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이 직원보다 300배 많은 연봉 받아도 되나
사장이 직원보다 300배 많은 연봉 받아도 되나
  • 이영환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 승인 2017.07.31 10: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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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율과 평등’은 상충적인 게 아니라 상보적이어야

사회는 구성원들이 공통의 문화와 사회규범을 바탕으로 형성된 공동체다. 한편 시장경제는 사람들의 경제적 욕구를 조정하고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함으로써 사회의 물적 기반을 확충하기 위한 하위 시스템이다.

물적 기반이 취약한 사회에서 개인은 진정한 자유를 향유할 수 없으며 이로 인해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

또한 제한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빈곤 문제가 해결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불평등이 더욱 악화되는 결과가 예상된다. 즉 ‘효율과 평등(efficiency and equality)’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모두 실패하게 된다.

과거 구소련을 비롯한 동구 여러 나라에서 공산주의 체제가 몰락한 것은 이에 대한 명백한 증거다. 북한도 마찬가지지만 아직 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정보를 차단한 상태에서 오랫동안 주민들을 세뇌시킨 결과, 플라톤이 말한 ‘동굴의 우화’와 같은 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체제가 계속 유지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사회가 추구해야 할 기본 가치는 ‘효율과 평등’으로 압축된다. 이 두개의 가치가 조화를 이룬 경우에는 경제발전과 사회발전을 이룩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경제도 사회도 후진성을 면하기 어렵다.

이와 관련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효율과 평등 개념에 대한 일반적인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더 벌어지고 있는 CEO와 근로자 보수 격차

우선 효율은 경제학에서 잘 정의되어 있는 개념인 반면 평등은 그렇지 못하다는 점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효율은 파레토 효율(Pareto efficiency)로서 ‘어느 한 사람의 효용을 감소시키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의 효용을 증가시킬 수 없는 자원배분의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이런 추상적인 정의보다는 효율이란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얻는 상태라는 표현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이 말이 논리적으로는 문제가 있지만 직관적으로 효율의 의미를 잘 나타내므로 파레토 효율의 현실적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소비자가 주어진 소득을 바탕으로 효용을 극대화하려 한다거나 기업이 비용을 최소화하거나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것 모두 효율을 추구하는 행위에 해당한다.

반면 평등은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측면을 모두 망라해 파악해야 하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경제적 평등, 즉 소득분배의 평등으로 한정하고자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논의가 너무 광범위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무엇이 경제적 평등이고 무엇이 불평등에 해당하는지 구분하기란 여전히 쉽지 않다. 영미권 기업의 경우 과거 전문경영자의 보수는 근로자 평균보수의 20~30배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300배 이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과거에는 소득분배가 평등했는데 지금은 불평등해졌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소득분배에 관해 주류 경제학에서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한계생산성(marginal productivity) 원리다. 간단히 말해 이것은 ‘생산과정에서 기여한 만큼 보수가 결정된다는 원리’라 할 수 있다. 흔히 능력주의(meritocracy)란 이 원리의 다른 표현이다.

그런데 이 원리에 의하면 모든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 전문경영자의 보수가 근로자 평균소득의 300배에 달한 것은 전문경영자가 그만큼 기여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 생산과정에 기여한 정도를 객관적으로 측정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너무 많은 요인들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능력주의는 원인과 결과가 전도된 주장이다.

결과를 가지고 원인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능력주의가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논리적 기반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효율과 평등의 조화를 논하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다. 이 점은 글로벌 차원에서 불평등의 문제를 부각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세 명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 그리고 앤서니 앳킨슨(Anthony Atkinson)도 인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하는 이유는 이 두 개의 가치가 과연 상충적인가 아니면 반대로 상보적인가 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불평등 문제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심각한 쟁점으로 부상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효율과의 관계를 명확히 해야 경제정책 방향을 제대로 설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 나라에서 불평등 문제가 효율을 달성하는 문제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그래서 경제적 효율만 강조해서는 더 이상 경제성장과 사회발전을 달성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널리 확산되고 있다.

그럼에도 주류 경제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효율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실정이다. 패러다임 전환은 이토록 어려운 일이다.

그동안 경제학자, 정치가, 관료 나아가 일반대중에게 시장경제에서 효율과 평등은 상충적이라는 생각이 널리 수용되어왔다. 즉 효율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평등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핵심 논리를 제공한 사람은 경제학자 아서 오쿤(Arthur Okun)이다. 그는 1975년 자신의 저서 <Equality and Efficiency: The Big Tradeoff>를 통해 경제적 효율을 위해서는 일정 수준 경제적 평등을 희생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효율과 평등 간에는 상충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심각한 불평등은 생산성과 효율 악화시켜

오쿤의 주장은 보수주의 경제학자들과 정치가들에 의해 널리 수용되어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경제정책의 기조가 됐다. 그런데 이런 그의 생각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보다 앞서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은 저서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더 극단적인 주장을 펼쳤다. 그는 누진적인 소득세는 효율적인 자원배분을 크게 저해한다면서 누진세율을 획기적으로 낮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프리드먼은 경제적 효율을 해치지 않으려면 법인세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거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에서는 이런 프리드먼과 오쿤의 주장을 수용해 소득세 한계세율과 법인세율을 대폭 낮춤으로써 경제 활성화를 도모했던 적이 있었다. 이런 정책이 일시적으로는 경기를 부양하는 효과를 발휘했지만 결국 부메랑이 되어 소득분배의 불평등을 악화시키고 그럼으로써 경기침체를 유발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은 역사가 입증한다.

