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 신화를 쓰다
박현주, 신화를 쓰다
  • 권호 기자
  • 승인 2017.06.30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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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셋그룹 창업 20년…‘여의도서 세계로’
▲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은 창업 20년만에 글로벌 금융그룹을 일궜다.<뉴시스>

그는 시골에서 태어났다. 직장생활을 10년 한 후 그동안 모은 돈을 밑천으로 미래에셋을 창업한 지 20년이 지났으니 그가 자본시장에 몸담은 지 30년이 됐다.

그가 시골을 떠나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할 때 어머니는 생활비를 1년에 한 번만 주셨다. 돈을 계획적으로 쓰고 관리하는 습관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독서광이었다. 초등학교 때 금성출판사에서 나온 위인전기를 대부분 읽었으며, 방황했던 청소년기에는 마키아벨리 <군주론>과 <헨리 키시전 자서전> <카네기 자서전> 등을 읽었다.

특히 위인들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는데 이 책들이 대학 시절 ‘내가 직접 조직을 만들어 경영하고 싶다’는 꿈을 갖게 해줬다고 회고했다.

이런 독서습관을 가졌던 것은 어머니의 영향이 크다.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말씀도 하셨지만, 그가 위인전 같은 책을 읽고 있으면 늘 칭찬해 주셨다고 한다.

업계에선 박현주 회장에게 “예측력이 있다” “기회 포착 능력이 뛰어나다”는 말을 자주 한다. 만일 그가 남보다 나은 예측력과 기회 포착 능력이 있다면 그 상당 부분은 그의 독서습관에서 비롯됐다고 스스로 말한다.

 

인생의 큰 스승 어머니

유년 시절 박현주에게 어머니는 누구보다 훌륭한 스승이었다. 고등학교 합격자 발표 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사춘기를 방황하며 보낼 때도 어머니는 “성실하게 농사를 지어도 괜찮다. 농사짓는다고 실패한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시며 위로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농부의 교훈처럼 “성실하게 사는 것이 어떤 직업을 갖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항상 말씀했다고 한다.

그가 고려대학에 합격해 서울에 상경한 후 신촌에서 형님과 함께 살았는데 안암동까지 당시 교통편으로 1시간 이상 걸렸다. 길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게 너무 싫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용돈은 더 받지 않아도 좋으니 가끔 택시를 타고 다닐 수 있게 해 달라”고 얘기했다. 택시를 타면 20분이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면 네가 어떤 일을 해도 좋다”고 말하며 선뜻 들어주셨다.

그는 젊은 직원들을 대상으로 강의할 때면 그때의 경험을 꼭 들려준다. “길거리에서 시간을 보내지 말고 직장과 가까운 곳에 집을 얻어라. 그 시간을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는 데 쓰는 게 장기적으로 보면 훨씬 유익하다.”

서른두 살 젊은 나이에 최연소 지점장을 맡았을 때 일이다. 누구보다 빨리 승진해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던 그에게 어머니는 “현주야, 너무 성공하려고 하지 마라. 성실하게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당부했다.

그는 이후 자신이 조급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그래, 성공과 실패가 중요한 게 아니다. 어머니 말씀처럼 결과는 하늘에 맡기고 성실하게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 박현주 회장의 자서전. 이 책에는 박 회장의 돈에 대한 철학과 투자비결 등이 솔직하게 담겨져 있다.<김영사>

“돈은 아름다운 꽃이다”

“바르게 벌어서 바르게 쓸 때 돈은 꽃처럼 아름답습니다. 돈이 아름다울 수 있게 돈의 가치를 살리기 위해 미래에셋이 있습니다. 돈은 꽃입니다.”

그의 자서전에 쓰여 있는 글이다. 어떤 사람에게 돈은 인생 최대의 목표일 수 있고 어떤 이에게는 한낱 욕망 덩어리에 불과할지 모른다. 돈에 대한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박현주 회장에게 돈은 ‘아름다운 꽃’이었다.

돈을 예찬한다고 해서 그가 돈만 밝히는 수전노는 아니다. 그가 동원증권에 입사할 때만 해도 증권업계는 인기 직종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받은 첫 월급은 12만원 정도였다. 경영학과 졸업생들에게 최고 인기 직장이었던 단자회사나 종합금융회사는 월 85만원 가량이었고, 단자회사의 고졸 여직원 급여가 40~50만원으로 증권사 대졸 직원보다 많던 시절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대부분 연봉 많은 이들 회사에 이력서를 냈고 입사하기를 원했다. 이들 회사는 ‘신이 내린 직장’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반면 증권사 직원들은 ‘꼴등 신랑감’이었다. 그가 결혼하기 위해 예비 장인·장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의 일이다. 두 사람은 증권사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결혼에 부정적이었다.

