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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2024-03-28 19:16 (목) 기사제보 구독신청
견우와 직녀의 사랑, 엄니가 부치시던 누름적의 기억
견우와 직녀의 사랑, 엄니가 부치시던 누름적의 기억
  • 이만훈 기자
  • 승인 2018.08.31 19: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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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월 칠석에 담긴 아름다운 이야기와 아련한 추억

참, 알 수가 없다, 자연의 신비를-. 이 땅의 뭇 생명들을 태워 없애버릴 듯했던 맹렬더위가 말복(末伏)을 고비로 급히 고개를 떨구는 듯 하더니 그예 태풍을 보내 한바탕 나라를 들었다 놨다 하고선 고꾸라지다니 말이다. 특히 올해는 월복(越伏)이라 한참은 더 갈 줄 알았는데…. 하기야 입추가 지난 지도 제법 됐고, 음력으로도 칠월이니 오동잎이 지지 않아도 이미 가을이 아니랴.

매년 칠월이 되면 늘 기억의 저편에 잠겨있던 한 가지가 새삼 떠올려지곤 하는데, 바로 칠월 칠석(七夕)이다. 칠석은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낯설기조차 하겠지만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땅 곳곳에서 다양한 풍속과 함께 치러지던 어엿한 명절이었다. 그런데 로미오와 줄리엣만큼이나 가슴 저미는 러브스토리로 출발하는 칠석날의 ‘역사’가 있음에도 ‘밸런타인데이’인가 뭔가는 챙기면서 칠석날은 있는지 조차 모르니, 원. 양풍(洋風)만 좇는다고 매양 탓할 수도 없고 그저 갑갑할 따름이다. 저네들한테 우리 문화를 제대로 물려주지 못한 어른들, 아니 내 탓이 크다.

#. 어릴 적 칠석이 가까이 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나뿐 아니라 또래 조무래기들은 다 그랬다. 심지어 어른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정월 대보름을 쇠고는 봄이 다가고 여름도 시들어갈 때까지 특별한 행사가 없기 때문이었다. 특별 행사가 없다는 건 ‘특별히 먹을 것’이 생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4월 초파일이라고 해도 할머니께서 동네 절 행사에 가셨다가 몇 조각 절 떡을 얻어 오시는 게 고작이고, 5월 단오 역시 동네 여인들 그네뛰기만 있을 뿐이었으니…. 그런데 칠석날은 달랐다. 이날은 기름에 지져 부치는 누름적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이 견우(牽牛)와 직녀(織女) 덕분이라는 건 절대로 잊는 법이 없었다. 비가 오면 이들의 상봉이 이뤄져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알았고, 맑으면 그대로 밤하늘을 뒤져 견우와 직녀를 찾곤 했으니까.

발렌타인데이보다 애틋한 ‘천상의 드라마’

#. 어떤 시인에게는 칠월이 ‘청포(靑袍)를 입은 손님’을 기다리는 희망 부푸는 달이지만, 원래 이 땅의 민초들에게 칠월은 아주 오래된, 애틋하기 그지없는 로망스의 기억이다. 그것은 칠월 칠일 날 벌어지는 ‘천상의 드라마’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옥황상제가 다스리는 하늘나라 궁전의 은하수 건너에 견우란 부지런한 목동이 살고 있었다. 옥황상제는 견우가 부지런한데다 착하기도 해 손녀인 직녀와 혼인을 시켰다. 그런데 혼인을 한 뒤 둘의 금슬이 너무 좋은 나머지 견우는 농사일을 게을리 하고, 직녀는 베 짜는 일을 게을리 했다. 그러자 하늘나라의 살림이 엉망진창 되면서 혼란에 빠져 사람들이 천재와 기근으로 고통을 받게 됐다. 이에 옥황상제가 크게 노했고, 결국 두 사람을 은하수의 양쪽에 각각 떨어져 살게 했다. 견우와 직녀는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서로 애만 태울 수밖에 없었다. 이들 부부의 안타까운 사연을 알게 된 지상의 까마귀와 까치들이 해마다 칠월 칠일이 되면 이들이 만날 수 있도록 하늘로 올라가 다리를 놓아주었다. 바로 오작교(烏鵲橋)다.’

견우와 직녀는 매년 이날이 되면 오작교를 건너 서로 그리던 임을 만나 일 년 동안 쌓였던 회포를 풀고 다시 헤어져야 한다. 칠석 다음날 까마귀와 까치의 머리를 보면 모두 벗겨져 있는데 그것은 오작교를 놓기 위해 머리에 돌을 이고 다녔기 때문이라 한다.

