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의 후예 ‘거란제국’, 동아시아 패자로 우뚝 서다
선비의 후예 ‘거란제국’, 동아시아 패자로 우뚝 서다
  • 김석동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
  • 승인 2018.07.02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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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말기 세력 키워…알타이산맥 동부-헤를렌강 북부까지 영토확장
발해 상경용천부

 

거란의 건국과 팽창

동호의 후예인 선비는 156년 영걸 단석괴(檀石槐)가 등장해 거대한 유목제국을 건설하였으나, 그의 사후 급격히 약화됐다. 이후 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가비능(軻比能)마저 229년 사망하자 선비족은 와해돼 모용, 탁발, 우문, 단 등 6개 부족으로 분열됐다.

거란은 이중 우문 가문의 후예로, 대흥안령산맥 동쪽과 랴오허강 서쪽 그리고 시라무렌강 북쪽에 펼쳐진 평원에 살았다. 거란은 오랫동안 동쪽의 고구려와 서쪽의 돌궐 양대 세력 사이에 끼여 세력을 키워 나갈 수 없었다. 고구려 멸망 후에는 동돌궐과 당나라로부터 압박을 받았다.

당나라 말기에 본격 세력을 키운 거란은 걸출한 영웅 야율아보기가 등장해 부족을 통합하고 916년 키타이국을 출범시켰다. 우리는 거란(契丹:계단)이라 부르나, 그들은 키단(Khitan) 또는 키타이(Khitai)라 이름 했다. 이후 태종 시대에 나라 이름을 대요(大遼)라 바꿨다. 홍콩에 근거를 둔 항공사 케세이 퍼시픽(Cathay Pacific)의 ‘케세이’는 ‘키타이’에서 왔고 이는 중국이란 의미인데, 당시 세력을 떨쳤던 거란이 서양에는 중국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거란이 건국되는 시점은 중국에서는 907년 당나라가 멸망하고 960년 송나라가 건국되기 전의 오대십국(五代十國)시대다. 유목세계를 통일하고 중원을 차지하려는 야심가 야율아보기는 916년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영토 확장 전쟁에 나선 거란은 924년 몽골대초원으로 진군하여 알타이산맥 동부에서 헤를렌강 북부 초원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이후 남은 돌궐세력과 티베트를 정복해 유목세계를 장악했다.

야율아보기는 926년 발해를 정복하고 장남 야율배를 왕으로 삼아 동란국(東丹國:동쪽에 있는 거란국 이란 뜻)을 세웠으나 돌아오는 귀국길에 병사했다. 이어 등장한 차남 야율덕광(태종)은 936년 오대십국시대 후당에서 석경당이 일으킨 반란을 지원하면서 낙양까지 점령하여 후당을 멸망시키고 후진을 세우게 했다. 이 대가로 거란은 만리장성 이남의 부유한 땅이자 중국 왕조의 수도로 연결되는 전략적 요충지인 오늘날 베이징 일대의 연운(燕雲)16주를 얻게 돼 제국의 기반을 확고히 다졌다. 이후에도 정복전쟁을 계속해 탕구트, 토욕혼, 북송 등에 차례로 쳐들어가 대제국을 건설했다.

국호도 스스로 대거란국으로 칭하고, 동경(요양부)·상경(임황부)·중경(대정부) ·남경(석진부)·서경(대동부) 등 5경을 두었다. 거란은 태평양 연안에서 알타이산맥까지, 만리장성에서 헤를렌강 북부에 이르는 광대한 땅을 차지했고, 몽골계 유목민과 여진족, 발해유민 등 다양한 민족을 통합하여 대제국을 세웠다.

11세기말 거란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거란 통치하에 있던 여진이 아골타를 중심으로 금나라를 세우고 송과 연합해서 거란에 대항했다. 아골타의 금나라는 거란의 오경을 차례로 함락하고 1115년 야율연회(천조제)를 붙잡아 거란의 역사는 210년 만에 막을 내렸다.

금나라에 의해 거란제국이 멸망하자 거란인들은 야율대석의 지휘로 중앙아시아로 진출해 1131년경 카라키타이(Qara Kitai)를 건국하고 야율대석이 칸에 즉위했다. 이 나라가 중국에서 서요(西遼)라고 불리는 나라다. 이들은 서투르키스탄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1141년 셀주크제국을 격파하고 사마르칸트까지 진격해 동․서투르키스탄을 다 차지해 버렸다. 그러나 1218년 칭기스칸의 몽골에 망했다.