결국 두 시간 동안 장인·장모님 앞에서 프레젠테이션 방식으로 ‘왜 증권업이 성장 가능성이 있는가’를 설명하고 나서야 승낙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증권사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증권사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음에도 그가 증권사를 선택한 이유는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대학교 2학년 때 ‘자본시장의 발전 없이 자본주의는 발전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말이 증권시장에 대한 그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또 어머니가 보내주신 생활비로 증권투자를 하면서 당시 증권 1번지인 서울 명동의 증권 객장을 기웃거렸다고 한다.

그는 당시 증권사 영업직원들의 모습을 보고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시장이 끝난 뒤 삼삼오오 모여 객장에서 고스톱을 치는 것이 당시의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수업시간에 배운 자본시장이나 열정적인 영업직원들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주식 관련 일을 하고 싶었지만 증권사 직원들의 모습을 보면 볼수록 실망감만 가득 차올랐다.

당시 증권사에 대졸자는 기획실 같은 본사 부서 외에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만든 것이 내외증권연구소였다.

박현주 회장은 1985년 그동안 증권투자로 번 돈과 고객에게서 받은 자문료로 서울 회현동 코리아헤럴드빌딩에 10평 남짓한 사무실을 얻었다. 그의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그는 때마침 일본 증권 역사에 관한 책을 한 권 얻는다. 번역판이 아닌 원서였기에 외국어대 일본어학과 학생에게 번역료를 주고 책을 요약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때만 해도 국내에는 증권 산업이나 역사에 관한 책이 거의 없었다.

그 책에는 일본의 소니(SONY)가 미국 증권시장에 해외예탁증서(ADR)를 발행한 후 주가가 크게 상승했고, 증시 호황에 따라 증권주도 천문학적인 수익률을 기록했다는 내용 등이 나와 있었다.

그는 책을 통해 공부하면서 일본 자본시장의 발달 과정을 이해할 수 있었고 이를 한국 시장에 대입해 큰 흐름을 읽을 수 있었다. 이후 법적인 문제로 사설투자 자문회사의 운영이 어렵게 되자 동원증권에 입사한다.

내외증권을 통해서 얻은 증권에 대한 인사이트 덕분에 그는 입사 4년 6개월여 만인 서른둘의 나이에 전국 최연소 지점장으로 발탁됐다. 그가 지점장이 된 후 그가 선택한 방법은 ‘관행 타파’였다.

50여 명의 지점 직원을 절반으로 줄이고 지점 조직을 기업분석·법인영업·관리·일선 영업팀으로 세분화해 조직을 체계화했다. 더불어 영업보다 책을 읽고 기업 분석 보고서를 쓰는 직원 훈련에 집중했다. 그 결과 1년 만에 부실 점포를 전국 1등 점포로 바꿔 놓았다.

그는 압구정지점장에 이어 이사급인 강남본부장으로 승진하며 승승장구했다. 증권업계 최연소 임원이었다. 당시 동원증권에서 함께 일했던 한 직원은 “박 회장은 경제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박학다식했다”며 “연예·스포츠 등 무슨 주제가 나오더라도 대화를 그가 주도했으며 고객과 만남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전했다.

박현주 회장은 청년 문제에 관심이 많다. 그는 청년들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대학생들이 안정적이라는 이유로 공무원이 되거나 공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취업고시 준비를 한다. 대학가 주변에 고시원이 가득 들어서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솔직히 이런 기사를 보면 마음이 조금 불편하다. 젊은이는 꿈을 향해 도전하는 존재여야 한다. 그게 청춘의 특권이다. 내가 첫 직장을 잡을 때 최고의 인기 직장이던 단자회사나 종합금융회사 중에 지금까지 살아남은 회사는 거의 없다.

지금의 최고 직장이 미래의 최고 직장은 아니다. 현재 안정적으로 보이는 회사가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다. 꿈을 꾸고 그 꿈에 맞게 직장을 선택해야 한다. 처음에는 비록 힘들더라도 시간이 흘러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직장을 찾는 것이 장기적으로 유리하다.”

▲ <그래픽: 노덕천>

 
‘박현주 사단’의 미래에셋 창업

박현주 회장은 한 분야에서 10년 이상 정진해야 한다는 인생철학에 따라 금융계 입문 후 10여 년 동안 한 우물을 파다, 금융에 대한 타고난 직관과 경험을 살려 1997년 동원증권에서 ‘박현주 사단’으로 불리는 몇몇 지점장과 함께 미래에셋을 창업했다.

미래에셋은 운용사 인허가의 어려움으로 벤처캐피털로 시작했고 자산운용업의 설립 규정이 자본금 100억 원으로 낮아지면서 미래에셋자산운용이 설립됐다.

