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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2024-03-28 19:16 (목) 기사제보 구독신청
한국인의 삶에 곰삭은 '김장의 추억'
한국인의 삶에 곰삭은 '김장의 추억'
  • 이만훈 기자
  • 승인 2018.11.30 19: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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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 하는 날 새벽부터 집은 동네 아낙들로 '북적'...김치는 우리의 몸 냄새이고 영혼

온 세상을 울긋불긋 물들여 뭇사람들을 산야로 유혹하더니 어느 결에 찬바람 맞고 벌거벗은 채 검은 갈색으로 하늘을 버티고 선 나무들이 전설처럼 아득하고 쓸쓸하다.

그 몹쓸 미세먼지 탓에 이따금씩 눈이 아리지만 겨울의 쨍한 명징(明澄)은 또 한 해의 마무리를 뚜렷이 명령한다.

이 때면 떠오르는 글귀가 있다. ‘추수동장(秋收冬藏)’-. 가을에 거두고 겨울에 갈무리한다는 뜻으로 <천자문>의 앞쪽(여섯 번째 구)에 나온다. 바로 앞에 나오는 ‘한래서왕(寒來暑徃·추위가 오니 더위가 간다)’와 이어 지며 울림을 주는 명구(名句)다. 뻔한 얘기 같지만 군더더기 없이 자연섭리의 속살을 이만큼 절실하니 전해주는 솜씨가 부러워 몇 번이고 되뇌어본다. 끝없이 유전(流轉)하는 세월의 모습이 ‘한래서왕’이라면 거기에 새겨진 DNA가 ‘추수동장’의 철리(哲理)일 테다.

#. 이 땅에 사는 우리는 매년 구동(九冬)을 살아내야 한다. 구동이란 겨울철 90일을 일컬음이니 이를 위해 예로부터 꼭 필요한 게 넉넉한 시량(柴糧·땔감과 식량)이었다.

요즘이야 아파트건 주택이건 각종 보일러 등 다양한 난방수단이 있지만 예전에는 장작이나 나뭇잎 등 오로지 나무나 풀 같은 식물성 연료밖에 없었으니 그 긴긴 겨울을 버텨내려면 미리 많은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땔감보다 더 중요한 건 역시 먹거리다. 여름내 농사를 지어 가을에 거두어들인 곡식을 넉넉하게 쟁여놓지 않으면 아무리 따듯한 방에서도 굶어죽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밥만 먹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필요한 게 부식(副食)이다. 부식하면 고기와 생선 등 동물성 식품도 필요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채소가 있어야 한다. 특히 겨울철 부족하기 쉬운 각종 비타민과 무기질 보충을 위해서. 요즘이야 온실이나 비닐하우스 재배를 통해 엄동설한에도 돈만 있으면 싱싱한 각종 채소를 얼마든지 사서 먹을 수 있지만 그런 기술문명이 없던 옛날에는 엄두를 낼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맥없이 앉아 있다가 죽을 수는 없는 법, 우리의 지혜로운 조상님들이 겨우살이를 위해 발명해낸 것이 있으니 채소를 오랫동안 저장·보관하는 김장이 바로 그것이다. 예로부터 김장을 ‘반식량(半食糧)’이라 하는 까닭이다. 김장은 주식에 곁들이는 먹거리로서 맛과 영양을 상승·보충해줄 뿐만 아니라 양적인 면에서도 단단히 한몫 해 양수겸장(兩手兼將)의 묘수였다.

맛의 교향곡 ‘김치’

#. 김장의 알파와 오메가는 김치다. 김치가 없으면 김장이란 말이 생겨나지도 않았다. 김장의 역사와 문화는 김치의 그것에 다름 아니다.

아다 시피 김치는 채소절임의 한 형태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기원 전 10~7세기의 문헌인 <시경(詩經)>에 오이를 이용한 절임음식인 ‘저(菹)’가 등장한다. 이 땅에선 늦어도 한사군(漢四郡)이 있던 기원 전 100년 무렵에는 ‘저’형태의 김치‘가 있었을 것이란 게 정설이다. 삼국지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과 <수서(隋書)> 등에 따르면 고구려와 백제, 신라 등의 먹거리 문화가 중국과 같다고 돼 있는 것으로 미뤄 우리 조상들도 이미 ‘저’를 먹었으리란 추정이 가능하다. 또 중국의 <제민요술(齊民要術)>에 나오는 오이, 박, 토란, 아욱, 무, 마늘, 파, 부추, 갓, 배추, 생강, 가지 등 채소를 즐겨먹었을 테니 이를 이용한 다양한 절임이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먹는 것과 같은 김치는 18세기 들어 고춧가루가 조미료로 사용되면서 등장했다. 그동안 소금과 후추, 천초(川椒)등으로 담그던 김치가 고추의 성분인 ‘캡사이신(capsaicin)’의 방부(防腐)효능 덕분에 저장성의 증가로 새로운 김장법이 정착하게 되면서 다양한 종류의 김치가 개발됐다.