<몽골 교과서의 거란제국 : 몽골의 역사, 강톨가외>

 

거란시대의 국제 정세

거란의 발흥 과정은 이전의 흉노·선비·돌궐 등 북방유목국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먼저 걸출한 지도자가 나타나고, 이어 부족을 통합하며, 다음은 몽골고원을 차지하고, 최종적으로 중국왕조와 쟁패했다. 거란과 같은 북방민족이 중국을 통치한 것은 북위·요·금·원·청 등 다섯 왕조로, 진·한나라 이래 중국 역사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10세기 동아시아는 격동의 무대였다. 북방민족국가-한민족국가-중국왕조가 격돌하는 시기가 다시 도래했다. 중국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와 융성한 문화를 자랑하면서 300년 가까이 지속된 당제국이 사라지고, 오대십국을 거쳐 송나라가 나타났다(960년). 북방에서는 신흥세력인 거란이 유목세계를 통일하고 발해를 멸망시켰다(928년). 한반도에서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고구려를 계승하여 국호를 고려라 정하고(918년) 북진정책을 추진했다.

7세기 북방민족-한민족-중국왕조는 돌궐-고구려-당의 삼각구도였으나, 당나라(618~907년)가 돌궐과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동아시아를 평정했다. 그러나 8세기에는 후돌궐과 후고구려(발해)가 다시 등장하여 당과의 삼각구도가 이어졌다. 9세기에는 거란이 세력을 키움에 따라 당나라는 발해(698~926)와 거란이라는 양쪽의 적대세력과 대치하게 됐다. 10세기에 이르러 다시 거란-고려-송의 삼국구도가 재연됐다.

이처럼 북방민족-한민족-중국왕조 간에는 시대별로 여러 국가가 등장해 상호 교류-협력-투쟁하면서 역사를 이어갔다.

거란과 고려의 전쟁

거란·고려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고, 중국은 송나라에 의해 통일 됐다. 만주지역에 있던 말갈족은 여진이라 불렸는데, 북만주지역은 동여진, 압록강하류지역은 서여진이 각각 차지했다. 여진이 차지한 압록강 하구는 송나라, 거란, 고려 삼국사이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송나라는 거란을 공격하나 실패했고(986-989년), 고구려는 송의 참전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991년 거란은 서여진을 정복하고 압록강 하류를 차지했다.

거란은 송과의 전쟁을 지속하는 한편 발해 멸망 후 발해 왕족이 압록강의 서경압록부에 세운 정안국과 여진 세력을 제압하여 고려와 압록강을 사이에 둔 접경국가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거란은 송나라 정복을 위해 고려를 견제하여 송-고려의 관계를 단절 시키는 전략을 택했고, 이것이 고려 침략으로 연결됐다.

고려 성종 12년(993년) 거란은 동경유수 소손녕의 지휘로 고려를 침략했고, 거란이 봉산군을 점령하자 고려 조정에서는 ‘항복론’과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자는 ‘할지론’을 논의하였다. 할지론으로 의견이 기울어진 조정회의에서 중군사 서희(942~998년)는 우선 항전해보고 여의치 않으면 협상하자는 대안을 제시했다. 서희에 이어 어사 이지백도 할지론에 반대하자 성종은 서희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결단을 내렸다. 이에 서희는 홀로 협상을 위해 적진에 가겠음을 성종에게 청했다.

우여곡절 끝에 서희와 소손녕은 역사적인 협상을 벌였다. 대국으로서 대접을 받겠다고 주장하는 소손녕에게 서희는 한 치의 양보 없이 벼랑 끝 전술로 대응해 대등한 대화의 장을 만들었다. 소손녕의 논지는 첫째, 고려는 신라를 이어 받았고 거란은 고구려 땅을 소유하고 있는데 왜 고려가 고구려의 땅을 침식하고 있느냐는 것이었고 둘째, 거란이 고려와 접경하는 국가인데도 통교하지 않고 왜 바다 건너 송나라와 교류 하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서희는 첫째,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 고구려 옛 수도인 평양에 서경을 두고 있고, 거란의 동경(요양)도 원래 고려의 땅이다. 둘째, 압록강 양안이 고려 땅이지만 여진이 가운데 있어 거란과 교류가 어렵다고 대응했다. 이 외교담판 결과 고려는 전쟁을 피했음은 물론 여진정벌을 핑계로 280리에 달하는 강동 6주를 얻어 고려 국경을 압록강까지 확대했다. 거란의 고려 침략 목적은 고려 정벌이라기 보다 고려와 송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이었으므로 이러한 협상이 이루어진 것이다.

 

고려가 송과의 관계를 지속하자 거란 성종은 1010년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제2차 고려 침략에 나섰다. 거란은 고려 목종을 폐위한 ‘강조의 난’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는 구실로 침략했으나, 송나라와의 교류를 재차단하고 전략 요충지인 강동6주를 다시 찾는 것이 목표였다. 개전 초 거란군에 의해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이 피난하는 등 거란군은 승승장구 하였으나, 멀리 원정 중인 거란군의 병참 문제 등으로 전쟁이 지지부진해지자 현종의 친조를 조건으로 회군했다.

