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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2024-03-29 15:27 (금) 기사제보 구독신청
“어떤 일도 덮어놓고 덤벼든 적 없어”
“어떤 일도 덮어놓고 덤벼든 적 없어”
  • 박흥순 기자
  • 승인 2015.12.09 09: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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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현대맨’ 김문현 현대중공업 자문역이 말하는 ‘정주영 정신’

지난달 25일 탄생 100주년을 맞은 아산(峨山)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2010년 자유기업원이 ‘부활했으면 하는 기업인’ 설문조사 에서도 아산은 65%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기도 했다. 그가 생전에 한 ‘이봐, 해봤어?’라는 말은 기업인들이 최고의 경영어록으로 꼽았으며, 2006년 11월 타임(TIME)지는 정 명예회장을 ‘아시아의 영웅’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스산한 기운이 대지에 감돌고, 경제상황도 을씨년스러워, 그 어느 때보다 정 명예회장의 도전적 기업가 정신이 필요한 시기다. 마침 정 명예회장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정주영은 살아 있다’는 제목의 책을 펴낸 저자 김문현 현대중공업 자문역을 만나 아산의 리더십과 기업가정신에 대해 되새겨 봤다.

김문현 자문역은…

김문현 자문역(전 현대중공업 홍보담당 전무)은 성균관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현대그룹에 입사해 줄곧 홍보 한 우물만 파 왔다. 그는 현대자동차서비스에서 출발해 1990년대 초부터 2000년까지 현대그룹 문화실 홍보팀장으로 활동했다. 당시 소 떼 방북과 금강산관광 프로젝트의 홍보 기획을 맡는 등 현대그룹 창업자인 정주영 명예회장의 홍보 전략을 총괄하는 역할을 했다. 이후 현대중공업 홍보실장과 인재교육원장을 거친 뒤 현업에서 물러났다. 2014년부터 울산대학병원, 현대백화점, 현대해상화재, 현대미포조선 등에서 ‘위기를 기회로 만든 정주영 리더십’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는 등 정주영 명예회장의 기업가정신을 널리 알리는 홍보대사 역할을 묵묵히 해오고 있다. 한국 CCO클럽 멤버들과 함께 ‘한국경제를 만든 이 한마디’(공저)를 출간한 데 이어 최근 ‘정주영은 살아 있다’는 제목의 단행본을 펴내기도 했다. 

“그러니까 1992년 아산 정주영 명예회장께서 만든 통일국민당 시절부터 2000년까지 현대그룹의 홍보 컨트롤 타워인 그룹 문화실에서 일 했는데, 그때 그 분에 대해 많이 연구하고, 그의 철학을 깊이 있게 체득하려고 나름 노력했지요. 그러다 보니까 정 명예회장님의 깊은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됐습니다. 아마 그것이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군요.”

김문현 자문역은 자신이 정주영 명예회장에 관한 책을 출간하게 된 동기부터 설명했다. 아산 탄생 100주년에 맞춰 책을 펴낸 이유도 덧붙였다.
“일본 기업가 중 경영의 신으로 추앙 받는 파나소닉의 창업자 마쓰시다 고노스케 회장에 대한 서적은 500권이 넘습니다. 역시 일본 기업경영의 전설로 불리는 이나모리 가즈오 교세라 회장의 경우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분들에 관한 책은 많이 쏟아지는데 반해 정주영 명예회장님은 그렇지 않더군요. 물론 100주년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도 크지만 우리나라에는 그런 인물이 없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생전에 타임지가 아시아의 기업인으로는 유일하게 ‘아시아의 영웅’으로 선정한 분인데도 말이죠.”
김 자문역은 생각이 깊고 치밀한 사람이다. 이번에 ‘정주영은 살아 있다’는 책을 구성하는데도 그의 이런 성품이 잘 반영됐다. 
“책을 읽는 사람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시대입니다. 스낵컬쳐라는 말도 있지요. 때문에 책을 쓰면서 사람들이 아산의 기업가정신을 재미있게 이해하기 쉽도록 관련 에피소드를 2페이지 정도로 간략하게 정리했습니다. 책의 어떤 부분을 펼치더라도 에피소드를 쉽고 간단하게 읽을 수 있도록 하는데 초점을 뒀습니다. 에피소드 말미에 넓고 얕은 지식은 보너스라고 할 수 있죠.(웃음)”