#. 김치는 채소가 다섯 번 죽어서야 만들어지는 ‘명품’이다. 채소가 흙에서 뽑힐 때 한 번 죽고, 다듬느라 칼침(?)을 맞아 또 죽는다. 이어 소금국에 절임을 당해 세 번째 죽고, 버무릴 때 매운 고춧가루 세례를 받아 네 번째 죽는다. 그런가 하면 이제 고통스런 죽음의 터널이 끝나 김치의 모습을 갖추는가 싶은데 다시 한 번 독에 담긴 채 정말 땅에 묻혀 죽는다.

채소가 자기희생을 통해 환생한 것이 바로 김치이다. 김치 맛이 형언할 수 없는 오묘함을 지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치의 미학(美學)은 한마디로 발효다. 발효는 죽음의 다른 이름, 즉 특별한 죽음이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AlviToffler·1928~2016)는 <부의 미래>에서 “제1의 맛은 소금, 제2의 맛은 양념, 제3의 맛은 발효”라며 “세상은 서서히 발효의 시대로 옮겨 가고 있다”고 했다.

김치를 만들 때 중요한 재료는 배추와 고춧가루 외에 무형의 시간이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물은 시들고 사그라지고 썩는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부패의 시간성을 역이용해서 새로운 맛을 창조해낸 것이 발효음식의 지혜다.

김치의 맵고 짠맛은 발효과정에서 생기는 신맛으로 중화되고 융합되어 절묘한 맛의 화음을 빚어낸다. 따라서 김치의 맛은 샐러드와 같은 자연의 맛이나 수프와 같은 문명의 맛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제3의 새로운 미각이다. 자연과 문명이 조화를 이루고 융합했을 때 비로소 생성되는 ‘통합의 맛’이다.

음악을 제대로 감상할 줄 모르는 사람일수록 바이올린이나 피콜로의 고음만 듣고 저음 악기 소리는 듣지 못하는 것처럼 김치를 처음 먹어 보는 사람은 맵고 짠 것밖에는 식별하지 못한다. 한국김치는 여러 맛이 서로 겹치고 한데 엉켜 조화를 이루는 데 맛의 큰 특성이 있다.

김치는 재료에서도 들·산·바다·하늘에서 나는 것까지 모든 공간을 한데 섞는다. 그래서 어떤 이는 김치를 두고 제각기 다른 색채·모양·맛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면서 화성(和聲)을 자아내는 ‘맛의 교향곡’이라 했다.

익산 미륵사 터에서 김장독 토기 유적 나와

#. 우리나라에서 김장은 언제부터 이뤄졌나? 한반도의 계절적 특성상 채소가 부족한 겨울철에 대비해 김장을 했을 것이란 점과 이를 보관하는 방법으로 땅에 묻는 토장(土藏)이 오래 전부터 지속돼왔을 것은 분명하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김치와 관련된 유적은 서기 600년 경 창건된 전북 익산 미륵사 터에서 출토된 높이 1m 이상의 대형 토기들로 승려들의 거처에서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돼 있는 점으로 미뤄 겨우살이에 대비한 김장독으로 사용됐을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또 신라 성덕왕 19년(720) 세워진 법주사 경내에 있는 큰 돌독(石甕)은 3000여명의 승려들이 먹을 김칫독으로 사용됐다는 전설도 있어 김장문화가 오래됐음을 증언하고 있다.

김장의 풍습을 엿볼 수 있는 글은 고려 중기의 대학자요 문신이었던 이규보(李奎報·1168~1241)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실린 ‘가포육영(家圃六詠)’이 가장 앞선다. “무에 장을 곁들이면 한여름에 먹기 좋고(得醬尤宜三夏食)/소금에 절여 겨울에 대비한다(漬鹽堪備九冬支)”는 내용인데, 제철 무를 저장해 두고 겨울을 나는 풍속을 얘기하고 있다.