그런데 필자는 오쿤이 주장한 내용을 다시 신중하게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평등을 강조하다 보면 효율을 저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종종 불평등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포기해야 할 대가, 즉 효율의 감소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그는 저서에서 ‘새는 물동이 실험(leaky-bucket experiment)’이라는 사고실험을 제안했다. 그에 의하면 고소득자에서 저소득자로 소득이 이전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누수 현상, 즉 비효율의 크기에 따라 불평등을 완화하려는 조세제도가 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조세를 이용한 불평등 완화를 무조건 반대한 것이 아니라 이런 정책의 효과에 의문을 제기했던 것이다.

오쿤은 정부가 지나치게 평등 지향적인 정책을 채택하면 이로 인해 경제 전반의 효율이 하락하고 경제성장이 둔화될 것이며, 그 결과 불평등이 더 악화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 재분배정책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의 주장은 오로지 효율과 평등 간의 상충관계를 강조한 것으로 윤색되어 보수주의적 경제정책의 이론적 근거로 채택되었던 것이다.

오쿤이 경제적 효율을 높이기 위해 경제적 인센티브를 강조한 것은 사실이다.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적절한 경제적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하며, 이로 인해 불평등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시장경제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도덕적 해이를 감안할 때 무시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인센티브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효율을 실현할 수 없고, 그 결과 경제성장률이 낮아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실업률이 증가할 것이고 불평등은 더욱 악화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경제성장을 통한 고용 증대가 불평등을 완화하는 데 중요한 요소인 것은 사실이지만 최근 이런 논리가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점이 부각되고 있다.

특히 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이런 상충관계에 대한 강력한 반론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불평등의 악화가 금융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거론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을 대변한 대표적인 인물은 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로서 <불평등의 대가>를 비롯한 일련의 저서와 강연을 통해 심각한 불평등은 생산성과 효율을 악화시킨다는 점을 통렬하게 지적해왔다.

그에 의하면 불평등이 감소하면 오히려 효율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각종 로비활동을 포함한 지대추구행위가 만연하면 불평등이 악화되고 이로 인해 경제 전반의 효율이 훼손된다는 것이다.

또한 빈곤으로 인한 인적 자본에 대한 과소투자와 부실한 공교육은 기회 균등이라는 원칙을 실현하지 못하고 이로 인해 결국 생산성이 하락하고 효율이 훼손된다는 것이다. 스티글리츠 주장의 핵심은 효율과 평등은 상충적이 아니라 상보적이라는 것이다.


“효율과 평등은 상충적인 것 아닌 상보적”

여기서 이 문제와 관련해 흥미로운 역사적 사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14세기 유럽을 초토화시켰던 페스트와 관련된 것이다.

영국 옥스퍼드대학 우스터칼리지 선임특별연구원인 역사학자 피터 프랭코판(Peter Frankopan)은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은 자신의 저서 <실크로드 세계사>에서 페스트와 관련해 상당히 흥미로운 주장을 펼쳤다.

한 마디로 페스트는 유럽 사회와 경제에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유럽은 페스트로 인구의 3분의 1을 잃었다고 한다. 사망자 수에 대한 보수적 평가에 따르면 전체 추정 인구 7500만 명 가운데 약 2500만 명이 페스트로 사망했다고 한다.

페스트로 인해 인구가 급격하게 감소하기 이전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는 봉건주의 체제의 특성으로 인해 소득과 부의 분배가 극단적으로 불평등한 상태였다.

그런데 페스트로 노동자와 농부의 숫자가 급격히 감소하면서 만성적인 인력 부족 현상이 발생했으며 이로 인해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유리하게 임금이 상승하고 소작료가 낮아지는 현상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페스트 이전에 비해 유럽 사회 전반에서 불평등이 완화되어 소비 수요가 늘어나 의류를 비롯한 주요 생필품의 생산이 획기적으로 증가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프랭코판은 심지어 18세기 산업혁명이 시작된 계기를 페스트에서 찾을 수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페스트는 그것이 불러일으킨 공포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경제적 변화의 기폭제가 된 것으로 드러났다. 그 변화는 너무나 심오한 것이어서, 유럽에 죽음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했다.

이 변화는 서방이 대두하고 서방이 승리를 거두는 데 중추 노릇을 했다. 그렇게 되는 데는 몇 단계를 거쳐야 했다. 첫 번째는 사회구조의 작동 방식에 대한 전면적인 재구성이었다. 페스트 이후 만성적인 인력 부족은 임금이 급등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노동의 가치가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한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을 결정하는 것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의식 수준이다. 그리고 이런 의식 수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그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패러다임이다. 효율과 평등은 상충적이라는 패러다임이 지배하고 있는 한 불평등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란 불가능하다.

낡은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한 최저임금을 얼마로 정하는가 하는 비교적 작은 문제에 관한 합의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 지속될 것이다. 누구나 사회의 구성원으로 기본권을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효율과 평등은 상충적인 것이 아니라 상보적이라는 인식이 널리 공유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각종 경제규칙을 이 원리에 맞춰 재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합리적 판단은 주관적인 신념이 아니라 객관적인 지식에 근거해야 한다. 이 시대의 객관적인 지식은 효율과 평등은 상보적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럴듯한 이야기를 믿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이 이야기가 널리 공유되는 사회를 만드는 데 일정 역할을 해야 한다. 이것 또한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좋은 방법이 아니겠는가.

※이 글은 인터넷 <논객닷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 이영환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지식협동조합 경계너머 아하! 이사
 미시경제학 등 다수 출간

인사이트코리아, INSIGHT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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