그해 국내 최초 폐쇄형 뮤추얼펀드 ‘박현주 펀드 1호’를 내놓아 성공했다. 뮤추얼펀드는 투자자들의 자금을 모아 투자회사를 설립해 주식·채권·선물옵션 등에 투자한 후 이익을 나눠주는 투자신탁을 말한다.

이 펀드는 판매 시작 2시간 30여 분 만에 500억 원어치가 ‘완판’되면서 미래에셋은 한국 금융 역사를 새로 쓰기 시작했다.

1999년 고객에게 금융 솔루션을 제공하는 금융그룹으로 나아가기 위해 미래에셋증권을 설립했다. 이후 업계의 비난과 우려에도 파격적인 위탁수수료 인하를 단행한다.

기존 증권사가 거래액의 0.5% 정도를 수수료로 제하는 데 비해 미래에셋증권은 그 비율을 0.29%로 확 낮췄고 인터넷 거래 수수료는 0.029%로 줄였다. 이는 미래에셋증권이 출범 1년 만에 전국 약정고 6~7위 증권사로 도약하는 계기가 됐다.

2001년에는 국내 최초로 랩어카운트 상품을 출시했다. 미래에셋증권의 랩어카운트 상품은 출시 이후 10년 넘게 시장을 이끌어 오고 있으며 지난달 말 기준 1조1100억 원이 운용되고 있다.

그해 박 회장은 하버드대 비즈니스스쿨 최고경영자과정에 들어가며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이곳에서 그는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얻은 것은 물론 한국 금융 기업들의 해외시장 진출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미래에셋을 아시아 1위 투자 그룹으로 만들겠다’는 청사진을 다시 그린 것이다. 이후 박 회장은 해외 진출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국내 자산운용사 처음으로 인도와 홍콩에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단일화 된 주식형 펀드에서 탈피해 채권형·혼합형·부동산·PEEF·SOC·ETF 등 다양한 자산에 투자하는 혁신적인 펀드를 지속적으로 선보이며 국내 펀드 시장을 선도했다.

미래에셋증권은 기존 증권사와 달리 자산관리 서비스에 집중해 차별화된 전략으로 시장의 관심을 받았다. 그 결과 10년도 채 되지 않아 국내 대표 증권사 가운데 하나로 올라섰다.

지난해에는 대우증권을 인수해 거함 ‘미래에셋대우’가 탄생했다. 미래에셋대우는 고객자산 220조 원, 자산규모 62조5000억 원, 자기자본 6조8000억 원의 국내 최대 증권사가 됐다. 국내와 해외 거점도 각각 168개와 14개로 국내 증권사 가운데 가장 많다.

미래에셋그룹은 출범부터 ‘고객 부’의 증대를 통해 편안한 노후에 기여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금융업 중에서 가장 장기적인 비즈니스인 보험사 인수를 검토하던 중 2005년 SK생명을 인수해 미래에셋생명을 출범시켰다.

미래에셋생명은 기존 보장성 보험 위주의 시장에 투자 상품인 변액보험을 더하고 국내 보험사 최초로 모든 금융상품을 원스톱으로 가입할 수 있는 ‘금융플라자’를 설립해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미래에셋생명은 해지환급금을 높인 ‘진심의 차이’ 변액보험을 출시하는 등 고객에게 다가가는 은퇴설계의 명가로 자리매김했다. 최근 PCA생명 인수를 통해 대형 생보사로 한 단계 도약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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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주의 투자 팁
“모르는 것에 투자하지 않는다”

박현주 회장에게 투자의사 결정을 어떻게 합니까? 라고 묻는다면 그는 “투자란 미래의 불확실성을 고려하여 이루어져야 한다”고 답한다.

돈을 운용할 때나 포트폴리오를 구성할 때 궁극적으로 고려하는 것은 ‘미래의 불확실성’이다.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비한다는 것은 투자에 있어 치명적 실수를 하지 않도록 개념을 정리하고 분석한다는 것이다.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서는 먼저 ‘알고’ 투자해야 한다. 그는 이를 ‘모르는 것에 투자하지 않는다’는 말로 표현한다. 실제로 부동산이나 주식을 매입하는 순간보다 더 중요한 때가 바로 조사하고 분석하는 시간이다.

실제 많이 알면 알수록 불확실성, 즉 리스크는 줄어든다. 수많은 개인 투자자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모르고’ 투자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루머나 주위 사람들의 말만 믿고 투자하는 개인 투자자가 적지 않다. 이런 투자 관행은 알고 투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그는 우량 자산에 장기 투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라고 한다.

시장이 좋을 때는 대부분의 부동산이나 주식의 가격이 오른다. 하지만 시장 상황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시장이 어려워지면 주식은 급락을 면치 못할 수 있다. 그렇기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길은 우량 자산에 장기 투자하는 것이다.

