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 이어 북중국 장악한 동호의 기마군단 '선비'
흉노 이어 북중국 장악한 동호의 기마군단 '선비'
  • 김석동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
  • 승인 2018.04.30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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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고원·바이칼호·만주·오르도스 일대 장악한 북아시아 패자

 

선비족 기원과 화북 제패한 화려한 등장
몽골고원을 근거로 거대국가를 이루었던 흉노에 이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기마유목민족이 선비(鮮卑, Xianbei)족이다. 선비족은 몽골-퉁구스계로 추정되는 유목민족으로 몽골고원 동부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일어나 몽골고원과 만주의 경계에 있는 대흥안령 산(일명 선비산)에서 목축과 수렵으로 생활했다.

시라무렌강은 내몽골 홍산문화지역의 중심인 적봉시 북부에서 발원하는 강이다. 중국 사서는 흉노를 ‘호(胡)’, 그 동쪽의 북방민족은 ‘동호(東胡)’라 불렀다. 대흥안령북부의 선비산에 근거한 ‘선비’와 대흥안령남단의 오환산에 근거한 ‘오환’으로 나누어졌기 때문에 선비는 동호의 후예다.

후한서 오환선비열전은 “오환은 본래 동호다. 한나라 초기에 흉노 묵특이 동호를 멸망시키자 남은 무리들이 오환산을 지키며 산 이름을 명칭으로 삼았다. 오환사람들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재주가 능하였으며 새와 짐승 사냥을 주업으로 삼았다. 물과 풀을 따라 다니며 방목하였고 일정한 장소에 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또 “선비는 역시 동호의 일부인데, 따로 선비산에 의탁하여 선비라 불렀다. 선비의 습속은 오환과 같다”라고도 했다.

선비족은 1세기 초부터 흉노의 지배를 받았으나, 156년 단석괴(檀石槐)란 걸출한 지도자가 나타나 부족을 통합하고 흉노의 옛 땅을 차지하여 거대국가를 건설했다. 흉노가 남·북 흉노로 분열하면서 약화되는 틈을 타 후한과 연합해 북흉노를 공격하고, 북흉노가 서쪽으로 이동하는 사이에 몽골고원을 차지해 북아시아의 패자가 됐다. 선비는 동호의 남쪽 일파인 오환까지 통합해 몽골고원-바이칼호-만주-오르도스지역 일대를 장악하면서 최대 영토가 490만㎢에 달하는 거대 세력을 형성했다.

강성해진 선비는 중국(후한)을 침략하는 등 힘을 과시했지만 단석괴 사후 세력이 약화되었고, 이어 등장한 지도자 가비능(軻比能) 마저 죽자 다시 분열돼 내몽골에서 할거했다. 이후 3세기 중반에는 대릉하 유역의 모용부, 시라무렌강 유역의 우문부, 그 남쪽의 단부, 내몽골 현 호화호특시 방면의 탁발부 등이 두각을 나타냈다(모용부는 4세기에서 5세기 초에 걸쳐 연나라를 세웠고, 탁발부는 386년 북위를 건국해 중국의 남북조시대를 열었다. 916년 거란을 건국한 우문부는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후에 요나라가 됐다).

후한 멸망 후 삼국시대를 거쳐 280년 진(晉)이 중국을 통일했으나 ‘팔왕(八王)의 난’으로 혼란을 겪는 가운데 북방 기마민족인 흉노·선비·갈·저·강 5개 민족이 남하하여 화북지방에 각기 정권을 세웠다. 이것이 중국 역사에서 ‘오호십육국 시대’(304~439)로, 북방의 이민족인 오호(五胡)와 한족이 세운 16개 나라가 135년 동안 흥망을 거듭했다.
북방민족 오호(五胡)는 다음과 같이 중국북방지역에서 활약했다.

①흉노 분열 후 내몽골지역에 있던 남흉노는 북쪽 선비세력의 압력으로 황허강의 오르도스지역으로 남하하였다가 만리장성 내 중국영역에 자리 잡았다. 남흉노의 직계 후손인 유연(劉淵)은 외척이 한나라 출신이어서 한나라 후예라는 명분으로 오호족 최초 정권인 한(漢․前趙)을 건국했다(304년).

