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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2024-03-28 19:16 (목) 기사제보 구독신청
공현진 어장서 잡힌 명태, ‘강산에’가 불러왔나
공현진 어장서 잡힌 명태, ‘강산에’가 불러왔나
  • 이만훈 언론인
  • 승인 2018.04.30 20: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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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생선이던 명태가 ‘금태’로…먹거리 넘어 우리 삶 일부

예전엔 북한을 ‘동토(凍土)’라고 표현했다. 공산주의 독재의 폭압(暴壓)으로 인민의 자유가 박탈된 채 공포로 얼어붙은 땅이란 뜻에서다. 얼마 전 그 ‘동토’에서 봄을 기원하는 행사가 개최됐다. 바로 4월 1일 오후 평양 대동강지구 동평양대극장에서 열린 ‘2018 남북평화협력기원 평양공연’-. 공연의 주체는 한국에서 간 예술단이었다. 말하자면 얼어붙은 땅에 남쪽의 훈풍을 불어넣어 봄이 오게끔 하겠다는 취지의 행사였다. 그래서 공연의 타이틀도 ‘봄이 온다’였다.

이 공연 가운데에서도 특별히 관객의 눈길을 끈 가수는 바로 함경남도 실향민의 아들인 강산에. 이날 강산에는 통기타를 매고 무대에 올라 직접 연주를 하며 ‘라구요’와 ‘명태’를 열창했다. 특히 강산에는 “저희 부모님이 돌아가셨지만, (혼은 고향인) 함경남도에 계신다. 함경도에서 명태가 많이 잡히지 않느냐”며 “함경도랑 관계가 있는 명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다”고 말한 뒤 ‘명태’를 부르기 시작했다.

강산에가 흥겨운 리듬과 함께 구수한 함경도 사투리로 ‘명태’를 부르기 시작하자 다소 경직된 표정으로 공연을 관람하던 북한 관객들의 표정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그가 “명태 그 말의 유래 중엔 조선시대 함경도 명천 지방에 사는 태씨 성의 어부가 처음 잡아 해서리 명천의 명자 태씨 성을 딴 태자 명태라고 했데이제이니”라며 가사를 읊자 객석의 북한 관객 중 일부는 웃음을 참는 듯 입술을 씰룩거리기도 했다. 또 “아바이 밥 잡쉈소? 영걸이 왔니? 강산에는 어찌 아이 왔니?”라는 대목에 이르자 결국 더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이들도 있었다.

‘명태’는 2002년 발매된 강산에의 7집 앨범 타이틀곡으로 그가 아버지를 생각하며 함경도 사투리가 나오는 노랫말로 지은 노래다. 강산에는 “이 세상에 남아 있으라”는 호소로 노래를 맺었다.

그리고 열흘 뒤인 4월 10일 남녘에서 경사(?)가 났다. 강산에의 바람 때문이었을까,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공현진 앞바다에서 200여 마리의 명태가 잡힌 것이다. 이같이 명태가 대량으로 잡힌 것은 2006년 이후 한국 동해안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다. 이번에 공현진 앞바다 정치망 어장에서 잡힌 명태는 20∼25㎝ 크기로 이 소식이 전해지자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내 일’처럼 반기고 있다(이보다 일주일 뒤인 17일에는 경남 거제도 앞바다에 설치된 그물에 길이 50cm의 명태가 잡히기도 했다. 비록 한 마리지만 남해안에 명태가 출몰하기는 처음이다!). 아니, 고작 200마리 가지고 웬 난리냐고? 그러니 역사가 슬픈 게다.