칠석날 전후에는 부슬비가 내리는 일이 많다. 바로 ‘칠석우(七夕雨)’인데, 견우와 직녀가 서로 타 고 갈 수레 준비를 하느라고 먼지 앉은 수레를 씻기 때문이라며 이 비를 ‘수레 씻는 비’, 즉 세차우(洗車雨)라고도 했다. 또 이 날 오는 비는 그들이 너무 기뻐서 흘리는 눈물이라고 하며, 그 이튿날 아침에 오는 비는 이별의 눈물이라고 해 ‘눈물 흘리는 비’, 곧 쇄루우(灑淚雨)라고도 한다고 했다.

#. 견우와 직녀의 얘기는 천문학상 독수리별자리(鷲星座)의 알타이어(Altair)별과 거문고별자리(琴星座)의 베가(Wega)별이 은하수의 동쪽과 서쪽의 둑에 위치하고 있는 데서 유래한다. 알타이어별이 견우성(牽牛星)이고 베가별이 직녀성(織女星)인데 이 두 별은 태양 황도상(黃道上) 운행할 때 가을 초저녁에는 서쪽 하늘에 보이고, 겨울에는 태양과 함께 낮에 떠 있으며, 봄날 초저녁에는 동쪽 하늘에 나타나고, 칠석 무렵이면 천장 부근에서 보이게 되므로 마치 일 년에 한 번씩 만나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견우성과 직녀성이 일 년에 한 번씩 마주치게 되는 천문 현상은 중국의 주(周)나라 때부터 인식하고 있었으며, 한(漢)나라에 이르러서 칠석 설화가 형성되고 여러 가지 풍속이 발전했다.

이 설화의 발생 시기는 불확실하나, 중국 후한(後漢) 때 조성된 효당산(孝堂山)의 석실 속 화상석(畫像石)의 삼족오도(三足烏圖)에 직녀성과 견우성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전한(前漢) 이전으로 소급될 수 있다. 곧 춘추전국시대에 천문 관측을 통해 은하수가 발견됐으며, ‘시경(詩經)’ ‘소아(小雅)’ ‘대동(大東)’에 설화의 연원으로 추정되는 시구가 있다. 후한(25~220년) 말경에는 견우와 직녀 두 별이 인격화하면서 설화로 꾸며졌다.

견우와 직녀에 대한 본격적인 얘기는 중국 전한(前漢)의 회남왕 유안(劉安)이 저술한 ‘회남자(淮南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육조(六朝, 265~589년) 시대에 이르러 ‘직녀가 은하수를 건너 견우를 만난다’라는 초기 형태의 전설로 발전했다. 이 설화의 가장 오랜 것은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서 발견되는데 비교적 이른 시기에 짜임새 있게 자세히 전하는 책은 5세기 무렵 한대(漢代)의 괴담을 모아 기록한 ‘재해기(齋諧記)’이다.

춘향과 이몽룡도 ‘오작교’서 만나

#. 칠석날은 이처럼 남녀 간의 정담이 담긴 명절인 까닭에 옛날부터 남녀 상사(相思)나 애정을 주제로 한 시·설화도 관련된 것이 상당히 많다.

주(周)나라 왕자 교(喬)가 봉황곡(鳳凰曲)을 울리며 신선이 돼 도사(道士) 부구공(浮丘公)의 부인과 만났다는 날이 바로 칠석이고, 서왕모(西王母)가 자운거(紫雲車)를 타고 전상(殿上)에 내려와 장수(長壽)를 원하는 한무제(漢武帝)에게 요지 선도(瑤池仙桃)를 올린 날 역시 칠석이다. 

또 잘 알다시피 우리나라 ‘춘향전’에서 춘향과 이 도령의 가약을 맺어주던 광한루(廣寒樓)의 다리가 오작교다. 오작교는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바로 그 다리다.

뿐만 아니라 ‘춘향전’에는 춘향과 이몽룡이 초야에 서로 화답하는 장면에서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동정칠백 월하초의/ 무산같이 높은 사랑/…/영평 바다 그물같이/ 얽히고 맺힌 사랑/ 은하직녀 침금같이/ 올올이 이은 사랑…”이라고 너스레를 떠는데, 여기에서도 올올이 이어져 떨어지지 않는 사랑을 다짐(?)하면서 직녀를 등장시키고 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칠석날의 정조(情調)를 잘 드러내고, 가슴 찡하게 하는 것은 당대의 시인 백거이(白居易·772~846)가 당명황(唐明皇)과 천하일색 양귀비(楊貴妃)의 사랑을 엮은 ‘장한가(長恨歌)’의 대목이다.

