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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2024-04-19 11:00 (금) 기사제보 구독신청
118년 斗山 역사를 일군 주역들 ,박승직-박두병-정수창의 ‘장수 DNA’
118년 斗山 역사를 일군 주역들 ,박승직-박두병-정수창의 ‘장수 DNA’
  • 인사이트코리아
  • 승인 2015.06.17 11: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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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100년에 기업 두산에 길을 묻다.-2

국내 최장수 기업인 두산은 박승직(1864~1950) 창업주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100년이 넘는 동안 8명의 회장에 의해 운영돼 왔다. 두산그룹은 초창기 민족자본의 모습에서부터 인재를 중시하는 지금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그 시대가 원하는 기업의 모습으로 변신해 왔다. 고비도 수차례 겪었다. 실제로 기업 간판만을 남겨둔 채 수개월간 판매활동과 같은 일체의 기업경영활동을 하지 않았던 적도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장수기업의 DNA는 무엇일까? 요즘 같은 경제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그들만의 노하우는 어떤 것이 있을까? 두산그룹의 시대별 주력 사업 분야와 역대 최고경영자들의 스타일에는 총체적 난국과 같은 현 상황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는 인사이트가 있지 않을까?

 

[신용을 최고로 여긴 거상 ‘박승직’]

두산그룹의 전신은 배오개에 위치한 박승직 상점으로 그 창업주는 매헌(梅軒) 박승직이란 인물이다. 그가 활약하던 1900년대 초창기는 개화의 물결과 주변 열강들의 힘 싸움에 한반도에 격변의 바람이 불던 시기다. 시대적으로 변화에 능숙한 리더가 필요했고 박승직은 이 요건을 충족시키는 리더의 자질을 보여줬다. 그는 시대의 흐름에 맞는 적절한 변화도 추구하면서 ‘고인 물’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동시에 경기불황이 전 세계를 강타했다. 이 여파로 1919년 박승직상점의 주력상품이었던 면포, 면사의 판매가 부진을 면치 못하게 됐다. 박가분의 판매실적에도 불구하고 박승직상점의 경영은 매우 악화됐는데, 박승직은 상점의 자산을 정리하고 주식회사 형태로 개편을 도모하면서 경영난 극복을 꾀했다. 이 과정에서 박승직은 주식회사 개편과 함께 재고상품에 대한 보험에 가입하는 등 근대적인 경영을 도입하기도 했다.

▲ 1896년 8월1일 배오개에 '박승직 상점'을 개설했다

물론 주식회사로 개편하면서 진통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주당 가액을 50원으로 총 1,200주의 주식을 발행했는데, 이중 50% 이상을 한일합작회사인 ‘공익사’가 소유하면서 소유권과 경영권이 박승직일가로부터 상당부분 분리됐다. 1930년대 경기가 회복되면서 ‘공익사’가 소유한 주식을 모두 찾아오기까지 일본인들의 경영관여는 계속 됐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상점경영이 정상궤도에 오르면서 박승직은 이토츄상사(伊藤忠商事)와 합작했고, 이전보다 다양한 상품을 취급하기에 이르렀다.

어떤 사람의 의견도 가벼이 여기지 않다

그는 환포상, 미곡, 식염의 도/소매에 관여하는 등 끝없이 사업 분야의 확장을 도모했다. 비록 재래식 물품의 상거래 형식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가 보여준 경영의 유연함과 넓은 시야는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바뀌는 요즘에도 좋은 본보기라 할 수 있다.
박승직이 지닌 경영의 유연함은 그의 ‘히트작’ 박가분(朴家粉)과 함께 잘 알려져 있다. 또 그는 어떤 사람의 의견도 가벼이 여기지 않고 귀담아 듣는 성공하는 리더의 품격을 갖추고 있었다.
박승직시대의 주력분야는 생필품이었다. 배오개에 자리 잡은 박승직상점은 서울 동부권과 강원도 일대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면포를 포함해 수 만 가지 생필품을 취급하면서 승승장구하던 박승직상점의 가장 대표적인 품목은 ‘박가분’이었다.
박가분의 시초는 박승직의 부인(정정숙)이 집안에서 부업으로 만들곤 했던 것이다. 그녀는어느 날 길거리에서 한 노파가 분(粉)을 만들어 포장해 파는 것을 보고 동네 아낙들과 가내수공업 형태로 제작했다. 부인의 건의로 당시 여성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박승직은 이것을 상품화함으로써 박승직상점의 대표품목으로 자리 잡게 했다.
박승직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박가분제조본포’를 설립하면서 종로구 연지동으로 진출했다. 사업은 날로 번창해 여직공만 30여명으로 늘어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경기도 연천과 강원도 철원, 평강 일대에 대리점을 두고 상표 등록을 하는 노력 끝에 하루 평균 1만개의 판매고를 올리는 등 성공가도를 달렸다.

