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지금 사용 중인 것을 가져가서 수정작업을 하면 그 동안 그녀가 불편할 것 같았다. 그렇게 A/S를 하면서 몇 번 만나다가 서로 좋은 감정이 생겼고 지금의 내 아내가 됐다.”

허준성(왼쪽) 대표와 아내 문수지씨. 수지씨는 허 대표가 만든 의수를 착용하고 있다.허준성
허준성(왼쪽) 대표와 아내 문수지씨. 수지씨는 허 대표가 만든 의수를 착용하고 있다.<허준성>

- 프로포즈는 어떻게 했나.

“‘모델이 필요한데, 평생 내 모델이 되어달라’고 했다.”

- 아내의 조언이 큰 힘이 될 것 같다.

“실제 정말 내 모델이 되어주고 있다. 아내가 직접 제품을 착용해보고 말해주는 얘기가 정말 큰 도움이 된다. 또 몸이 불편한 이를 가족으로 둔 보호자들의 마음을 직접 느끼기에 매번 진심으로 고객을 대할 수 있다. 항상 아내의 손을 만든다는 마음으로 제품을 만들고 있다. 그러다보니 결과물의 완성도가 높아졌고 회사도 점점 안정돼가고 있다.”

- 이 업계서 일을 하면서 힘이 든 적은 없나?

“솔직히 힘은 지금도 든다. 처음엔 ‘이 기술을 가지고 해외로 봉사활동을 하러 가야지’라는 굉장히 거창한 계획이 있었다. 그땐 우리나라에 이렇게 절단 사고가 많고, 그로 인해 도움이 필요한 분들이 많이 계신 줄 미처 몰랐다. 우리나라가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지만, 아직도 위험에 노출 된 현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많다. 절단 사고가 정말 많이 발생한다. 갑자기 신체가 절단되는 일을 겪는 분들은 아픔보다 내 몸의 일부가 없어졌다는 상실감에 정말 힘들어한다. 스트레스를 굉장히 받는 그 분들의 어려움을 내가 해결해줘야 하는데, 밤새도록 작업을 해도 물량을 다 소화하질 못한다. 이 일을 시작한 이후 주말에 한 번도 제대로 쉰 적이 없다. 그런 게 참 힘이 든다. 몸이 힘든 것 보다 더 많은 분들께 빠르게 도움을 드리지 못해 마음이 힘들다.”

- 몸과 마음이 굉장히 고단하겠다.

“그렇다. 하지만 고객이 완성품을 착용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다치기 전처럼 자신감을 갖고 생활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면 다시 또 일 할 맛이 난다. 그 힘으로 이 일을 계속 하고 있다.”

- 매번 의미 있는 작업일 것 같은데,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이 있다면?

“한 분 한 분 다 사연이 있으신 분들인데, 그 중 한 모녀의 사연이 참 기억에 남는다. 어느 날 딸이 어머니를 모시고 왔다. 어머니의 한 쪽 발목이 절단된 상태였다. 이러한 발목 절단 사례는 의수족 제작 과정에서도 굉장히 까다롭다. 제작을 하더라도 의족이 벗겨져서 제대로 걷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그 분도 병원의 권유로 의족 제작을 해봤지만 착용이 힘들어서 이후 의족 제작은 포기한 채 휠체어 생활을 이어가고 계셨다. 그 때가 그 분이 부상을 당한 지 1년 정도 될 때였는데, 추석을 앞두고 고향에 가야한다고 하셨다. 고향엔 아직 부상을 당했다는 얘길 알리지 않아서, 한 쪽 발이 없는 채로 휠체어를 타고 가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 요청을 추석 일주일 전에 해 오셨는데 사실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보통 3D 의수족 제작에 한 달을 잡기 때문이었다. 힘들 것 같다고 했는데, 그 분 딸이 ‘추석 때 꼭 착용해야 한다. 우리 엄마 발 좀 만들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셔서 한 번 해보자는 마음에 여러 날 밤을 새며 만들었다. 결국 추석 하루 전날, 의족이 완성됐다. 만들자마자 경남 진주에서 서울까지 올라와 그 분 댁에 가져다 드렸고, 그 어머니께선 착용해 보시고 너무 좋아하셨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그 딸이 동영상을 보내주더라. 어머니가 길을 걷는 모습이 담겨있었다. 영상과 함께 ‘몇 달 만에 어머니를 모시고 미용실에 가고 있다. 덕분에 추석 때 고향에 가서 친척들을 뵐 수 있게 돼 고맙다’고 문자를 보내왔는데, 그 때 너무 감동적이었다.”

- 앞으로의 꿈은?

“내 인생은 처음부터 순탄하게 잘 된 것이 아니었다. 우여곡절이 많았다. 사실 너무 일이 안 풀리고 힘들 땐, 작업실에 있는 프레스 기계에 ‘내 손을 넣어버릴까’ 하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정도로 절박한 심정이 되니까 아이디어가 반짝 떠오르더라. 물에 어중간하게 빠졌으면 허우적대다가 더 힘들었을 텐데, 밑바닥을 쳐보니 박차고 올라갈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만나는 고객 분들께서 종종 지금 본인 인생이 바닥까지 추락했다고 말씀하신다. 그 분들께 바닥을 딛고 올라갈 수 있는 힘을 드리고 싶다. 옛날 어른들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 무거운 지게를 지고 일어설 때 누군가 옆에서 살짝만 엉덩이를 들어 올려주면 지게를 진 사람이 쉽게 일어날 수 있다고.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큰 도움이나 거창한 계획이 아니라 작은 도움으로 그들을 일으켜 세워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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