사라졌던 명태, ‘부활’ 꿈꾼다

명태는 냉수성 어종으로 함경도 연안 등 우리나라 동해안이 주 어장이었다. 가을철 북태평양에서 남하해 9∼10월에는 함경도 연안에 이르고 계속 남하해 11∼12월에 걸쳐 강원도 연안 및 경북 연안까지 회유한 뒤 산란을 마치고 2월 이후 수온 상승으로 다시 북상하곤 했다. 그래서 예전에 우리나라 동해안에서 가장 흔한 생선이 바로 명태였다.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李裕元·1814~1888)이 <임하필기(林下筆記)>에서 “함경도 원산을 지나다가 명태가 쌓여 있는 것을 보았는데, 마치 오강(五江·한강)에 쌓인 땔나무처럼 많아서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었다”고 적었을 정도였다. 당시 백성들 사이에는 “맛 좋기는 청어요, 흔하기는 명태”란 말이 유행했는데, 괜한 허풍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일제 때도 명태는 가장 많이 잡히는 물고기였다. 명태 잡이의 최고 기록을 세웠던 1940년의 어획량은 줄잡아 27만 톤으로 당시 총 어획량의 16%를 차지할 정도였다. 하지만 광복 이후 국토 분단으로 북쪽의 주 어장을 잃게 됨에 따라 남한의 명태 어업은 큰 타격을 받아 수년간에 걸쳐 어획량은 불과 1만여 톤 수준이었다.

그 이후 점차 늘어 1980년대 동해에서 연평균 13만 톤의 어획고를 올렸다. 정점을 찍었던 1981년엔 16만 톤의 명태를 잡았다. 그러나 어획량 증가는 과거 어획이 금지됐던 ‘노가리’라는 명태 새끼를 무차별 잡아들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다시 어획량이 곤두박질쳐 1990년대(노가리 남획은 97년까지 계속됐다)엔 고작 1만여 톤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어 2000년대 들어 1000톤을 넘기지 못하다가 마침내 2008년 공식 어획량이 ‘0’을 기록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사태를 심각히 여긴 정부는 2009년 말 국립수산과학원 동해수산연구소에서 명태의 자원회복을 위해 ‘살아 계신(?)’ 명태(2kg 이상)를 잡아오면 어시장 도매 금액의 10배에 달하는 20만원을 포상금으로 내걸었다. 2014년에는 마리당 포상금으로 50만원으로 올렸다.

마침내 2014년 죽은 어미 명태에서 치어 생산에 성공했으나 60일 만에 모두 죽어버렸다. 하지만 다음 해 자연 산란까지 성공해 명태 치어 25만 마리를 생산해냈다.

그 해 10월 13일 해양수산부는 동해 명태 자원의 복원을 위해 강원도 고성군 저도·북방어장 주변 21.49㎢를 명태 보호수면으로 지정해 4년간 어업, 채취 활동을 전면 금지하고 12월 그곳에 명태 치어 2만 마리를 방류했다. 인공양식을 위한 연구에도 나서 2016년 2월 19일 해상 가두리에 명태 5000마리를 방류해 키운 결과 그해 10월 세계 최초로 명태 완전양식에 성공하기에 이르렀다. 인공수정으로 태어난 명태가 어미로 성장해 다시 2세를 생산한 것이다.

인공수정 2세대 명태는 2017년 5월 방류됐는데 이번에 공현진 바다에서 잡힌 놈들이 이때 방류한 치어가 자란 것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그럴 가능성이 크다. 비록 200마리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명태의 귀환이다. 환호작약(歡呼雀躍) 할 만하지 않는가?

‘국민생선’ 명태, 먹거리 넘어 ‘문화’로 자리 잡다

명태는 누가 뭐래도 우리나라의 ‘국민생선’이다. 남녀노소 모두 사랑을 받는다.

해양수산부에 따르면 우리나라 어류 소비량(2012~2016년) 가운데 명태는 23만2083톤으로 단연 1위다. 이어 멸치가 2위(20만2860톤), 가다랑어 3위(15만7999톤), 고등어 4위(12만8647톤) 순이다. 우리 연안에서 ‘씨가 마른 상황’에도 이처럼 명태가 끊임없이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다는 건 시사(示唆) 하는 바가 크다. 한국인에게 명태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다. 명태는 문화다.

예전엔 삼신할미한테 자식을 점지해달라고 빌 때부터 성인식인 관례(冠禮), 혼례(婚禮)는 물론 죽어 장사와 제사를 지낼 때 늘 명태(북어)가 빠지지 않았다. 어디 그때뿐이랴. 오늘날에도 청운의 꿈을 품었지만, 방황하는 청소년이 ‘3포’의 비애를 달래느라 ‘쐬주’를 들이키며 노가리(새끼 명태 말린 것)를 씹어대고, 어쩌다 직장을 잡았다고 해도 매일매일 산같이 쌓이는 스트레스를 털어버리려면 동태찌개에 막걸리라도 몇 사발 걸쳐야 하고, 내친김에 밟아라 밟아라 하다가 이튿날엔 어김없이 북엇국 신세를 지곤 한다. 나이 들어 자식이 속 썩이거나 늙은 부모 문제로 부부싸움이라도 할라치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가 서럽고 안타까워 한 마리 동태가 돼 퀭하니 멍을 때리기 일쑤다.