‘모든 것을 변화시키되 믿음마저 바꾸지 마라’

이와 함께 그가 조선 최고의 상인이 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모든 것을 바꾸는 와중에도 변치 않았던 신뢰를 꼽을 수 있다. 물려받은 재산은 물론 수중에 충분한 자금도 없던 그는 급변하는 격랑의 세월 속에서 생존을 위해 대중들에게 자신과 기업을 ‘믿을 수 있는 곳’이라는 인식을 심었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광복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었다. 사회적으로 큰 혼란이 빚어지고, 대일 무역도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 박승직과 경영진은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8월 13일부터 창고에 쌓여있는 상품들을 처분했다. 사회가 혼란한 와중에 현물을 손에 쥐고 있었으면 더 많은 부(富)를 수중에 넣을 수 있었지만 박승직은 깨끗한 마무리를 선택했다. 지역별로 할당된 분량에 맞춰 공정가격으로 제품을 처분했다.
이로써 박승직상점은 개업 48년만인 1945년 9월 실질적인 영업활동을 잠정 중단했다. 하지만 그의 혼과 경영이념은 그 이듬해 두산상회의 설립과 함께 부활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경영자로서의 냉정한 판단과 양심은 훗날 그의 장남인 박두병 두산 초대 회장에게 이어져 오늘날 두산의 근간이 됐다.

[ 강력한 카리스마…아시아 상공인의 별 ‘박두병’ ]

박승직 창업주의 뒤를 이은 박두병(1910~1973) 두산그룹 초대회장은 해방전후시대와 한국전쟁 이후 경제성장기에 활약했다. 이 시기는 해방직후의 혼란과 전쟁의 폐허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 하나의 목표, 결과로 귀결시킬 수 있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리더가 필요했다. 연강(蓮崗) 박두병 회장은 직원들과 상공업자를 주축으로 각계각층을 이루는 사회구성원들의 신임을 한 몸에 받으며 이 같은 시대의 부름에 응했다.
이런 대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박두병 회장은 한국을 대표해 아시아 상공인의 지도자로 활동하기도 하며, 자신이 가진 강점인 강력한 리더십으로 두산그룹의 성공을 선두에서 진두지휘했다.

“마무리를 깨끗이 하라”

박두병 회장은 생전 ‘마무리를 깨끗이 하라’는 말을 즐겨 썼다. 시작만큼 끝마무리를 중요하게 여긴 그는 몇 가지 경영전략을 세운 후 실천해 나갔다. 그는 목표를 세우는 것만큼 달성하는 것도 중요하게 여긴 리더다. 실현할 수 있는 목표를 세워나가는 경영철학을 고수했는데 그로 인해 두산그룹은 늘 성장하는 기업으로 주목받을 수 있었다.
박두병 시대의 두산은 많은 사업에 진출하며 사세를 확장해 나가는 시기였다. 수직적, 수평적 다각화 전략으로 많은 사업에 진출한 박두병의 두산그룹을 이야기할 때 동양맥주를 빼놓을 수 없다. 동양맥주를 통해 두산그룹을 성장시킨 박두병 회장은 맥주 생산 증대를 핵심전략으로 내세웠다.
당시 맥주는 고급 술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강했던 탓에 시장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1953년 2만여 상자로 첫 제품 출하를 마친 동양맥주는 이런 목표를 가지고 시급하고 부족한 부분부터 손보기 시작했다. 가장 시급한 문제로 지적됐던 맥아와 홉 등 원료수급 문제에 전사적인 역량을 집중시킨 결과 해외에서 활로를 찾을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첫 제품출하 이듬해는 12만7,000여 상자를 출하하며 6배 가량 생산량을 증가 시켰고, 그 다음해인 1955년에는 출시원년보다 19배가 증가한 38만3,000여 상자를 출하하는데 이른다.
이와 더불어 박두병 회장은 “제품의 대외적 이미지 개선은 새로운 레이블의 제시만으로는 달성할 수 없다. 그 레이블이 지니는 내용물에서 받는 신선한 감각이야 말로 그 제품의 매력일 것이며 생명일 것이다”라는 지표를 세우고 연구에 매진했다. 그 결과 제품의 양적인 측면과 질적인 측면의 성장을 동시에 이끌어 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이를 통해 동양맥주는 제품의 이미지 쇄신과 기업의 수익성 강화라는 두 마리토끼를 동시에 잡으며 상승세를 타기 시작해 40여년 간 한국을 대표하는 맥주로 자리매김한다.

