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에 철갑을 입히다!
말에 철갑을 입히다!
  • 이종호 한국과학저술인협회장
  • 승인 2016.03.03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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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최강 고구려의 비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요건이 있어야 하지만 일반적으로 탁월한 지도자와 우수한 장병들이 있어야 한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아무리 많은 부하와 좋은 무기를 가지고 있더라도 효율적인 작전을 구사하지 못하면 패배한다. 반대로 병력의 수에서는 비록 열세이지만 장병들의 사기가 드높고 지도자가 유효적절한 작전을 구사한다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직접 전투에 임하는 장병들의 사기를 높이는 방법은 무엇인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장병들에게 아무리 어려운 전투라도 패배하지 않는다는 신념과 자신이 죽지 않는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다. 자신이 벌인 전투는 반드시 이기며 절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장병들의 사기는 올라간다. 이러한 믿음을 장병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적보다 더 좋은 무기를 지니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의 전투에서는 장병들에게 질 좋은 갑옷, 방패, 칼, 창, 활 등 첨단무기를 지급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구려에 대해 강한 매력을 갖는 것은 바로 현재 중국의 광대한 영토를 한국인으로 구성된 강한 군대로 마음껏 누비고 다녔다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재의 중국 지도에서 중국의 수도 북경지역 인근까지 고구려가 진출했다는 사실은 한민족으로 깊은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고구려가 중국을 호령하면서 사상 최대의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요인은 고구려인들의 강인한 개척 정신에도 있지만 동시대의 다른 나라에 비추어 최첨단 무기로 무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탱크와 같은 개마무사

고구려의 주력부대는 ‘개마무사(鎧馬武士)’로 구성되어 있었다. ‘개마(鎧馬)’란 기병이 타는 말에 갑옷을 입힌 것을 말하며 개마에 탄 중무장한 기병을 ‘개마무사’라고 불렀다. 오늘날 개마무사라는 단어에 익숙하지 않지만, 함경도에 있는 개마고원이 고구려의 개마무사들이 말 달리던 곳이라는 점에서 유래한 지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개마무사라는 단어가 과거에 우리 민족에게 익숙한 단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기병이 아무리 용맹하더라도 말이 부상당한다면 전투력이 저하될 수밖에 없으므로 말의 안전은 기병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러므로 고구려 기병의 경우에는 말까지 철갑옷으로 무장시켰다. 개마무사의 주무기는 창이다. 이 창은 보병의 창보다 길고 무겁다. 기병용 창을 삭(?)이라 한다. 중국식 삭은 보통 4미터 정도인데 반하여 고구려군의 삭은 평균길이 5.4미터에 무게는 6~9킬로그램 정도였다.
개마무사가 밀집대형 혹은 쐐기꼴(∧) 대형으로 5.4m가 넘는 긴 창을 어깨와 겨드랑이에 밀착시키고, 말과 기사의 갑옷(70여 킬로그램)과 체중에 달려오는 탄력까지 모두 합하여 적에게 부딪치면 보병으로 구성된 적군의 대형은 무너지게 마련이다. 이때 대기하고 있던 보병 등이 신속하게 투입되어 전세를 장악하면 승패는 이미 결정 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철투구와 철갑옷으로 무장하고 말에게까지 철갑옷을 입힌 고구려의 중무장 기병들은 적에게 공포와 위협의 상징이었다. 개마무사들은 전투 제일선에서 적진을 돌파하는 돌격대였고 방어전에서는 전면에서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방호벽이었다. 개마무사는 현대로 치면 탱크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개마무사들은 적의 활 공격은 물론 웬만한 창으로도 피해를 입지 않았으므로 고구려군은 백전백승할 수 있었다. 고국원왕의 무덤이나 덕흥리 벽화무덤에 있는 고구려의 고분벽화를 보면 행렬도에 왕과 귀족의 수레 제일 근처에 개마무사들이 열을 지어 행진하고 있다. 이는 전투시나 행군시 개마무사들이 항상 전면에 나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42년 고구려의 동천왕은 철기병, 즉 개마무사 5,000 명을 동원해 중국 삼국시대의 위나라를 공격하여 승리했다. 서양에서 개마는 13세기에야 나타난다. 1221년 페르시아의 우르겐지에서 몽고족과 전투를 벌였는데 이때 다량의 개마가 출현했다. 이로 미루어 고구려의 개마가 얼마나 빠른 시기에 도입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고구려의 경제력과 말 갑옷과 같은 우수한 장비의 대량 생산이 고구려의 국방력을 급속히 강화하고 그 영향력을 세계적으로 펼치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독자적인 철기 제작기술

