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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2024-03-28 19:16 (목) 기사제보 구독신청
진시황제는 한반도서 불로초를 찾았나
진시황제는 한반도서 불로초를 찾았나
  • 이종호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
  • 승인 2015.08.11 09: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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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호의 톡톡 사이언스]

지상에 태어난 생물은 언젠가 죽어야 하며 이러한 죽음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경험할 수 없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의 근원은 죽음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다는 데서 비롯한다. 그러므로 죽음을 피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죽지 않는 법을 알아내는 것이다. 이것은 오래 살려는 인간의 욕망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역사 이래로 인간은 수많은 장수 양생법을 만들어 냈다. 고대 인도인은 호랑이의 고환을 먹었고, 히브리인과 시리아인들은 젊은이의 피를 마시거나 그 피로 목욕을 했다고 전해진다. 15세기 교황 이노센티우스  8세는 죽기 직전에 세 명의 소년 피를 수혈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중에서 진시황제의 불로초야말로 압권이다.

한국인에게 진시황제라면 대체로 두 가지를 머리에 떠 올린다. 한 가지는 만리장성, 또 다른 한 가지는 불로초이다.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약을 구하기 위해 남다른 공을 들인 사람이 바로 진시황제이다. 그런데 한국인으로서는 다소 놀랍지만 진시황제가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서불(서복, 서시)이라는 방사를 삼신산이 있는 곳으로 파견했는데 그 삼신산이 바로 한국에 있다는 것이다.

“한국 三神山에 불로초 있다”

진시황의 불로초가 한국과 연계된다는 가설은 학계에서 두 가지로 나뉜다. 한 가지는 서복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것이 사실이라는 것이고 또 다른 설은 이 가설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국의 도교는 불로불사를 한 몸에 구현한 ‘선인(仙人)’을 목표로 했던 종교이다. 물론 그 시조라 불리는 노자와 장자가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것과 같이 현실도피적이고 염세적인 가르침을 펼쳤던 사상가만은 아니지만 그들의 사상이 중국 고유의 신선사상과 결부되어 민간에 퍼지면서 도교라는 전대미문의 종교가 탄생했다. 도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불로불사의 선선이 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인데 이 중에서 가장 많이 시도된 것이 복약으로 한 마디로 선약(仙藥)을 만들어 먹는 것이다. 고대인들은 신선이 존재한다고 믿었으므로 그들이 먹는 단약이 어디엔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즉 일반이 쉽게 구할 수는 없지만 지구 상에서 자라는 식물들 중에 환상적인 선약 즉 불로초가 있다는 설명이다.

불로초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늙지 않는 선약이 불로초만은 아니라고 알려지지만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식물이라면 더욱 환상적이지 않을 수 없다. 불로초 찾기에 가장 열을 올린 사람이 바로 진시황제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진시황이 서불을 통해 불사약을 구하려는 내용은 매우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시황 28년(기원전 219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제(齊) 땅 사람인 서불(徐市) 등은, 바다 속에 삼신산(三神山)이 있는데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이라 하며 그곳에 신선들이 살고 있으니 재계(齋戒)한 후 동남동녀(童男童女)를 데리고 신선을 찾으러 가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서불은 동남동녀 수 천 명을 데리고 신선을 찾으러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서복은 기원전 255년 제(齊)나라 산동반도 낭야(浪耶)군에서 태어나 천문, 지리, 해양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인 방사로 알려진다. 진시황의 불로초 찾기는 계속되어 시황 32년(기원전 215년)에 진시황이 갈석산(碣石山)에 가서 연(燕)나라 출신 노생(盧生)을 파견하여 선문(羨門)과 고서(高誓 : 전설상의 신선이름)라는 신선을 찾아보도록 했다는 기록도 있다. 시황 35년(기원전 212년)에도 노생으로 하여금 불로초 찾기를 시도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국인들의 관심을 자아내게 하는 것은 삼신산이 봉래산(금강산), 방장산(지리산), 영주산(한라산)을 의미한다는 설이다. 바로 서불이 한국을 찾게 된 이유가 바로 이들 산에 있는 불로초를 찾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서복, 한국에 왔다

경남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 금산(錦山) 기슭에 있는 거북바위에 고대의 암각문이 새겨져 있다. 이 암각문은 서불이 각자한 것으로 알려지는데 이 암각문을 두고 전혀 상반되는 주장이 제기된다. 전자는 이것이야말로 서불이 한국을 방문한 증거라고 주장하는 반면 후자는 이것이야말로 서복이 한국을 방문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주장한다.

대체 이와 같은 엇갈리는 주장이 왜 나오는지 궁금할 것이다. 
암각문이 서불과 관계되는 것은 위창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선생과 관련이 있다. 오세창 선생의 아버지인 오경석이 암각의 탁본을 1860년에 중국으로 가져가 당시 중국에서 금석학 전문가에게 감식을 의뢰한 결과 ‘서불과차(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고 해석했다는 것이다. 

서복은 시황 28년(기원전 219년)에 진시황제의 허가를 받아 동남동녀 수 천 명을 데리고 불로초 찾기에 나섰지만 첫 출항은 실패했다. 한국 측의 설명에 따르면 그 후 2차 대규모 선단을 거느리고 출항했는데 한국 남해의 영악인 보타산, 지금의 금산 산하 앵강만의 포구 벽련포와 두모포에 기착했다. 이들은 이곳을 중심으로 수년간 불로초를 찾다가 당시 상륙한 지점에 암각문을 새긴 후 다음 목적지로 출발했다는 것이다. 