고려 말의 문인 권근(權近·1352∼1409)은 <양촌집(陽村集)> 10권의 ‘김장(蓄菜)’이라는 시에서 “시월엔 바람 높고 새벽엔 서리 내려(十月風高肅曉霜)/울안에 가꾼 채소 다 거두어 들였네(園中蔬菜盡收藏)/맛있게 김장 담가 겨울철 궁핍을 대비하니(須將旨蓄禦冬乏)/진수성찬 없어도 날마다 먹을 수 있네(未有珍羞供日嘗)”(이하 후략)라고 읊조렸다.

또 <산림경제>에 기록된 ‘김치 담그는 법’에는 김칫독을 묻는 풍속이 나와 당시 김장 풍속이 있었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고, 비슷한 시기에 기록된 <동국세시기>에도 “서울 풍속에 무, 배추, 마늘, 고추, 소금 등으로 김장독에 김장을 담근다”고 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동국세시기의 10월 조에는 “봄의 장담기와 겨울의 김장담그기는 인가(人家)의 일 년의 중요한 계획”이라고 했다.

오늘날의 ‘김장’이란 말의 유래로는 ‘침장고(沈藏庫)’가 가장 유력한 것으로 여겨진다. ‘침장고’는 조선 초기 궁중의 제사와 각 전(殿)에서 소요되는 채소의 재배와 공급을 관장하던 관청으로 김장 역시 담당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서 ‘침장’이 ‘딤장→짐장→김장’의 변화를 통해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는 ‘침채(沈菜)’의 옛날식 표현인 ‘딤ㅣ’가 ‘짐채’ ‘김채’ 등을 거쳐 ‘김치’로 정착한 것이라는 논리를 따른 것이다. 왕실에서 관아를 만들어 직접 손을 보게 했을 정도로 김장이 중요 업무(?)였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괜찮은 며느리’ 되려면 열두 종류 담궈야?

#. 김장은 2013년 유네스코에 의해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선정됐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김장을 두고 ‘문화’니 뭐니들 하지만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이 땅의 아낙네들한테는 이맘때면 치러야 하는 ‘고역(苦役)’이었다.

‘괜찮은 며느리’란 소리를 들으려면 김치를 적어도 열두 가지는 담글 줄 알아야 하는데다 집집마다 자식들이 치렁치렁 대여섯은 기본이라 먹새가 클 대로 커서 김장을 담그는 배추김치만 200~300포기는 거뜬히 넘었으니 말해 무엇 하리오.

하지만 식구들의 입맛과 건강을 위해 기꺼이 감내해야 하는 ‘신성한 의식’이기도 했기에 허리가 휘는 줄도 모르고 정성을 다해 김장을 담가왔다. 김장은 그 중요성만큼이나 많은 품이 들어가는 작업이다. 준비부터 마무리까지 숱하게 손을 타는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김치가 그렇듯이 김장 역시 ‘시간의 예술’이다. 맛있게 담그려면 제대로 된 재료가 있어야 하고, 그런 김장거리를 준비하기 위해선 그만한 정성과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김장은 원래 찬바람이 불고 영하의 날씨가 될 때 담그는 법이다. 너무 추우면 작업하기가 힘들 뿐만 아니라 재료가 어는 등 손상을 입어 맛을 버릴 우려가 크고, 그렇다고 작업하기 좋다고 따듯한 날에 하면 너무 빨리 익어 겨우내 ‘신 것’을 먹어야 하는 곤욕을 치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칫 잘못해 공든 탑이 무너지는 낭패를 보지 않기 위해 옛날엔 김장을 담글 때도 ‘손 없는 날’로 택일을 하기도 했는데, 대개 입동(立冬)을 즈음해 눈이 오기 시작한다는 소설(小雪)사이를 적기로 여겼다. 양력으로 치면 대략 11월 7, 8일부터 22, 23일 사이다.

이를 감안해 배추와 무를 수확해야 하는데 밭에서 뽑아 집까지 옮겨 다듬고, 닦고, 절이고 하는 작업을 고려하면 적어도 네댓새는 접어야 했다. 하지만 그 이전이라도 날씨가 영하로 뚝 떨어지면 미리 뽑아 얼지 않도록 해야 한다. 급할 경우 밭에 고랑을 판 뒤 무는 바로, 배추는 거꾸로 세워 흙이 포기 틈에 들지 않도록 한 다음 흙을 적당한 두께로 덮어주기도 했다.