개마무사의 철갑옷은 찰갑과 판갑으로 나뉘는데 고구려의 철갑옷과 철모는 대부분 물고기비늘처럼 얇은 철판을 네모나고 잘게 잘라 가죽으로 이어 제작한 찰갑(札甲) 형태다. 반면에 경주와 가야의 땅에서 발견되는 철갑옷은 대체로 너른 철판을 이용한 상체 보호용 판갑(板甲)형태다. 투구, 목가리개, 손목과 발목까지 내려덮은 갑옷을 입으면 노출되는 부위는 얼굴과 손뿐이다. 발에도 강철 스파이크가 달린 신발을 신는다. 
철투구와 철갑옷을 입은 무사를 태우는 고구려 개마는 크게 세 부분, 즉 말의 머리에 씌우는 말투구, 말갑옷, 말장구로 나뉜다. 말투구는 말머리 부분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통철판을 말머리 모양으로 오려서 둥그렇게 감싸 덮었다. 콧구멍 부분은 드러내거나 숨을 쉴 수 있도록 주름을 잡았고 타격을 받지 않는 부분은 그대로 두었다. 
말과 사람을 위한 갑옷을 강철로 만든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를 위해 개마를 만들 수 있는 철 기술과 아울러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고구려에서 다른 나라보다 먼저 철기가 발달한 것은 고구려에서 질 좋은 철광석이 많이 생산되는데다가 고조선으로부터 뛰어난 제련기술을 이어받은 뒤에 그 기술을 한층 더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볼 때 기원전 25세기경 현재 이라크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달했던 수메르에서 철기를 만들었으며 이란, 팔레스티나 등지에서는 기원전 1200~1000년경에 연철을 열처리하여 강철을 만들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고대 유럽에서 생산된 철기는 전부 연철(시우쇠, 단철이라고도 하며 탄소 함량은 0.035% 이하)이고 주철(선철이라고도 하며 탄소 함량은 1.7~4.5%)은 그보다 늦어 14세기경 독일의 라인 지방에서 처음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강철(탄소 함량 0.035~1.7%)은 선철의 경우 보다 높은 온도 즉 보통 1,500도 이상에서 가열하여 탄소와 그 밖의 원소들을 연소시키는 방법을 사용한다. 강철을 만드는 비법은 철의 용융점이 1,539도이므로 제련로 안의 온도를 1,500도 이상 올려야 한다.
중국에서의 철기 사용은 기원전 1,100년경이지만 기원전 7세기인 춘추전국시대에 비로소 주철의 주조에 성공했는데 중국 전국시대의 유적지 가운데 철기가 출토된 20여 군데 지방은 대부분 고조선 영역이다. 이것은 이들 유물이 중국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지역에 살고 있던 고조선인들에 의해 독자적으로 개발되었다고 믿는 것이 자연스러운 추론이다. 즉, 중국과 완전히 다른 청동기술을 발전시킨 고조선에서 철기도 독자적으로 발전시켰다는 뜻이다. 놀라운 것은 그 당시에 이미 세계 어느 나라도 갖지 못한 첨단 기술인 강철을 주조하는 기술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평양의 강동군 송석리 1호 석관 무덤에서 나온 쇠로 된 거울에 대한 연구 결과인데, 직경 15센티미터, 두께 0.5센티미터 되는 이 둥근 거울은 앞면이 매끈하고 뒷면에 1개의 꼭지가 붙어 있는데 절대 연도가 무려 3104±17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탄소 함량이 낮은 강철은 용광로에서 선철과 산화제를 작용시켜 얻는다. 쇠거울의 화학 조성은 탄소가 0.06%, 규소 0.18%, 유황이 0.01%로 저탄소강이다. 더구나 탄소가 적은 저탄소강임에도 불구하고 굳기가 연철보다 세고 유황도 매우 적은 양이다. 일반적으로 탄소 함유량이 1.0% 미만인 저탄소강은 온도가 적어도 1500도 이상 되는 용광로에서 직접 얻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쇠거울은 연철이나 선철을 두드려 만든 것이 아니고 용광로에서 직접 얻은 쇳물로 주조했다는 것이다. 