그러다가도 친구 놈한테 ‘콜’이라도 오면 언제 그랬냐 싶게 냉큼 달려가 코다리찜이나 황태구이를 곁들여 주향(酒香)에 젖는 게 우리네 인생 아니던가?

내륙에서 자란 때문인지 몰라도 생선 중 가장 오래된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게 바로 동태다. 서너 살 때쯤의 한겨울이었는데 엄마가 끓여주신 찌개를 먹다 대가리 어디에 숨어있던 낚싯바늘이 입천장에 박혀 혼쭐이 났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린 내 뺨에 창을 낼 뻔했던 그놈이 바로 동태 대가리였던 것이다. 당시 아랫목 목침(木枕) 위에 있던 ‘라지오’에선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로 시작되는 유행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지금도 동태만 보면 ‘앵두나무 처녀’란 제목의 그 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지곤 한다.

‘동태 트라우마’라고나 할까. 그리 혼났으면 진저리를 칠 법도 하지만 그 뒤로도 명태라면 사족을 못 쓰는 걸 보면 전생부터 무슨 깊은 연(緣)이 있지 싶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찬바람이 부는 초겨울이면 동네 아낙들이 10여 명씩 품앗이 삼아 집집이 돌아가며 김장을 담그곤 했는데 한 데서 일하느라 겉과 속이 죄다 덜덜거릴 때 이를 단박에 녹여주는 것도 가마솥에서 설설 끓는 동태찌개였다. 그 옆에서 봉죽을 드는 척하다 커다란 양푼으로 한 그릇 받아들고 훌훌 불어대며 마지막 국물 방울까지 비우던 그 맛이라니…. 소풍이나 운동회 때, 그리고 할머니 생신 등 잔치 때나 구경했던 북어조림하며, 제삿날이면 먹던 북어 탕국의 맛도 명태가 준 행복이었다.

고서에 수록된 명태의 어원

명태는 한자로 ‘明太’로 쓰는데 <승정원일기> 효종 3년(1652)의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내용인즉 ‘강원도에서 진상하는 대구 어란(大口魚卵)에 명태 어란(明太魚卵)이 첨입(添入) 돼 있다’며 문제 삼은 것으로, 이때 명태라는 이름이 사용되고 있다. 이로 보아 이미 이 무렵에 명태라는 이름이 널리 사용되고 있었으며, 어획량도 많아 명태 어란은 귀하지 않은 식품이었던 것 같다.

이유원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명천(明川)에 태(太)가라는 성을 지닌 어부가 어떤 물고기를 낚아 주방 일을 맡아보는 관리로 하여금 도백(道伯)에게 바치게 했는데 도백이 이를 아주 맛있게 먹고 그 이름을 물으니 모두 알지 못하는지라 이 물고기는 태가라는 어부가 잡은 것이니 명태(明太)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또 함경도와 일본 동해안 지방에서는 명태의 간으로 기름을 짜서 등불을 밝혔는데 ‘밝게 해 주는 물고기’라는 뜻으로 명태(明太)라 불렀다는 설이 있는 가하면 오지(奧地) 중의 오지인 함경도 삼수갑산(三水甲山)의 농민들 중 영양 부족으로 눈이 보이지 않게 된 사람들이 ‘명태의 간을 먹고 눈이 밝아졌다’ 하여 그렇게 불렸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어획방법·시기 등에 따라 이름도 다양

