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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2024-04-16 20:04 (화) 기사제보 구독신청
“실패를 두려워 하지 말고 살아 있는 한 절망하지 말라”
“실패를 두려워 하지 말고 살아 있는 한 절망하지 말라”
  • 박흥순 기자
  • 승인 2016.11.01 14: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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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체절명의 위기 극복한 어니스트 섀클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는 말처럼 세상은 실패한 사람들을 알아주지 않는다. 하다못해 2등이라도 사람들의 뇌리에 기억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영국의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Ernest Henry Shackleton, 1874~1922)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하지만 위기가 닥칠 때면 많은 사람들은 섀클턴의 리더십에서 인사이트를 찾곤 한다. 절체절명의 한계 상황에서 진정한 리더십을 몸소 보여준 위대한 리더였기 때문이다.

섀클턴은 영국의 런던 교외에 있는 시골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어린 시절부터 지독한 독서광이었던 그는 쥘 베른의 연재소설 ‘해저 2만리’를 보며 바다를 동경하기 시작했다.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그는 16세에 ‘휴튼타워호’를 타면서 선원이 됐다. 24세가 되던 1898년 4월 선장이 된 그는 영국의 유명한 탐험가 로버트 스콧(Robert Falcon Scott)의 대원으로 남극에 첫 발을 들였다. 섀클턴은 괴혈병으로 중도하차 하기도 했지만 남극 탐험에 대한 그의 열정을 꺾지는 못했다. 

남극 탐험에 대한 끝없는 열정과 도전

섀클턴은 평생 네 번에 걸쳐 남극에 도전한다. 그중에서도 1914년 8월, 28명의 대원과 떠난 세 번째 남극 탐험은 ‘위대한 항해’라고 일컬어진다. ‘인듀어런스호(the Endurance. 인내)’를 타고 영국을 출발해 남극 횡단을 목표로 나선 섀클턴과 대원들은 634일간 인간의 한계에 도전했다. 
처절한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섀클턴은 대원들에게 지칠 줄 모르는 힘, 창의성, 영감을 불어넣었다. 이것은 첨예한 경쟁과 급격한 변화, 혁신에 대한 끊임없는 요구를 하고 있는 오늘의 비즈니스 세계에서도 공감할 수 있는 빼어난 리더십이었다.

▲ 조난된 인듀어런스호

1914년 12월 남빙양에 있는 사우스 조지아(South Georgia) 섬에서 본격적으로 남극 횡단 길에 오른 섀클턴과 대원들의 탐험은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탐험시작 44일 만에 섀클턴과 대원들을 실은 인듀어런스호는 얼음 속에 갇혀 10여 개월을 표류하다가 결국 난파됐다. 남극 횡단은 커녕 남극점에 도달하기도 어려워진 상황에서 섀클턴은 대원들과 얼음위에서 텐트를 치고 5개월을 버텼다. 
결국 섀클턴은 전 대원들의 귀환을 명령하고 북서쪽 300km 지점의 스노우힐을 향해 움직였다. 그러나 스노우힐까지 가는 길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지칠대로 지친 대원들은 하루 1km도 채 안되는 행군속도를 보였고 그로인해 행군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마주치게 됐다.

“벤조는 얼음세계에 갇힌 우리 마음을 치료해줄 좋은 약”

극한의 상황에 이르자 대원들간에는 불신의 씨앗이 싹트게 됐다. 특히 전직 기상학자였던 허시는 매일 같이 빗나가는 일기예보로 모든 대원들에게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허시가 벤조(Banjo)라는 현악기를 잘 다룬다는 것을 알고 있던 섀클턴은 “벤조는 얼음세계에 갇힌 우리의 마음을 치료해줄 좋은 약”이라며 허시에게 저녁시간마다 악기를 연주하라는 임무를 내렸다.
한 대원은 “연주되는 벤조의 선율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생소한 것이었지만 두려움을 잊을 수 있게 해줬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자칫 조직 내 분열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리더 섀클턴이 구성원들의 특징을 간파함으로써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을 수 있었다.
갈등이 섣불리 다뤄지거나 억압되면, 결국 해소되지 않은 긴장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파괴적이 될 수 있다. 생사가 걸린 상황에서 이러한 긴장은 육체적인 공격이나 팀워크의 와해로 인해 조직의 죽음을 불러 올 수도 있다.
섀클턴은 대원들에게 아무리 사소한 의견 차이라도 자신에게 말하게 함으로써 긴장을 증폭시키거나 단합을 해칠 수 있는 불씨를 사전에 파악했다. 또한 대원 선발과정과 탐험 초기에 섀클턴은 태도나 행동이 팀의 사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거나 리더십에 반발할 가능성이 있는 대원들을 파악했다. 그는 이런 대원들을 멀리 하기 보다 오히려 더 감싸 안았다.