신라까지 전파…고대 한민족의 전용물

증거는 그뿐이 아니다. 평양시 강동군 항목리에서 출토된 쇠줄칼은 기원전 7세기경의 탄소 공구강으로 겉면에 격자 문양이 나 있어 줄칼 형태를 모두 갖추고 있다. 재질은 탄소가 약 1.0%, 규소 0.15%, 유황 0.0007%였는데 줄칼에 단접부가 없고 높은 온도에서만 형성되는 조직을 갖고 있었다. 
고고학사에 의하면, 강철은 아르메니아 지역의 히타이트족이 기원전 2천 년경에 개발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강철을 용광로에서 직접 얻은 것이 아니라 연철의 표면을 침탄법으로 열처리하여 강철로 변화시킨, 질이 낮은 것이다. 이 기술도 히타이트족이 계속 주조법을 독점하다가 그들이 멸망하자 여러 지방으로 퍼져나가 강철이 태어난 지 거의 10세기가 지난 기원전 12~10세기가 되어서야 이란, 팔레스티나, 메소포타미아와 지중해 동부에서 강철이 등장한다. 
한민족이 생산한 강철이 주목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에는 서아시아에서도 강철이 생산되기는 했지만 저급품이었다. 그런데 한민족이 생산한 강철은 고온의 용광로에서 직접 얻은 질 좋은 것으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확보하지 못한 기술이었다. 그 연대도 무려 기원전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조선 지역에서 발견되는 강철을 분석한 학자들은 고조선 장인들이 제련로 안의 온도를 적어도 1,400도 정도로 유지한 상태에서 철을 14~16시간 정도 녹여냄으로써 질 좋은 강철을 생산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고조선 장인들이 이와 같은 철을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제련로의 완벽한 설계, 연료와 탄소 공급원으로서의 숯의 사용, 효율적인 송풍관 등 덕분이다. 한민족이 건설한 2번째 국가로 추정되는 부여의 경우도 철기 생산에 있어서는 선진국이었다.
고조선과 부여의 제철기술이 고구려로 전승되어 각종 장비를 질 좋은 철로 만들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론으로 고구려는 다양한 제강법을 사용하여 각 제품에 알맞은 철기를 제작했다. 한마디로 고구려 독자의 철강 기법으로 여러 가지 철기를 만들었다.
고구려 동천왕이 개마무사 5,000명을 동원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그들을 무장시키기 위한 철의 양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개마무사 1인 당 말 갑옷 최소한 40킬로그램, 장병의 갑옷 무게 20킬로그램, 기타 장비 10킬로그램을 휴대한다고 해도 최소한 70킬로그램의 철이 소요된다. 이런 식으로 5,000명을 무장시키려면 단순하게 계산하더라도 350톤의 철이 필요하며 예비량을 가정한다면 최소 500여 톤이 있어야 한다. 현대의 제철 기술로는 500여 톤이 그다지 크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약 1,800년 전에 이 정도로 많은 양의 철을 생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한민족의 자존심인 개마무사는 고구려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구려가 개마무사의 본향이라고 볼 수 있지만 가야와 신라에서도 개마무사를 활용했다. 고구려는 개마무사가 고분벽화(안악3호분, 쌍영총, 삼실총, 개마총 등)에서 나타날 정도로 주력군으로 육성했는데 신라와 가야의 영역인 경북과 경남 일대에서 개마무사의 본격적인 증거물이 발견된다. 개마무사가 고대 한민족의 전용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마무사의 철갑옷인 찰갑옷과 판갑옷이 남한에서 두 종류 모두 발견되는 것도 이를 증빙한다. 말갑옷도 경남 함안 도항리 마갑총과 경북 경주시 황오동고분군에서 발견되었다. 신라지역인 황오동에서 고구려 개마무사를 상징하는 찰갑옷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신라가 적극적으로 고구려의 개마무사 전술을 활용한 것으로 생각한다. 한-중-일 동아시아 3국에서 황오동 유물처럼 중장기병의 무장상태를 보여주는 완벽한 세트가 갖춰진 사례가 보고된 바가 없다.

인사이트코리아, INSIGHT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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