거란은 그 후 고려가 약속과는 달리 현종이 친조를 거부하고 강동6주도 돌려주지 않은 상황에서 1013년 고려가 거란과 단교하고 송나라와 교류를 재개하자 제3차 고려 침략을 단행했다. 1018년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군사에 맞서 상원수 강감찬, 부원수 강민첨의 20만 고려군은 홍화진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어 개경 공격에 실패하고 퇴각하는 10만 거란군을 귀주에서 공격하여 불과 수천 명만이 살아 돌아가게 한 ‘귀주대첩’으로 고려·거란 전쟁은 막을 내리고, 이후 양국의 국교가 회복돼 교류가 재개되었다.

거란과 한민족 역사

거란은 한민족 역사에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앞서 선비와 한민족 역사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동호는 만주지역 고조선(신조선)의 후예다. 이 동호가 선비와 오환으로 나누어졌으니 선비 또한 고조선의 후예다. 또 선비부족 중 우문씨 가문이 거란을 건국하였으므로 거란 또한 고조선의 후예인 것이다.

거란의 요나라 역사를 기록한 정사가 원나라 때 기록된 ‘요사(遼史)’다. 여기에 한민족과 관련된 특별한 기록이 있다. 요사 지리지인 권38의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지금의 요녕성 요양)에 대한 기록이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동경요양부는 본래 조선 땅이다(여기서 조선은 물론 고조선을 의미한다. 고조선의 존재와 영역에 관한 기록이다). ②조선은 40여대를 전해 내려왔다(傳四十餘世, 단군은 신화가 아닌 역사이며, 단군은 한 사람이 아니고 왕조의 수장으로 이어져왔음을 말해준다). ③연나라 사람 위만이 옛 공지에서 왕이 되었다(이는 위만의 땅이 동경(요동)지역으로 고조선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④한무제가 조선을 평정하고 한사군을 설치했다(이는 요동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한사군이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⑤요나라 동경이 고구려 수도인 평양이다(고구려의 수도가 현재의 평양지역이라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명백히 다른 기록이다).

이러한 기록들은 북방기마민족 거란 역시 한민족과 고대로부터 깊은 관계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앞으로 북방민족과 한민족간의 관계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에 의해 역사적 실체가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한편, 고려 태조 왕건은 거란을 극도로 적대시 했다. 우선 ‘고려사절요’를 보면 942년 거란 태종이 고려와의 화친을 위해 사신 30명과 공물로 낙타 50필을 보내왔다. 왕건은 사신들은 섬으로 귀양을 보내고 낙타는 개경의 만부교 아래 묶어서 굶겨 죽였다. 이로써 양국의 외교관계는 단절되었다.

동아시아의 대국으로 등장하는 거란에 대해 왕건과 같은 국가 대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노련한 정치가가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반응한 배경은 무엇일까? 태조 왕건은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킨 무도한 나라라 하여 거란에 대해 강경노선을 지속했다. 다음해 몸소 지은 훈요십조 중 4조에서 “거란은 금수의 나라이므로 풍속과 말이 다르니 의관 제도를 본받지 말라”고 하고 있을 정도다.

왕건은 발해는 친척의 나라라고 했다. 발해가 멸망하자 발해 마지막 왕 대인선의 세자 대광현에게 왕씨 성을 하사하고 왕족에 편입시켜 벼슬을 주었고, 10만 명에 달하는 발해 유민도 받아들였다. 그러면 이 ‘친척의 나라’는 무슨 뜻일까? ‘자치통감’은 “발해와 고려는 친척이나 혼인한 사이”라고 했다. 그 뜻을 보기 위해 발해의 족보기록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북방사학자인 전원철 박사에 의하면 발해의 건국자인 대조영과 그 동생이자 발해 제2왕가 시조인 대야발의 가문에 그 비밀이 있다 한다. 대야발의 4대손은 금행이라는 인물인데, 우리 역사서에 ‘서해용왕’이라고도 기록되고 있다. 이 금행에게 세 아들과 딸이 있는데, 그 딸의 사위가 작제건이며 그 손자가 왕건이다. 따라서 왕건은 발해 왕가와 인척으로 연결된다. 이것이 왕건의 거란에 대한 정책과 대응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는 것이다.

앞서 본대로 거란 또한 선비의 후손으로 고조선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고조선의 역사는 부여에 이어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시대로 이어지고, 다시 발해-통일신라의 남북국시대, 그리고 북방정책을 추진하는 고려-고조선 후예 거란(요)·여진(금)·몽골(원)의 시대로 역사의 고리가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김석동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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