우량 자산이란 자산의 질(Quality)이 좋은 것을 말한다. 주식으로 말하면 다른 기업에 비해 경쟁 우위가 있거나 산업 전망이 좋은 회사다. 경쟁 우위를 판단할 때도 단순히 현재의 모습만 봐서는 안 된다. 향후 10년 간 지속적인 경쟁 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어야 한다.

경쟁 우위를 판단할 때도 단순히 현재의 모습만 봐서는 안 된다. 향후 10년 간 지속적인 경쟁 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어야 한다. 부동산은 입지가 자산의 질을 결정한다. 좋은 입지에 있는 부동산은 설사 불황이 오더라도 하락폭이 적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시장이 좋아지면 높은 상승세를 보인다.

박  회장은 통상 기업 전략을 짤 때 10년 앞을 내다보고 의사결정을 한다고 한다. 박 회장은 투자도 기업 전략을 구상하듯이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개인 투자자들의 입장에서 10년을 기다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3~5년에 한 번씩 자산운용 현황과 투자 대상을 면밀히 점검할 필요가 있다.

박현주 회장은 “투자의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높은 수익이 아니다. 치명적(재기불능)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며 “자칫 치명적 실수를 범하면 재기 불능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미래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세계다. 불확실성에 대비하는 길은 굳건한 원칙을 갖고 우량 자산에 장기 투자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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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주의 투자원칙 세 가지

“돈을 좇지 말고 일을 좇아라”

박현주 회장이 자주 받은 질문에는 이런 것도 있다. “당신의 투자 원칙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습니까?”

박 회장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몇몇 작은 실패는 있었지만 큰 실패가 없었던 것은 나름대로 투자원칙을 확고히 지켜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에게는 세 가지 투자원칙이 있는데, 이것을 투자뿐 아니라 비즈니스에도 적용하고 있다.

첫째, 모르는 일이나 투자처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임직원과 회의를 할 때도 모르는 이야기가 나오면 의견을 말하지 않는 편이다. 이런 경우에는 보통 임직원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 스스로 합리적으로 결정하도록 도와준다.

부동산도 그렇다. 사람들은 박 회장이 주로 주식시장에서 일해 왔기 때문에 부동산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박 회장은 학창시절 전세 계약을 직접 하면서 부동산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부동산 공부를 하면서 터득한 투자원칙은 첫째도 입지, 둘째도 입지, 셋째도 입지라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일하고 싶고, 살고 싶은 곳에 투자하면 반드시 성공한다고 생각한다. 요즘 그는 환경이 좋은 나라에 관심을 갖고 있다.

궁극적으로 은퇴 후에는 누구나 좋은 환경에 살고 싶어 할 것이기 때문이다. 호주나 미국의 캘리포니아 같은 지역이 은퇴 후에 사람들이 살고 싶은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장기적인 관점에서 투자한다. 미래에셋의 비즈니스 모델은 장기적 관점에서 결정된 것이다. 펀드 운용 역시 장기적 레코드(투자 기록)에 관심을 둔다. 인디펜던스·디스커버리 펀드의 성공은 전략적 결정의 산물이다.

펀드 대형화 역시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관점을 고수했던 결과다. 미래에셋 펀드의 장기투자 성과는 미래에셋이 적립식 펀드시장의 강자가 되는 데 밑거름 역할을 했다. 미래에셋과 다른 회사들의 차이는 바로 ‘장기적 관점’에서 나왔다.

해외펀드를 출시한 것도 장기적 관점에서 한 일이었다. 박 회장은 2001년 해외에 진출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중국과 인도를 1호 진출 지역으로 정했다. 고객들로부터 돈을 모아 투자를 한 것은 그로부터 5년 뒤의 일이다. 결코 하루아침에 번쩍 아이디어가 떠올라 해외펀드 비즈니스를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셋째, 어떤 유혹이 있어도 첫째와 둘째 원칙을 반드시 지킨다. 유혹을 느끼면 일단 ‘내가 잘 알고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해보고 ‘그렇다’라는 답변이 나오면 장기적 관점에서 생각한다. 일부 부침이 있더라도 장기적 흐름이 옳다고 생각하면 거기에 몸을 싣는다.

그가 지금까지 그나마 큰 실패를 하지 않고 투자와 사업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식의 의사결정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돈을 보고 일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좇은 것은 성취감이었다.

투자와 비즈니스의 성공을 통해 느낀 성취의 희열감이 그를 지금의 자리까지 이끈 것이다. 그는 투자와 비즈니스에서 성공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싶다고 했다. “돈을 좇지 말고 일을 좇아라. 그리고 성취를 통한 희열감을 맛보기 위해 원칙을 지키며 자신을 절제하라. 그러면 돈은 저절로 따라올 것이다.”

인사이트코리아, INSIGHT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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