이에 앞서, 배추는 찬이슬이 내리면 속이 차오르기 시작하는데 지푸라기로 싸매주어 통이 잘 앉도록 해줘야 했다. 김장배추와 무는 입추를 전후로 파종해 100일 쯤 키워야 제대로 된 ‘거리’를 수확할 수 있다. 특히 배추는 파종시기가 늦어 생장기간이 열흘만 모자라도 속이 허푸숭한 게 영 부실해 소를 넣어 담그는 포기김치거리로는 젬병이다.

#. 이윽고 김장 날이 잡히면 사나흘 전부터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엄니의 진두지휘(오래 전엔 할머니가 사령관이셨다)에 따라 저마다 맡은 역할을 해야 했다. 물론 우리 형제들도 동원되곤 했지만 그야말론 거들 손 봉죽에 지나지 않았다. 손에 칼을 한 자루씩 잡고 배추며, 무며 허접한 것들을 떼어내고, 깎아내고 깔끔하게 다듬었다. 그러면서도 배춧잎 하나, 무 하나 허투루 다루는 법이 없었다. 쉽게 하려는 생각에 혹 거무튀튀한 부분을 깎아버리다간 어김없이 불호령을 맞았다. 여름내 금이야 옥이야 키운 놈을 함부로 낭비할 수없는 게 농심이니까.

한쪽에선 연신 다듬질이 끝난 놈들을 옮겨 쌓고, 다른 쪽에선 계속 나오는 쓰레기를 재깍재깍 두엄자리로 나르느라 땀을 흘렸다. 무를 다듬는 쪽에선 떡잎을 떼어내고 예쁜 청만을 골라 칡덩굴로 엮어댔는데, 이처럼 시래기 타래미를 만드는 일은 늘 솜씨 좋은 남자들 몫이었다. 워낙 양이 많다보니 정작 김장날이 아닌데도 벌써부터 친척들이 찾아와 거들어도 언제나 어둑어둑 해서야 대충 끝낼 수 있었다. 친척이나 이웃의 수가 적을 때는 이틀씩 걸리기도 했다.

다듬기를 마치면 다음날 바로 배추를 절였다. 드럼통과 함지박, 다라하며 독, 중두리 등 큰 그릇들이 총동원됐다. 물론 우리 것만으론 부족해 늘 이웃집 그릇들까지 빌려 쓰곤 했다.

배추는 대부분 반으로 가르지만 때론 아주 포기가 큰 놈의 경우 네 쪽을 내 소금물에 담갔다. 배추를 쪼갤 때도 검도 시범하듯 칼로 양단하는 것이 아니라 배추의 엉덩이에 칼집을 낸 뒤 두 손으로 벌려 빠개는 게 법이었다. 소금물은 대개 물 열 말에 소금 한 말을 풀어썼는데 배추가 뻐센 정도에 따라 물의 양을 일고여덟 말로 조정해 농도를 맞추었다. 하지만 소금이 완전히 녹지 않아 간이 밑으로 처지는 탓에 하루가 지나면 반쯤 절여진 배추를 꺼낸 다음 위 아래로 위치를 바꿔 다시 통에 잠기도록 했다.

절이는 데 걸리는 시간은 소금물의 농도가 진할수록 짧게 소요되는데, 엄니는 눈을 감고도 작업의 진도에 맞게 적당히 조절하는 데 도사(?)이셨다. 이틀 동안 소금국에 잠겨 알맞게 낭창거릴 정도로 숨이 죽으면 절여진 놈들을 건져내 맑은 물에 헹궈내야 한다. 조반 전에 죄다 건진 뒤 소쿠리마다 담아 물기를 뺀 다음 아침을 먹자마자 물가로 옮겨야 하니 그야말로 물방개 헤엄치듯 바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집이 언덕 위에 있어 30미터쯤 아래에 있는 우물가에서 하면 좋으련만 작업량이 너무 많은 탓에 거기서는 비좁아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없이 800여 미터 떨어진 개울 신세를 지곤 했는데 손수레에 가득 때려 실어도 대여섯 번은 족히 날라야 했다. 흐르는 개울물에 헹궈 소금기를 뺀 다음 다시 집으로 나르는 것은 고역 중 상고역이었다. 얼추 물기를 뺐다고는 해도 아직 젖은 배추를 가득 싣고 비탈길을 거슬러 안마당까지 끌고 가야 했으니 말이다. 더구나 이날은 무도 깨끗이 닦아 날라야 했으니 이래저래 여럿의 등골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뿐이랴. 저녁을 먹고 나서도 밤이 이슥하도록 일이 이어졌다. 한 쪽에선 마늘과 생(생강)껍질을 까고, 또 한 쪽에선 무를 가지고 채와 깍두기를 썰었다. 행여나 손이라도 다칠세라 등잔불에 의존하던 평소와 달리 이날만큼은 대여섯 배나 밝은 남폿불을 켜곤 했다. 날이 밝는 대로 김장을 담그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동네마다 돌아가며 김치 품앗이