“항상 새로운 것을 개척해 나가야…”

그 이후 박두병 회장은 동양맥주의 판매를 담당한 두산산업을 시작으로 ‘동산토건’, ‘윤한공업’, ‘합동통신’ 등 많은 분야에 진출했는데, 이처럼 사업을 다각화하면서 직원들의 마음을 다 잡을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리더의 모습을 보여줬다.
실제로 그는 종종 직원들에게 ‘우리는 하나의 단계에 집착하지 말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생성은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에 기존의 질서에만 안주해서는 적응력을 잃어버린다. 항상 새로운 것을 개척해 나가는 인간만이 안이함에서 탈피할 수 있는 것이다”라는 헤르만 헤세의 말을 인용하면서 직원들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이와 동시에 그는 경영이념으로 ‘인화(人和)’를 내세웠다. 전 사원의 내부결속에 각별한 신경을 기울인 그는 사원 개개인의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노사 간 단결을 구축, 기업의 안정을 이뤄낼 수 있었다.

‘자본과 경영의 분리’…시대를 앞서 간 기업인

국내 대기업가 집안을 흔히 ‘재벌’이라는 말로 쓴다. 여러 개의 기업을 거느리며 재계에서 재력을 과시하는 자본가들로 흔히 아버지가 자식에게 부를 세습하는 단계를 거친다. 하지만 박두병 회장은 이를 과감하게 벗어던졌다.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것 이상으로 경영자로서의 역량을 보였던 그는 자신의 아들이 아닌 전문경영인에게 가업(家業)을 넘겨준다.
박두병 회장은 그의 신념인 ‘자본과 경영의 분리’를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기업의 발전 뿌리가 됐던 가족중심의 혈연기업 형태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말년의 그는 자신이 회장직을 맡고 있던 상공회의소 업무에 충실하기로 결심하고 동양맥주 경영을 자신의 아들이 아닌 전문경영인 故정수창 회장(1919~1999)을 후계자로 지목하는 행동을 보이면서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이와 더불어 반세기 전에 기업의 사회적인 책임을 깨닫고 자신과 기업, 종업원을 포함한 모든 사회구성원들의 지속적인 성장을 도모했다. 사회가 요구하고, 근간을 이룰 수 있는 기업을 육성하고자 했던 그는 직원들을 성장시키는 리더가 되고자 노력했다. 그는 직원들에게 더 발달된 문물을 보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해외 연수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복지혜택을 제공했다. 오늘날에는 기업의 일반적인 복지형태로 우리에게 익숙한 경영방식이지만 해방과 광복 전후의 이런 리더십은 가히 혁신에 가까웠다. 이렇게 자신의 사리사욕보다 사회구성원들을 먼저 생각하는 기업운영을 실행한 박두병 회장은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경영 자질과 자신의 신념, 경험을 더해 백년을 이어온 두산그룹의 기반을 닦았다.

[‘영원한 기업의 한시적 관리자’ 정수창]

故정수창(1919~1999) 회장을 수식하는 단어는 너무나 많다. 하지만 정수창 회장은 자신을 ‘영원한 기업의 한시적 관리자’로 지칭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국내 기업인 가운데 상당히 독특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최초의 전문경영인이자 샐러리맨 출신 비오너 재벌그룹 회장 1호 타이틀이 그것이다.
정수창 회장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단지 그가 남들과 다른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유창한 영어실력과 맥주에 대한 열정이다.(실제로 정 회장은 서울대 경영학과 전신인 경성고등상업학교에 다니면서 등록금과 하숙비 중 일부를 맥주 구입비용으로 썼을 정도로 맥주를 좋아했다) 그토록 맥주를 좋아하던 청년 정수창은 1945년 동양맥주에 입사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새 사업 하기 보다 지키는 게 더 어렵다’