자료를 보면 삼신산이 발해(渤海) 안에 있고 동해(東海) 안에 이주(夷洲)와 단주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서복이 불로초를 얻기 위해 단주와 이주를 향해 떠났음이 틀림없는데 발해와 동해는 한국인에게 너무나 친근한 단어다. 이들 발해와 동해를 한국의 지명으로 간주한다면 서복이 한국을 방문했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중국 <산동사회과학원> 이영선(李永先)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서복은 한국에서 진한(辰韓)을 개발, 건설하였고 그 후예들은 한민족에 융합되었다. 그는 일본에서 당지 토착민들과 평화적으로 거(居)하면서 벼를 심는 방법, 고래 잡는 방법, 누에치고 비단을 짜는 방법, 초약을 채집하여 병을 고치는 방법을 가르쳤다.”

진한은 한국의 삼국시대 전의 원삼국시대를 말하는데 진시황제는 기원전 3세기를 의미하므로 연대로도 부족함이 없다. 이를 근거로 하면 동남동녀 수천명을 데리고 불로초를 찾아 나선 서복이 배를 타고 동해를 항해하여 한반도 남쪽에 왔으며 그 증거로 남해의 낭아리와 서귀포 정방폭포 바위벼랑에다 ‘서불과차’라는 글씨를 새겨 놓았다는 설명이다. 또한 제주도의 서귀포라는 이름도 서복과 연관 짓는다. 서귀포는 ‘서복이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뜻으로 명명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복이 제주도를 방문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삼신산 중 하나인 한라산(영주산)을 찾은 서복 일행이 불로초를 찾아보았지만 실패했다고 인식한다. 참고로 일부 학자들은 제주도에서 발견되는 시로미와 영지버섯을 불로초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네이처’지는 불로장생 약초에 대해 적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불로장생 약초는 중국 원산인 황기(Astragalus membranaceus)였다고 한다. 황기는 한약재이면서도 닭백숙 같은 요리에도 즐겨 쓰는 콩과식물로 귀한 인삼 대신 ‘꿩 대신 닭’으로 사용한다. 황기가 불로장생 약초였다니 허탈하다는 사람도 있지만 불평할 필요는 없다. 황기도 먹고 인삼도 먹으면 효과가 배가될지 모른다.

서복은 한반도에 오지 않았다

앞의 설명을 보면 서복이 불로초를 찾아 한국을 방문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것처럼 보인다. 동해와 발해가 한국과 연계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에 제시된 사료를 면밀히 검토한 일부 학자들은 서복의 한국 방문설을 당연코 부정한다. 한마디로 서복이 한국을 방문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고조선답사회’의 김세환 선생은 서복이 처음에 신선을 찾아간 곳은 발해였으며 돌아와서 진시황에게 거짓으로 보고하고 동남동녀 3천명을 데리고 간 곳이 동해라는 데는 인식을 같이한다. 그런데 이들 발해와 동해가 한국인이 생각하는 곳과는 전혀 다른 곳이라는 설명이다. 

‘후한서-왜지(倭地)’조에 이주(夷洲)와 단주(亶洲)가 있는데 서복이 마침내 이 주에 머물렀다 했다. 문제는 ‘임해수토지’에 이주는 절강성 임해의 동남 2,000리에 있다고 적혀 있다는 점이다. 임해에서 동남 2,000리 되는 곳에 지금의 대만이 있다. 서복이 바다를 건너 간 이주와 단주는 한반도 남해나 제주도가 아니라는 설명인데 이를 부연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에서 부르는 동해는 장강하구에서 대만해협까지다. 그러므로 이주(夷洲)는 지금의 대만이고, 일본의 이칭(異稱)에 단주가 없으므로 단주는 유구군도(硫球群島)의 충승(沖繩, 오키나와) 본도라고 추정할 수 있다.”

위 견해에 따르면 한국 남해 낭아리에 있는 암각문을 ‘서불과차’라 읽는 자체가 서복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갔다는 선입견에서 나온 착각이며 오류라는 설명이다. 
남해 낭아리의 암각문 서체도 서복이 한국에 오지 않았다는 증거로 제시된다. 진시황이 통일하기 전 각국의 글이 달라 소통에 문제가 있자 대전(大篆)을 소전(小篆)으로 자형을 통일시켰다. 서복이 동남동녀를 데리고 바다에 들어가 돌아오지 않은 해는 기원전 210년이었으므로 서복이 소전을 습득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만약 서복이 한반도의 남해에 왔다고 한다면 그는 의당 소전으로 각자했을 터인데 남해의 암각문은 소전의 서체가 아니므로 서시가 한국의 남해나 제주도에 온 적이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이 삼신산이 발해에 있다고 믿은 이유에 대한 설명도 흥미롭다. 
산동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봉래시에 봉래각이 있는데 이곳은 여덟 신선이 바다를 건넜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곳으로 중국 신선사상의 근원지라고 알려진다. 학자들은 이곳 산동반도가 신선사상의 근원지가 된 이유를 그동안 부단히 찾았는데 근래 그 증거를 제시했다. 다소 아쉽기는 하지만 학자들이 제시한 증거는 신기루(蜃氣樓) 현상이다. 

1988년 1시간 넘게 지속된 신기루 현상이 포착되었는데 마치 커다란 궁궐이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신기루는 해수면의 기온차로 생기는 착시현상인데, 옛날 신선을 신봉하던 중국인들에게는 이 신기루가 바로 신선들의 세상으로 비쳤다는 것이다. 진시황도 이곳 봉래각에 세차레나 올랐으니 신기루를 보고 신선이 바다 안에 있다고 믿고 불로초를 더욱 갈망하여 서복으로 하여금 삼신산을 갔다 오라고 명령했다는 것이다. 즉 신기루를 삼신산으로 착각했다는 설명이다. 

 

 

 

이종호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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