#. 김장을 담그는 일은 네 남 할 것 없이 어느 집 혼자서는 할 수없는 ‘대역사(?)’였다. 동네마다 순서껏 돌아가며 품앗이 방식으로 서로서로 손을 모아 치렀다.

드디어 그날. 아직 먼동이 트기 전인데도 온 식구가 분주하게 돌아친다. 조금 있으면 들이닥칠(?) 김장두레패 아낙들을 맞이할 준비 때문이다. 양쪽으로 마주 보고 앉아 김칫소를 넣을 수 있도록 기다란 널판을 깔아놓고, 군데군데 짚방석도 마련해 둔다. 김장 때 가장 필요한 건 큰 그릇이라 양푼(대·중·소가 있다)과 양철함지, ‘바께쓰(양동이)’ ‘다라’는 물론 자배기, 방구리, 소래기 등도 넉넉하게 마련해둔다. 깨끗이 비운 드럼통들엔 우물물을 길어다 그득 그득 채워둔다.

조반을 뜨는 둥 마는 둥 하는 사이 아침 햇살이 퍼지는가 싶은데 대문 밖이 왁자지껄 하더니 벌써 선수(?)들이 집안으로 들어선다. 말이 이웃이지 동네가 우리 성씨 밭이라 다 일가붙이인 까닭에 항렬에 따른 인사를 앞세운다. “할머니” “아주머니” “형님” 등등. 인원은 매해 8~10명 정도. 햇살이 갓 퍼지기 시작한 터라 수건을 쓰고 ‘쉐타’를 입었어도 선뜻한 건 어쩔 수 없다. 서둘러 생철화덕에 불을 지핀다. 부엌에선 아까부터 가마솥에서 물이 끓으며 뿜어대는 수증기가 연기보다 짙게 온기를 마당으로 실어 나른다. 이내 엄니가 어찌어찌 해달라고 주문하고, 그에 따라 선수들이 자리를 잡고 일을 시작한다.

우선 간밤에 썰어둔 무채에 마늘과 생을 다져넣고 고춧가루로 버무려 김칫소를 만든다. 지레 먹을 김치엔 밀가루 풀(찹쌀 풀보다 시원하다)을 쓰기도 하지만 오래(이듬해 5월까지)두고 먹을 김치는 그냥 맨 것으로 한다. 소가 만들어지자마자 앞에 놓인 배추포기를 당겨서는 이파리를 들춰가며 솔기마다 넣는 듯 바르는 듯 현란한 손놀림이 눈부실 정도다. 어루만지듯 뚝딱뚝딱 한 포기씩 속이 채워지면 금세 커다란 양푼이 하나 가득 작품들의 차지가 된다. 찬바람에 때론 버무린 양념이 살얼음이 잡혀 서걱거리고, 볼따구니마저 시려오지만 재게 놀리는 손들은 미처 곱을 새가 없이 연신 절인 배추들을 김치로 환생시킨다. 이따금씩 누군가 쏟아내는 입담에 깔깔거리느라 지루할 틈이 없고, 한 구석에서 끓이는 구수한 동태찌개 냄새가 안마당을 진하게 물들일라치면 산더미 같던 ‘일감’이 어느새 절반나마 줄어있다. 그야말로 시작이 반이다.