유연의 아들 유총(劉聰)은 ‘중국의 아틸라’로 불리는데, 진나라 낙양을 점령하고 장안으로 쳐들어가 인구의 절반을 학살한 인물이다. 당시 북중국을 장악한 흉노세력을 피해서 양자강 이남으로 피난 간 중국왕조가 동진이다.

②전조의 유총 사후 흉노의 다른 계통으로 갈족인 석륵이 후조(後趙)를 세우고 전조를 멸망시켰으나 불과 20년 만에 선비족 모용씨에게 정복당했다(352년).

③선비족 탁발씨 부족은 내몽골 호화호특을 근거로 하다 만리장성 아래로 남하해 산서북부에 자리 잡고 시조 역미의 손자 의여가 대국(代國)을 세웠다(310년).

선비족 모용씨 부족은 현재의 요녕성 창려를 근거로 만주남부 요동과 요서지역을 장악하고 모용 황이 연국(燕國:전연, 후연, 서연, 남연)의 기초를 다졌다(337~438년).

④티베트계 저족은 감숙남부와 사천북부 산지에 근거하다가 부홍이 장안을 수도로 섬서지역에 전진을 건국했다. 그 후 국가기반을 확고히 한 부견이 모용의 지배지역을 모두 제압하고 북중국을 장악했으나 후대에 모용씨에 다시 자리를 내주었다(350~394년).

⑤또 다른 티베트계 강족의 요장은 감숙성을 본거지로 하다가 부견 사후 모용씨가 장악했다가 떠난 장안을 점거하여 후진을 세웠다(386~417년).

이처럼 왕국의 난립이 지속되던 대 혼란기는 선비족 탁발부에 의해 다시 통일됐다. 탁발부의 역사는 역미에서 출발해 손자 의여가 대국(代國)을 세웠고, 5대손 십익건이 부족통합과 국가정비를 이루었는데, 십익건의 손자가 태조 도무제 탁발규다. 386년 즉위한 탁발규는 모용의 후연을 정복하고 위(북위)를 건국하였다.

탁발규는 주위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오르도스에서 몽골 남부를 세력 하에 두면서 후연과 맞섰다. 439년 3대 세조 태무제(탁발도)가 화북을 통일하여 거대한 탁발왕국을 건설해 남쪽 중국 왕조(송)와 남북조시대를 열었다. 탁발사-도-준-홍-굉-각으로 이어져온 선비족 탁발왕조는 그러나 북방민족의 기풍을 잃으면서 문약해졌고, 동·서로 분열되었다가 마침내 550~556년 북제 및 북주에 나라를 빼앗겼다.

이후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여 수나라를 건국한 양견(문제)은 북주(北周)의 외척이자 군사귀족이어서 선비족의 후예라 하겠으며, 수에 이어 당을 건국한 당 고조 이연도 마찬가지로 선비족 출신의 무장이었다.
 
선비족 국가들과 한민족이 만난 역사의 현장

선비의 벨트 버클, 3-4세기. 프랑스 국립동양미술관
선비의 벨트 버클, 3-4세기. <프랑스 국립동양미술관>

중국의 전국 7웅 중 패자인 연나라(오호 16국 시대 모용부의 연과 다름)는 BC 300년경 진개를 앞세워 동호를 공격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바로 이 동호가 고조선 중 만주지역을 다스리던 ‘신조선’이라 했다.

이후 중국은 진나라가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한나라가 이어 받으면서 BC 200년 한 고조가 흉노정벌에 나섰으나 기마군단 흉노에 참패하고 오히려 흉노에 조공하게 됐다. 이런 와중에 한나라의 변방국이 된 연에서 고조선 계열 인물로 알려진 위만이 고조선 일부(불조선)지역을 점령하여 위만조선정권을 세웠으나(BC 194), 한과의 전쟁 끝에 역사에서 사라졌다.

영토 확장에 나선 고구려는 선비 모용부의 연나라와 대치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고국원왕 때 연왕 모용황의 침공(342)으로 심대한 타격을 입는 등 이들은 후연 시대까지 고구려 서북방 팽창정책에 최대의 걸림돌이었다. 그러나 불세출의 영웅 광개토대왕은 후연의 수차례 공격을 격퇴시키고 대강국 고구려의 기틀을 공고히 했다.