“겁이 나거든 집에서 누워 기다려라”

요즘 이 땅에서는 ‘헬조선’이라는 말이 일상어처럼 쓰일 정도로 우리 사회 분위기가 각박하고 삭막한 편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지닌 에너지가 하나로 뭉치지 않고 분산돼 허공에 흩어지고 있는 모양새다. 이에 대해 만약 아산 정주영 명예회장이 살아 있었다면 어떤 말을 했을 것인지 물어 봤다.
“정 명예회장은 끊임없이 ‘도전’하고 ‘혁신’을 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 상황을 구실로 지금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참지 못 할 것이 분명합니다. 현실과 환경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데, 앞이 불확실하다고 해서 안주한다면 실패의 뿌리는 바로 거기서부터 자라난다고 보거든요. 한시도 안주하지 말라는 거죠. 새로운 성장동력을 가져올 신수종 사업에 도전하고 끊임 없이 신제품과 신기술을 개발해 내야 한다고 독려하는 분이셨어요. 저는 그런 정주영 정신을 ‘노마디즘(Nomadism)’으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유목민족을 의미하는 ‘노마드’라는 단어에서 볼 수 있듯 한 곳에서 정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목초지를 향해 옮기고 나아가라는 것이죠.”

실제로 아산은 끊임없이 도전했던 사람으로 유명하다. 
2006년 타임지는 그를 “현대그룹의 창업자인 정주영은 많은 사람들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했다. 1960년대 그는 세계은행이 경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한 한국의 첫 번째 고속도로를 건설했고, 산업 관계자들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한국산 자동차를 만들어 미국에 수출했으며, 경쟁자들이 코웃음 칠 때 한국에서 최초로 유조선을 만들었다. 아시아의 위대한 기업가 중 한 사람인 그는 빈곤에 시달리던 한국을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으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고 기렸다.
아산의 도전정신이 빛나는 대표적인 에피소드를 묻자 김 자문역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했다.
“기업이 조금 성공했다고 ‘야 이거 가지고 어떻게 한평생 놀고 먹어야 겠다’라고 하는 순간 게임은 끝납니다. 정 명예회장님도 그 점을 경계하셨죠. 기업이 이윤을 좇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기업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고요. 늑대가 피 맛을 알 듯 정 명예회장 역시 이윤 추구의 달콤함을 모를 리 없었겠죠. 하지만 그 분은 기업을 초월해 우리 사회의 보다 나은 미래를 현실의 이윤보다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도전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 산업항 공사였죠. 70년대초 오일쇼크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을 때 정 명예회장은 주변의 반대에 ‘겁이 나거든 집에서 누워 기다려라’는 말을 했습니다. 직접 중동진출을 진두지휘했죠. 그 결과 당시 우리나라 국가 예산의 절반에 해당하는 9억3000만 달러의 계약을 수주했습니다. 선수금 2억 달러만으로도 대한민국 외환보유고가 사상 최대를 기록했을 정도니까요.”