“우리는 하나다”

커다란 도전에 직면했을 때 팔로워들은 리더의 언행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하나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다.” 섀클턴은 인듀어런스호가 침몰하기 전 저녁식사를 마친 후 대원들을 전원 선장실로 집합시켰다. 이 모임은 자발적인 토론을 유도하고, 단결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시간이 흐르자 섀클턴은 모두 머리를 자르는 의식을 행할 것을 제안했고, 그 의식을 통해 공동의 정체성을 확인했다.
공동의 정체성이나 충성도가 없는 곳에서는 결코 팀워크가 생길 수 없다. 섀클턴은 모든 구성원들로 하여금 정보를 공유하고, 과업에 동참하도록 먼저 솔선수범했으며 대원들 스스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대원들 각자에게 자신이 팀에 큰 영향을 미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심어줬다. 특히 섀클턴은 계획을 변경할 때마다 공개 토론을 통해 대원들의 의견을 촉구했다.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이 반영됐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특권의식을 버려라

이와 동시에 섀클턴은 대원간 이질감을 최소화하고 서로에 대해 예의를 지키고 존중했다. 그는 이질감을 가질수록 팀은 분열하게 되고 결국 가장 중요한 순간에 팀원이 함께 에너지를 모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듀어런스호 선상에서 모든 대원들은 신분과 부서를 초월해 평등하게 생활했다. 섀클턴은 이런 평등한 의식과 공평한 처우 규범을 강화하기 위해 리더인 자신부터 어떠한 특권도 누리지 않으려 했다. 그는 대원들과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음식을 먹었으며 매일매일의 일상적 잡무에 있어서도 자신의 순번을 빼놓지 않고 지켰다. 그리고 주방장이 그에게 특식을 제공했을 때도 공평의 원칙을 위배하는 것이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800마일 떨어진 사우스 조지아 섬까지 보트 항해

안전해 보이는 길을 택하는 것이 위험한 일일때도 종종 있다. 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위험과 예상되는 결과간의 균형을 유지하고, 시도할 가치가 있는 위험을 과감하게 택할 용기를 지녀야 한다.
섀클턴 일행은 엘리펀트 섬에서 상륙하게 됐지만 구조될 희망이 전혀 없어 보였다. 식량도 바닥이 나고 있었다. 결국 신중하게 가능성을 계산해 본 섀클턴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시도해 보지 않았던 800마일 거리의 사우스 조지아 섬까지 보트 항해를 시도하게 된다. 이것은 극도의 위험과 고난이 따르는 항해였으며, 험난한 바다와 거친 바람과 끊임없이 사투를 벌여야만 했다. 실로 목숨을 건 극한의 작업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 포기 하지 않았다. 죽음과 직면한 상황에서도 당당하게 맞섰다. 결국 그들은 거친 남극해를 건너 안전한 육지를 찾는데 성공했고, 엘리펀트 섬에 남아 있는 대원들과 무사히 영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진정한 리더십이 무엇인지 보여줬다”

인듀어런스호의 무사귀환 이후, 섀클턴은 하루아침에 런던의 저명인사가 됐다. 그때의 체험을 기록한 책을 내고 강연활동을 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그는 런던이라는 도시가 주는 안락함을 원치 않았다. 그 안락함은 곧 눈보라가 몰아 치는 혹한의 남극보다 섀클턴을 힘들게 했고, 결국 1920년 봄, 다시 남극탐험의 길에 올랐다. 하지만 사우스 조지아를 떠난 직후, 섀클턴은 심장 발작을 일으켜 쓰러지고 말았다. 

▲ 섀클턴의 묘지

영국의 전기 작가 롤랜드 헌트포드는 ‘섀클턴 평전’을 통해 “섀클턴은 기계에 의한 탐험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 순수한 인간의 힘만으로 탐험했던 시대의 대미를 장식했다. 그의 탐험은 영국인들에게 극지방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었으며, 자긍심을 심어줬다. 그는 또한 진정한 리더십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줬다. 섀클턴으로 말미암아 극지방을 탐험했던 탐험가들은 사람들로부터 영웅으로 칭송받을 수 있게 됐다”고 적었다. 
노르웨이의 극지탐험가 아문센은 “나는 섀클턴이 그처럼 보잘것 없는 장비로 그와 같은 일을 해냈다는 사실에 경탄을 금할 수 없다. 만일 내가 섀클턴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탐험을 포기하거나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섀클턴의 용기와 결단력, 그리고 대원들을 이끄는 리더십은 위대하다. 경험만 약간 더 있었더라면, 그는 남극점 정복과 남극대륙 횡단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고도 남았을 것이다”라고 평했다.
위대한 실패자 섀클턴. 그의 삶은 우리에게 이렇게 웅변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라. 살아 있는 한 절망하지 마라.”

인사이트코리아, INSIGHT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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