광개토대왕은 오호십육국시대로 불리는 북중국의 혼란 상황을 적절히 이용해 국력을 최대한 신장시키는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북위가 통일을 이루고 군사강국으로 등장하자 장수왕은 남북조 등거리 외교로 고구려를 안정시켰다.

고구려는 이후 선비족이 건설한 수, 당과도 국운을 걸고 싸웠다. 수 문제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부국강병을 추진했으나, 고구려 침략전쟁으로 국력을 소진시키는 바람에 결국 실패했다. 598년 문제가 고구려 침략에 실패하자, 양제는 전왕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113만 대군으로 침공했으나 살수에서 참패하고 평양으로 진공한 4만 명 수군은 몰살되었다. 613년과 614년에 양제는 각각 2차, 3차 고구려 침략전쟁을 일으켰으나 또 다시 실패했다. 수나라는 결국 37년 만에 문을 닫았다.

당 태종 역시 북방산서지역 한족과 선비족 혼합혈통의 귀족집안출신이다. 이는 당 또한 민족융합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북방민족이 중원에 진출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건국되었음을 말해준다. 이연의 아들 이세민은 태종으로 즉위한 후 중원을 통일하였으나 두 번에 걸친 고구려 정복에는 실패했다. 그 후 3대 고종이 신라와 연합하여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안동도호부를 평양에 설치했으나 신라가 당을 격퇴하고 이를 차지했다.

선비와 한민족의 관계

고조선 도입 중심지
고조선 도읍 중심지.

북방 오랑캐의 하나로 치부되었던 선비는 한민족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먼저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조선족이 분화하여 조선, 선비, 여진, 몽고, 퉁구스 등의 종족이 되었다”고 했다. 고조선에 대해서는 만주지역은 하얼빈을 수도로 대 단군 ‘신한’이 다스렸고, 한반도는 평양을 수도로 대 단군을 보좌하는 ‘말한’이, 발해만 일대 요서지역은 개평을 수도로 역시 대 단군을 보좌하는 ‘불한’이 각각 다스렸다고 주장했다.

이들 삼한은 이후 기원전 4세기경에 각각 ‘신조선’ ‘말조선’ ‘불조선’으로 분립하게 되었는데, 위만이 차지했던 곳이 바로 발해만 일대의 ‘불조선’으로, 이곳이 후에 한나라에 의해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또 중국의 사기는 위만이 차지한 ‘불조선’을 ‘조선’, ‘신조선’은 ‘동호’라고 이름 하여 흉노 전에 넣었다.

말하자면 고조선의 중심부이자 만주지역에 소재 했던 신조선을 동호라고 이름하고 있으니, 동호의 후예인 선비는 결국 만주지역 고조선의 후예란 뜻이 되는 것이다. 즉 단군조선 후예들인 동호·예맥·숙신은 동호가 선비·오환으로 나누어지고, 예맥이 고구려를 건국하고, 숙신이 후에 금나라를 건국하게 된다.

몽골의 국사교과서에서는 선비의 기원에 대해 ‘흉노와 같은 기원인 동호의 주된 구성원’이라 하고 선비의 인구는 흉노와 선비인으로 구성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말하자면 흉노·선비가 같은 조상에서 유래하였고 선비는 흉노인과 선비인의 통합국가라고 보고있는 것이다.

선비족 지역과 한반도에서 발굴되고 있는 유물 또한 예사롭지 않다. 북위시대 선비족 무덤에서 다수의 유물이 발굴돼 산시박물원에 보관되어 있는데, 여기서도 기마유목민의 전유물로 한반도 남부에서 발굴되고 있는 동복을 볼 수 있다. 또한 가야시대 무덤인 김해 대성동 91호 고분에서 4세기경의 청동허리띠 등 금속공예품이 여러 점 발굴되었는데, 같은 시대 북방 선비족 무덤인 랴오닝성 차오양시와 허난성 안양시에서 발굴된 고분의 유물과 흡사하여 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런데 근간에 랴오닝성(라마동)유물은 선비가 아니라 부여 사람들이라는 학설도 제기되고 있으나, 부여 또한 선비와 같이 고조선의 후예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김석동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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