대안 없는 반대엔 ‘No’…치밀한 계획과 ‘Can do’ 정신

김 자문역이 전하는 아산은 결단력이 뛰어난 리더였다. 결코 자신이 한번 내린 결단을 철회하는 법이 없었다. 보다 나은 대안이 있으면 불치하문(不恥下問)의 자세로 답을 구했지만 대안없는 반대에는 단호하게 대처했다.
“정 명예회장은 대안 없는 반대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 항만을 건설할 때 500톤이 넘는 자켓을 국내에서 제작해 바지선으로 걸프만까지 옮긴 사례도 있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가능하고 비효율적이라며 결사적으로 반대를 했습니다. 정 명예회장은 그들에게 ‘그럼 대안을 말해봐!’라고 말했는데, 모두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는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현지에서 직접 자켓을 생산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겁니다. 정 명예회장은 ‘중동 땅까지 와서 고생하면서 손해 볼 수는 없다’며 국내에서 우리 손으로 제작한 자켓이어야 일자리도 창출하고 부가가치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배경에는 국가와 국민 경제를 위해 이바지 하겠다는 정 명예회장의 속내가 담겨 있었던 겁니다.”
아산의 이런 결단력을 두고 무대포거나 무모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이 같은 의견에 김 자문역은 아산의 치밀함은 상상을 초월한다며 혀를 내둘렀다.
“정 명예회장은 어떤 일을 할 때 사전에 수없이 고뇌하고 계획을 세운 사람입니다. 한비자에 나오는 비막여대목막여소(鼻莫如大目莫如小)라는 말처럼 어떤 일을 계획할 때면 각각의 단계를 세심하게 생각하고 현장 담당자들의 의견을 경청했습니다. ‘모래는 어디서 파다가 어디다가 뿌려라, 자갈은 어떻게 사용해라’는 등 작업과정을 일일이 계획하고 확인했습니다. 남들이 무모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자신감의 원천은 그런 치밀한 계획 속에 있었습니다.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데는 90%의 된다는 ‘Can do’ 정신과 10%의 자신감이 있었기에 가능했죠.” 
김 자문역은 아산을 ‘집 밖에서 돈을 벌어 가족을 먹여 살리는’ 기업인이라고 묘사했다. 당시 불모지나 다름없던 해외시장에 혈혈단신으로 뛰어 들어 엄청난 리스크를 안고 귀한 달러를 벌어들여 국가 경제성장에 기여한, 집안의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한 기업인은 근현대사를 통틀어 손에 꼽을 정도가 아니지 않는냐고 물으며 말을 이었다.
“한번은 일본에서 경영의 신이라 추앙 받는 마쓰시다 고노스케 회장과 정 명예회장이 만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 명예회장은 고노스케를 그렇게 높이 평가하지 않았죠. 경영은 훌륭하게 해냈으나 큰 틀의 업적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그는 이어 “정 명예회장의 경우엔 국토의 서쪽 지형을 바꾼 서산간척지부터 국가의 대동맥이라 할 수 있는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서로 스케일이 다르다고 생각한 것이죠. 정 명예회장이 소비재 시장에 뛰어들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내수시장에서 성장하는 것도 국민을 위한 길인 건 분명합니다. 훌륭한 제품을 생산해 국민의 생활수준을 높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정 명예회장은 그보다는 국가와 국민 모두에게 보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국가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기초산업부터 탄탄하게 해야겠다고 결심했던 겁니다.”