“헤어질 즈음 은근히 다시 말하셨죠(臨別慇懃重寄詞)/ 그 말에는 두 사람만 아는 맹세가 있었고요(詞中有誓兩心知)/ 칠석날 화청궁 장생전에서(七月七夕長生殿)/ 인적 없는 깊은 밤 남몰래 하신 말씀 말이에요(夜半無人私語時)/ 하늘에서는 원컨대 비익조가 되고(在天願作比翼鳥)/ 땅에서는 원컨대 연리지가 되자고요(在地願爲連理枝)/ 장구한 하늘과 땅도 다할 때가 있겠지만(天長地久有時盡)/ 저의 이 한은 면면히 이어져 끊길 날이 있으리오(此限綿綿無絶期).”

장한가의 끝부분에 나오는 그 유명한 ‘양귀비의 회고’ 대목인데, 바로 칠석날밤 두 사람이 남몰래 주고받은 사랑의 맹세가 아름답다 못해 도리어 처절할 정도다. 비익조(比翼鳥)는 암수의 눈과 날개가 하나씩이라 짝을 짓지 않으면 날지 못한다는 전설상의 새이고, 연리지(連理枝)는 서로 다른 나무의 가지가 서로 맞닿아 하나로 이어진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나무의 가지가 연결된 것이 연리지인데 아예 뿌리나 둥치가 이어진 것도 있어 각각 연리근(連理根), 연리목(連理木)이라고 한다. 2004년 고구려벽화고분을 취재하러 방북했을 때 동명왕릉 주변에서 낙락장송의 연리지를 보았는데 2m는 더 높아 보이는 곳에 어른팔뚝보다 굵은 가지가 2m쯤 사이를 두고 선 두 그루의 소나무를 하나로 연결하고 있는 모습이 퍽이나 인상 깊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또한 연리근은 내가 사는 일산 정발산(鼎鉢山) 등산로 초입에 있어 하루에 한 두 번씩은 꼭 보고 있다. 비록 자연현상이라고는 하지만 이름만 들어도 사랑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함은 무엇 때문일까? 단지 먹물 탓인가?

북두칠성에 대한 믿음이 칠성신앙으로

#. 그런데, 사실 우리가 명절로 쇤 칠석날은 견우·직녀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칠석날은 북두칠성을 신성시하는 칠성신앙(七星信仰)에 바탕을 둔 명절이기 때문이다. 칠성신앙은 칠석날 북두칠성을 바라보면서 칠성신(七星神)에게 장수(長壽)와 복(福)을 비는 민간신앙이자 풍속이다. 북두칠성 바라보기라고도 한다. 칠성신은 비와 수명과 재물을 관장한다는 신이다. 북두칠성이 인간의 길흉화복을 주관하는 것으로 여기고 칠원성군(七元星君)으로 모시는 도교의 영향을 받았다.

조상님들이 북두칠성을 특별히 여긴 것은 하늘의 중심인 자미원(紫微垣·옥황상제의 궁전)에 자리 잡고 있는 데다 하늘을 관찰하고 때를 살피는 이로운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북극성과 북두칠성을 이용하여 계절과 시간을 알아내는 원리는 이미 우리 인류 문명의 시작과 함께 사용된 과학적 방법이다. 국자모양의 북두칠성은 한 시간이 경과할 때마다 북극성을 중심으로 시계 반대 방향으로 15도씩 회전한다. 또 북두칠성의 자루가 동쪽을 가리키면 천하는 모두 봄철이고, 남쪽을 가리키면 여름이며, 서쪽을 가리키면 가을, 북쪽을 가리키면 겨울이다. 당시 북두칠성은 지금과는 달리 북극점에 근접해 있어 밤새 지평선으로 떨어지지 않아 하늘을 관찰하고 때를 살피는 나침반과 시계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러니 1년 어느 때라도 볼 수 있는 북두칠성이 곧 하늘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겼을 테고, 이런 믿음이 점차 신앙으로 까지 발전한 것이다. 일찍이 상나라 갑골문에도 북두칠성에 제사(䃾祭)를 지낸 기록(丁比斗:丁일에 斗에 䃾祭를 지낼까요?)이 많을 정도다.