명태만큼 이름이 많은 생선도 없다. 그 정도로 다양한 정조(情調)가 반영돼 있다는 반증이다. 우선 가공 방법에 따른 분류로 바로잡아 싱싱한 놈은 ‘생태(生太)’ 또는 ‘선태(鮮太)’라고 하고, 얼린 것은 ‘동태(凍太)’, 60일 동안 완전히 말린 것은 ‘북어’ 또는 ‘건태(乾太)’라고 한다. 40일쯤 얼렸다 녹였다 반복해 노랗게 되면 ‘황태(黃太)’이고, 황태를 만들려다 그만 날씨가 풀려 까맣게 된 것이 ‘먹태’ 또는 ‘흑태(黑太)’, ‘찐태’다. 반면 너무 추워서 하얗게 되면 ‘백태(白太)’, 잘못 말려 수분이 다 빠져버린 놈은 ‘깡태’, 잘못돼서 속이 붉고 딱딱해진 놈은 ‘골태(骨太)’라고 부른다. 또 코를 꿴 채 보름쯤 말려 꾸덕꾸덕하게 된 것을 ‘코다리’, 명태 새끼를 말리면 ‘노가리’라 부르며, 배를 갈라 소금에 절인 뒤 넓적하게 말리면 ‘짝태’라 한다.

명태는 잡는 방법도 다양해 그 방법에 따라서도 달리 불린다. 그물로 잡으면 ‘망태(網太)’, 낚시로 잡은 놈이 ‘조태(釣太)’ 또는 ‘낚시태’이다. 잡은 장소에 따른 이름도 있는데 원양(遠洋)에서 잡은 명태는 ‘원양태’, 근해에서 잡은 것은 ‘지방태’, 강원도 앞바다에서 잡은 놈은 강원도의 강(江)자를 따 ‘강태(江太)’라고 하고, 특히 동해안에서 잡은 명태는 원양에서 잡은 것과 구분해 ‘진태(眞太)’, 귀하다 하여 ‘금태(金太)’라고도 한다.

의도하지 않게 생기거나 그 생긴 모양에 따라 붙여진 이름도 있다. ‘무두태(無頭太)’는 말 그대로 머리를 잘라내고 몸통만을 말린 것이고, ‘파태(破太)’는 머리나 몸통에 흠집이 생기거나 일부가 잘려나가 파손된 명태, ‘낙태(落太)’는 말리다가 바람이 불어 떨어진 것이며, ‘통태’는 작업 중 실수로 내장을 제거하지 않고 통으로 건조된 것이다.

명태는 15년 정도까지 산다. 우리네 식탁에 오르는 것은 대개 25~30cm이지만 8년 정도 자라면 60cm 크기가 된다. 명태는 버릴 게 하나도 없는 생선이다. 그 옛날 명태가 가장 흔할 때부터 살코기는 물론 껍질, 아가미, 내장, 심지어 눈알까지 살뜰하게도 챙겨 먹었다. 어른 팔뚝만 한 놈이면 무려 30여 가지의 음식을 만들 수 있다. 국(북어·황태), 찌개(생태·동태), 탕(알·껍질), 찜(동태·북어·코다리·알), 구이(북어·황태·코다리), 전(동태·곤이), 산적(동태·북어·황태), 김치(생태), 무침(북어·황태·껍질), 자반(북어·황태), 강정(북어), 식해(생태·북어·코다리), 순대(생태·동태), 회(생태·북어), 보푸라기(북어), 젓갈(알·내장·아가미) 등등. 명태는 한국인의 맛과 멋에서 뗄 수 없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양명문(楊命門·1924~1985)의 시에다 변훈(邊焄·1926~2000)이 멜로디를 붙인 가곡 ‘명태’를 듣노라면 누구라도 명태의 삶이 우리네와 닮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겨우내 말린 ‘북어’, 전국에 유통돼 新 문화 이끌어

명태의 수많은 이칭(異稱) 중 역사적으로 가장 널리 퍼져 익숙한 것은 ‘북어’다. 사실 명태를 오늘날의 존재로 있게 한 것도 따지고 보면 ‘북어’란 형태가 있어 가능했다. 냉장시설이 없던 시절 ‘동건(凍乾)’이란 가공 비결이 없었다면 아무리 흔한 생선이라도 ‘전국구’가 될 수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여기에다 17세기 이후 제사가 일반 백성에까지 허용되면서 제수(祭需)로서 수요가 급증한 것도 단단히 한몫했다.