국가와 민족의 내일을 위해…‘先公後私’ 철학

어린 시절 누구보다 가난을 뼈저리게 체험했던 아산이 ‘애국애민’의 경영철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아산은 ‘나라가 잘 되는 것이 우리가 잘 될 수 있는 길이다’는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철학을 밑거름으로 삼아 기업을 경영했다.
“정 명예회장은 정말 애국심이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그는 평생 커피를 먹지 않았는데, ‘배도 부르지 않은 것을 마셔서 외국에 돈을 퍼다 줄 일이 있느냐’는 생각이었죠. 혹자들은 정 명예회장의 애국심을 의심할지 모릅니다. 정치인들과 유착관계를 통해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활용한 게 아니냐고 말이죠. 하지만 정 명예회장은 ‘민간이 할 일을 정부가 지나치게 간섭해서는 안 된다’라는 쓴 소리를 곧잘 했습니다. 덕분에 신군부 시절 항상 협박에 시달려야 했지만요.” 
이어 김 자문역은 아산이 얼마나 국민을 사랑한 인물이었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우리 사회는 그늘진 곳이 많이 생겼습니다. 정 명예회장은 이런 그늘에 있는 사람들을 보살피기 위해 애썼죠. 그는 먹을 것이 없어 배고픈 사람들, 몸이 아파도 돈이 없어 치료하지 못하는 사람들, 돈이 없어 공부하지 못하는 학생들처럼 이른바 ‘3부류의 사람들’이 가장 불쌍하다며 그들을 돕고자 노력했습니다. 이것이 아산재단의 설립취지였습니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 병원을 설립한 것이 가장 좋은 예가 되겠네요.”
아산은 1977년 ‘아산사회복지재단’의 설립과 맞물려 보성·영덕·보령·정읍·홍천·강릉 등 전국의 산간벽지 의료 소외 지역에 종합병원을 잇달아 세웠다. 하지만 젊은 의사들 중 그 누구도 오지의 병원에 가겠다고 자원하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현재의 서울아산병원은 그런 이유로 생겨났습니다. 지방병원에 자원하는 의사도 없고, 수익도 발생하지 않아 운영이 어렵다는 보고를 받은 정 명예회장은 ‘그럼 서울에 아시아에서 가장 시설 좋고 훌륭한 병원을 만들라’고 지시했죠. 그 병원에서 요직에 앉기 위해서는 지방에 설립한 병원의 근무 경력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조건도 함께 걸었어요. 그러자 지방병원을 지원하는 사람이 크게 늘었죠. 이처럼 정 명예회장은 처음부터 영리를 추구할 목적으로 병원을 세운 것이 아니라 긴 안목과 혜안으로 국가의 미래를 내다봤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김 자문역은 지방에 병원을 설립한 12년 후 서울아산병원이 생긴 이유를 설명하며 아산이 영리추구보다 사회복지를 감안하며 아산병원을 설립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아산이 사업을 통해 돈을 벌겠다는 의지보다 국가와 민족에 도움을 주는지 먼저 검토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또 다른 에피소드도 덧붙였다.

“정 명예회장은 제품을 만든 후 ‘포장’하는 것을 싫어했어요. 제품을 잘 만들면 알아서 사람들이 잘 살 것인데 사탕발림으로 물건을 꾸미는 것을 하지 말라고 했죠. 적어도 과거 통일국민당시절 언론과 대화의 필요성을 느낀 후 문화홍보실을 설치하기 전까지는 말이에요. 아산복지재단을 설립하고 각종 사회공헌사업을 벌이면서 그것을 외부에 알리지 말라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한번은 2012년에 현대중공업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쉼터를 지원하게 됐는데, 그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아산복지재단이 출범한 직후부터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평생무료 진찰권과 틀니, 정기검진 등을 제공하고 있었는데 바로 정 명예회장의 지시에 의해 그렇게 했던 것이죠. 정 명예회장에 대한 홍보와 그룹 홍보를 담당하고 있던 저 자신도 미처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아산과 사랑에 빠진 사람’

보통 오랜 직장생활을 마치고 현역에서 한발 물러난 후에는 자기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지내기 마련이다. 김 자문역 또한 지난해 현직에서 물러난 후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스스로를 ‘정주영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위대한 기업인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그의 정신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여기거든요. 때문에 정 명예회장과 관련한 내용을 사회에 적극 알리는 홍보대사를 자처하고 있는 거고요. 경주·울산·산청 등 저를 불러 주는 곳이라면 어디든 한 걸음에 달려가서 아산의 정신을 전하는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중국의 철도청이라 할 수 있는 남차그룹의 연수단을 울산의 현대중공업 조선소로 안내해 강의를 한 적도 있어요. 워낙 지방으로 다니다 보니 차비도 남지 않을 때가 많죠. 하지만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요. 국내는 물론 보다 많은 외국인들에게도 아산 정 명예회장의 경영철학을 널리 퍼뜨리고 싶어요. 그분이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적인 경영인으로 더욱 널리 평가받고, 현 시대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아산의 정신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더 할 나위 없겠습니다.”

인사이트코리아, INSIGHT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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