그런데 앞에서 보았듯이 견우성과 직녀성이 하늘의 천장에 나타나는 때가 바로 칠월칠일, 곧 칠석이 아니던가? ‘칠석(七夕)’과 ‘칠성(七星)’이 서로 비슷하게 들리는데다 둘 다 별과 관련이 있다 보니 양쪽이 관계가 깊다고 생각해 이것저것 엮어 여러 가지 신앙 행위와 풍속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절에 칠성각이 생기고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칠석재(七夕齋)가 행해지게 된 것도 같은 이치다.

#. 견우와 직녀 전설은 1976년 평안남도 남포시 덕흥동에서 발굴된 고구려고분벽화(408년)에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견우와 개를 데리고 있는 직녀의 그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찍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함께 칠성신앙 역시 도교의 전래와 함께 삼국시대 초기 전해졌을 것으로 보이는데, 기록상으론 고려시대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권2 ‘노무편(老巫篇)’에 칠원성군(七元星君)을 모셨다는 내용에서 처음 나타난다. 이 칠성신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기능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태일초(太一醮)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후 민간에서 칠석 무렵 비를 주관하는 신으로 전승돼왔던 것으로 보인다.

칠석과 관련해서는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왕후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회임을 빌기 위해 이 날 궁중에서 왕후와 함께 견우·직녀성에 제사를 지내고 백관들에게 보너스를 주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궁중에서 잔치를 베풀고 성균관 유생들에게 절일제(節日製)의 과거를 실시하는 등 중요 명절로 여겼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따르면 서당에서는 학동들에게 견우·직녀를 시제(詩題)로 시를 짓게 했는가 하면 옷과 책을 햇볕에 말리는 폭의(曝衣)와 폭서(曝書) 풍속도 있었다. 또 집안에 따라 절에 찾아가 칠성각(七星閣)에 치성을 드리거나 무당을 찾아가 칠성맞이 굿을 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여인네들은 이 날 별을 보며 바느질 솜씨가 좋아지기를 빌었다. 바로 걸교(乞巧)다. 이미 중국 한나라 때 궁중이나 민가에서 부인들이 칠석에 바느질감과 과일을 마당에 차려놓고 바느질 솜씨가 있게 해 달라며 지낸 걸교제(乞巧祭)의 풍속이 당나라 때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다. 당시 일본에도 전해져 오늘날까지 ‘다나바다마쯔리(棚機祭)’로 이어지고 있다.

이 날 각 가정에서는 주부가 밀전병과 햇과일 등 제물을 차려놓고 고사를 지내거나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놓고 가족의 무병장수와 평안을 빌었는데, 우리 집도 그랬다. 망백(望百)을 훌쩍 넘기신 노모께서 고방열쇠를 놓고 은퇴를 하실 때까지 그랬다.

엄니는 바쁘게 누름적을 부치시고…

#. 늘 그랬지만 엄니는 칠석날도 바쁘셨다. 엄니는 신 새벽부터 밭머리 풀숲 광을 뒤져 애호박을 한 소쿠리 넉넉하게 딴 뒤, 되짚어 집으로 오는 길에 적당히 약이 오른 고추며, 너울너울 보기 좋게 자란 부추도 챙겨서는 집에 도착하기 무섭게 우물로 가져가 담가놓으셨다. 동산 밑에 자리 잡은 집에서 200여m쯤 아래에 있던 우물은 왕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솟아 겨울에는 따뜻한 반면 여름에는 손이 저릴 정도여서 냉장고가 없던 시절 채소며 과일, 김치 등을 저장하는데 그만이었다.

조반(朝飯)이 끝나기 무섭게 할머니께서는 윗동네에 있는 절로 빌러 가시고, 엄니는 새벽 참에 챙겨둔 호박 등을 건져 깨끔히 손질하시고는 이어 소당질을 준비하셨다. 여름철 내내 부엌 대신 한데서 화덕에 밥을 지어 먹기는 했지만, 소당질을 위해서는 별도의 장치가 필요했다. 소당질이란 무쇠솥뚜껑을 뒤집어 칠성님께 올리는 누름적(우리는 밀전병을 그렇게 불렀다)을 부치는 일이라 앉은 자세로 일을 하려면 적당한 높이의 임시 아궁이가 필요했다.

무릎높이 맞춤으로 적당한 돌 세 덩이를 세모꼴로 평평하게 늘어놓은 뒤 작은 솥뚜껑을 뒤집어 올리면 준비 끝이었다. 소당질용 임시 아궁이는 늘 그렇듯이 뒤꼍에 차려졌다. 오래 묵은 철쭉나무 밑 둔덕에 성주단지가 있고, 그 밑에 장독대가 자리한 옆으로 열 길(?)쯤 되는 감나무와의 사이가 바로 그 자리였다. 엄니는 커다란 양푼에 묽게 푼 밀가루 풀죽을 가득 채워 놓고, 그 옆에는 정갈하게 다듬은 부추다발과 알맞게 썬 고추오라기를 놓아두시곤 이내 아궁이에 불을 붙이셨다.