실학자 이규경(李圭景·1788~1863)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명태를 말린 건제품이 전국에 유통되는데, 매일 반찬으로 삼고 여염뿐만 아니라 유가(儒家)에서도 이를 제사에 쓴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는 전 계층에서 북어를 제사상에 올린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강화도 조약 이후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을 다녀온 김기수(金綺秀·1832~미상)가 <일동기유(日東記游)>에서 “그것이 많이 나고 값이 싸 우리나라 사람은 심산궁곡(深山窮谷)의 노인과 여자, 어린아이들까지도 북어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한 것과 서유구(徐有榘·1764~1845)가 1820년 펴낸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에 “명태를 겨우내 말린 것이 동해안 원산에 집하됐다가 배나 말에 실려 각지로 운반되는데, 그것을 옮기기 위해 원산에는 밤낮으로 인마(人馬)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는 기록을 통해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명태의 어획량이 증가했고 그 가공법의 발달과 함께 편리한 수송과 장기간의 보관이 가능해지면서 전국 방방곡곡으로 북어가 유통되었다. 따라서 조선 팔도 도처에서 모든 계층이 쉽게 접할 수 있던 북어는 어느 결에 ‘포(脯)’라고 불리며 제사상에 빠져서는 안 될 품목이 됐으며, 집안의 복(福)과 안녕을 비는 데도 사용됐다. 이로써 명태는 북어의 형태로 단순히 음식의 차원을 넘어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물로서의 지위까지 획득하게 된 것이다. 동시에 북어는 인간 세상의 재액(災厄)을 소멸시켜 주며, 개인의 안녕을 지속시켜 주는 상징물로도 받아들여져 고사 등 민간신앙에도 빠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북어를 실에 감아 집안 대들보에 묶어 두거나 출입하는 문틀 윗부분에 걸어 두는 가하면 마을 어귀에 있는 장승이나 기자석(祈子石), 솟대 등에도 걸어두었다.

신에게 바치는 음식은 신성함이 우선인데, 말린 까닭에 비린내가 나지 않으면서도 눈과 머리가 뚜렷한 채 제 모습을 잃지 않은 북어의 특장(?)이 이에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머리가 크고 알을 많이 낳기 때문에 훌륭한 자손을 많이 두고, 많은 알처럼 부자가 되게 해달라는 기원을 담을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매력도 갖고 있다. 또 건조된 모습이 마치 미라와 비슷해서 인간의 대용으로서 대수대명(代數代命)의 역할을 하기에도 그만이라 무속에서 액막이로도 북어는 자주 쓰인다.

‘공현진 쾌거’로 바다의 ‘봄’ 기대

‘명태를 만진 손을 씻은 물로 사흘 동안 찌개를 끓인다’는 속담이 있다. 지독하게 인색한 사람을 나무랄 때 쓰는 말이다. 또 ‘북어 한 마리 부주한 놈이 남의 제사상 엎는다’는 말도 있다. 하찮은 것을 베풀고 지나치게 생색을 낸다는 비꼼이다. 두 가지 다 명태가 흔하디흔했던 시절에 만들어진 패러디이다.

오늘날 명태 어업의 최전선이었던 강원도 고성군 거진항에서는 매년 수입한 명태로 ‘명태축제’를 연다. 뿐만 아니라 설악산 등을 찾는 관광객들이 고성·속초·양양지역 특산품으로 많이 구입하는 황태 또한 수입한 명태를 국내에서 말린 것이다. 이래저래 명태를 찾는 ‘입’은 여전한데 ‘내 바다’엔 씨가 말라 벌어지는 일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명태는 쌀처럼 정부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비축 품목’으로 외교부와 농림축산부가 매년 해결해야 하는 ‘숙제 생선’이 돼버렸다.

앞에 든 <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숙종 때 좌의정을 지낸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이 “300년 뒤에는 북어가 지금보다 귀해질 것”이라고 예견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노봉이 1628년(인조 6년)에 태어나 1692년(숙종 18년)에 졸했으니 작금의 이 사태와 꼭 맞아떨어진다. ‘있을 때 잘 해’란 명언(?)이 명태에도 해당될 줄 누가 알았으랴!

하지만 옛일은 옛일일 뿐, 하릴없이 탄식만 해서 될 일인가? 모처럼 찾아온 이번 ‘공현진의 쾌거’를 계기로 부디 용왕님이 노여움을 풀도록 모든 지혜와 노력을 모을 일이다. 이 땅에서 아예 ‘금태’란 말이 영원히 없어지게끔 말이다. 남북한 사이에, 그리고 우리 바다에 ‘봄’이 오고 있다!

인사이트코리아, INSIGHT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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