때마침 마루에서 깍두기와 ‘막김치(섞박지)’를 담당한 조(組)가 두 손을 올리며 “만세”를 외친다. 맡은 일을 다 끝냈다는 신호다. 그건 동시에 밥 때라는 선언이기도 하다. 김장점심은 특별하다. 국물을 넉넉하게 잡아 아침부터 국거리를 품은 채 설설 끓으면서 알맞게 단 배추된장국을 훌훌 마시면 한데서 일하느라 언 몸이 스르르 풀리고, 얼마 전 찧어온 햅쌀로 지은 이밥에 갓 무쳐낸 겉절이를 한 오리 척 얹혀 먹노라면 진수성찬이 따로 없다. 거기에다 바다 것이긴 하지만 ‘남의 살’이 들어간 동태찌개의 구수할 대로 구수해진 진국하며, 더 이상의 손맛을 불허하는 고수가 버무려낸 얼근한 김칫소를 노오란 배추고갱이에 싸서 먹는 속대쌈은 어떻고?

어느새 해가 서산마루에 꼴딱꼴딱하니 돌연 스산한 바람이 안마당을 휘젓는데 아침나절 그득했던 자리가 휑하다. 모두 부리나케 서두른 덕분이다. 배추통김치만 네 접에 다 막김치, 깍두기, 달랭이, 짠무김치, 동치미까지 실로 어마무시한 양이어서 당일치기로 김장을 마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김장을 품앗이로 한다 해도 정작 당일에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애초 잡았던 것보다 사람 수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러면 동치미와 짠무김치 같이 상대적으로 손이 덜 타는 것은 뒤로 돌려 나중에 엄니 혼자 담그시는 게 보통이었다.

일을 마친 선수들이 제 집으로 돌아가면 이내 낀 동네마다 저녁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김치움을 둘러보고 나온 엄니가 그제야 허리를 펴신다. 며칠 밤을 새는 통에 푸석푸석해진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를 흘리시면서-.

아삭아삭 씹히는 황홀한 추억

#. 한국인에게 김치는 단순한 반찬 이상의 그 무엇이다. 그건 맛을 내기 위해 시간을 필요로 하는 김치의 본성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함께 하며 한국인의 삶속에 곰삭아 아예 우리의 몸 냄새가 되고 영혼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설사 다른 반찬이 없더라도 김치만 있으면 밥을 먹지만 임금님의 수라상을 차려줘도 김치가 빠지면 숟가락이 절로 떨어지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야드르르한 쌀밥에 잘 익은 김장김치 한 조각을 올려 후후 불면서 입안에 넣으면 구수한 단맛이 아삭아삭 씹히는 황홀경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다. 또 출출할 때 삼겹살이라도 한 점 구워 신 김치와 포갠 뒤 손바닥만 한 상추에 싸 볼이 터져라 우겨넣어 보라. 정말,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른다. 게다가 소주라도 한 잔 곁들인다면 뭐…. 어디 그뿐인가. 국수에 김치가 없으면 무슨 맛이고, 심지어 찐 고구마를 먹을 때 배추김치 잎사귀와 시원한 동치미국물이 없으면 입맛이 데데하고 목이 메어 어찌 넘길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떡이라도 한 덩이 있는 날엔 아예 ‘김칫국 동나는 날’이었다.

김치는 긴긴 겨울밤 간식으로도 그만이었다. 사흘들이 쌓인 눈으로 마을이 숨을 죽이는 밤이면 집채만 한 부엉이 울음이 슬픈 줄도 모른 채 방안에선 화롯가 전설이 이어지고, 자식 걱정, 시국타령에 목이 컬컬해진 ‘애비’가 헛기침을 하면 ‘에미’는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 동치미 무를 길이로 쭉쭉 쪼갠 다음 국물과 함께 방구리에 담아 대령한다. 초저녁에 곯아떨어졌던 아들놈까지 눈을 비비며 일어나 식구들이 돌아가며 무 한 번 베어 먹고 국물 한 번 마신다.

동치미 대신 배추김치를 주전부리할 때는 배추 머리 부분만 쓱 잘라버린 뒤 썰지 않은 채 그릇에 담아놓고는 한 잎 한 잎 길이로 찢은 다음 손에 높이 들고 고개를 젖혀 이파리 끝부터 혓바닥에 둘레둘레 서려가며 먹었다. 누가 누가 잘 하나 내기라도 하듯 서로 쳐다보며 먹노라면 웃음이 절로 터지곤 했다. 배추김치를 다 먹고 나면 엄지와 집게손가락에 묻은 김칫국물을 쪽쪽대며 빨아먹는 익살도 빼놓지 않았다. 가난했던 시절이지만 그 겨울의 흥취가 못내 그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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