바짝 마른 소나무 장작에 불이 붙어 솥뚜껑이 달아오르기 시작하면 솔잎으로 들기름을 두른 뒤 호박꼭지로 얇게 문질러 펴면서 열기를 가늠하셨다. 웬만큼 됐다싶으면 국자로 밀가루 풀을 떠서 지글거리는 기름위에 얇게 펴는 순간, 솥뚜껑 위에선 갑자기 양철지붕에 소나기 쏟아지는 소리가 시끄러운 가운데 울 밖까지 진동하는 고소한 내음 속에 노릇노릇한 누름적이 고운 자태를 들어내게 마련이었다. 한 장을 부치는데 고작 몇 초도 안 걸렸다. 엄니 손속이 잰 것도 있지만 누름적은 얇아야 대접을 받는 탓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잠깐이라도 딴 생각을 하거나 어~하다보면 금세 타버리고 마니…원! 가뜩이나 아직 더위가 남아있는데다 불까지 피워대니 비 오듯 쏟아지는 땀에다 연기에 찔려 찔끔거리는 눈물까지 범벅이지만 엄니는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한 채 연신 신공(神功)을 발휘하시곤 했다. 아무 것도 안 집어넣은 소적(素炙·맨 누름적)은 고사용(告祀用)이라 먼저 부치고, 이어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고추적, 그리고 맨 나중에 나머지 식구들 몫인 부추적을 부치셨다. 예전엔 부치개 하나 만드는데도 이렇게 법도가 있었다. 식구가 많은데다 명절음식은 이웃에 도르는 법이어서 대충 광주리로 하나 가득 채우고서야 엄니는 허리를 펴실 수가 있었다.

#. 작품(?)을 만드시는 게 엄니 몫이라면 이 작품을 가지고 칠성님께 비는 것은 할머니의 사명이요, 권한이었다. 칠성님은 용왕님과도 통하는 대표적인 ‘수신(水神)’이라 제일 먼저 우물에 치성을 드리는 게 이날 고사의 포인트였다. 엄니께서 빚으신 누름적 중에서도 기중 잘 생긴 놈으로 세 장을 골라 깨끗이 닦은 목판에 담은 뒤 소반에 받쳐 들고 우물에 가져다놓고는 할머니의 거룩한 비손이 시작된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칠성님께 비나이다. 일월성신 하지후토 제천제불 팔금강님께 비나이다”로 시작되는 할머니의 축원은 서울 사는 큰댁 식구들을 포함해 우리 식구들 모두한테 베풀어지곤 했다. 할머니께선 당신의 자손들을 일일이 한 명씩 불러대며 모두가 무탈하고 잘 되길 빌고 또 비셨다. 마치 손바닥이 닳아 없어지길 바라시기나 하는 것처럼.

언문도 못 깨쳐 일자무식이었지만 어디서 배우셨는지 제법 그럴싸한 주문을 외우시며 연신 손을 비비고 허리를 숙여 기도하시는 그 모습은, 이 세상 무엇에도 비길 데 없는 강낭꽃 보다 붉은 종교 그 자체였다. 평생 농사일로 거칠 대로 거칠어진 손과 손 사이에서 나는 “서걱서걱” 소리가, 무엇엔가 목이 메어 반쯤 잠긴 듯 갈라진 목소리와 섞여 우물물 위에 묘한 파문을 일으키던 할머니의 영검스런 존영(尊影)이 지금도 생생하다.

우물에 이어 성주에, 그리고 장독대 위 정화수(井華水·우물에서 길어온 물이다!)에, 부엌 조왕(竈王)과 뒷간 신(廁神)에게 까지 이어지는 할머니의 치성이 끝나야 누름적을 먹을 수 있었으니 어린 마음에는 꽤나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한 조각 입에 넣었는가 싶기 무섭게 형, 동생과 함께 건너 마을까지 누름적을 도르느라 정신이 없다보면 어느새 날이 어둑해지곤 했다.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논두렁을 타고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며 젖빛으로 흐르는 은하수 사이에서 견우와 직녀를 찾고, 손가락으로 북두칠성을 따라 그려보던 그 시절이 그립기만 하다.

인사이트코리아, INSIGHT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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