정수창 회장은 한적한 시골의 역장과 같은 푸근한 인상과 달리 매우 섬세한 경영스타일을 보여줬다. 그는 소비재를 생산하던 두산그룹의 주력사업을 생산재그룹으로 바꿨다. 이를 통해 소비재그룹의 구조적인 한계를 뛰어넘어 ‘안정과 성장의 적절한 조화’를 향해 나갈 수 있었다.
실제로 정수창시대의 두산그룹은 14개 회사를 설립하거나 인수했는데 그중 8개(57%)가 기술소재 사업이었다. 재임기간은 1973년부터 1981년으로 상대적으로 짧았다. 하지만 당시 두산그룹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지고 왔으며, 1978년 1월 1일 두산그룹을 공식 발족시키는 등 두산 역사에 굵직한 획을 그었다.
‘새로운 것을 벌이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는 그의 경영방침에서 볼 수 있듯 대체적으로 안정적인 경영활동을 했으나, 전적으로 안정위주의 경영활동을 펼친 것은 아니다.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한 사회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전자공업분야에 진출하기도 하면서 식음료 이외의 분야로 다각화를 해 나갔다. 특히 중화학공업분야는 정부의 육성정책과 맞물려 높은 상승세를 보였다.

오일쇼크 이겨낸 독특한 사업구조

그가 그룹 경영권을 받아 경영해 나갈 무렵, 바다 건너 시장의 상황은 그리 밝지 않았다. 1973년 4차 중동전쟁을 계기로 여섯 차례 오일쇼크가 발생했는데, 자원이 빈약하고 대외의존도가 높은 국내 기업들은 속수무책으로 궁지에 몰렸다. 수출수요가 감소하고 원료를 구하지 못하는 상황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졌고, 기록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온 사회가 큰 어려움을 겪었다.
정수창 회장이 상호 보완적인 구조로 갖춰 놓은 두산그룹은 국내 대부분의 기업이 퇴보 혹은 침체를 면치 못하던 와중에도 안정과 성장이라는 극히 예외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그룹 내 회사들이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두산그룹의 독특한 기업구조 때문으로 평가된다.
1970년대 전반기 두산그룹은 동양맥주를 중심으로 각 계열사들이 회전운동을 유지하면서 각기 생산성을 유지하고 상호 보완하는 이상적인 모습이었다. 오일쇼크라는 시련을 극복하는데 이런 사업구조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오늘날까지 발전해 두산그룹 고유의 특성이자 체질로 자리 잡게 됐다.

“먹을 만큼 많이 드시게. 하지만 음식을 남기지는 말게”

정 회장은 직장생활을 52년간 하며 매일 새벽 남산을 오르곤 했다. 그는 산에 오르면 입을 다물고 말을 아꼈으며, 남들이 피우다 버린 담배꽁초를 줍는 등 재벌그룹 회장이기 전에 한 인간이었다. 늘 규칙적인 생활을 반복했던 그는 나이를 먹어서 까지 체형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그의 몸에는 ‘절제’라는 두 글자가 배어 있었다. 말을 아끼고, 음식을 아꼈던 그는 직원들과의 회식자리에서도 ‘먹을 만큼 많이 드시게. 하지만 음식을 남기지는 말게’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와 함께 정 회장은 서류봉투, 깨끗한 종이, 이면지 등으로 나눠 놓고 업무를 봤다.
소박하고 검소한 그의 습관은 누구와도 쉽게 동화됐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곤 했다. 기존의 경영진이 강력한 카리스마를 앞세운 리더십을 보여줬다면 정 회장은 그들과 다른 리더십을 보여주며 그룹 구성원들을 이끌었다. 방법은 전혀 달랐지만 두산그룹에 성장을 가져온 결과는 같았다.

 ‘OB그룹’에서 ‘두산그룹’으로

앞서 언급했듯 수성과 확장을 적절히 조화, 유지하는 경영방침을 내세운 정수창 회장은 그룹의 성격에 맞지 않는 업종에 대해 과감하게 정리를 해나갔다. 1975년 금강융단과, 1978년의 동방여운이 그 예다.(금강융단은 수출업 활성화의 일환으로 1964년 인수했으나 당시 주력업종이던 동양맥주의 사세확장에 집중하기위해 1975년 12월 매각했다. 동방여운 또한 사업실적이 국내관광부문 1위, 국제관광부문 5위에 오르는 등 우수업체였으나 경기기복과 계절에 따른 사업수익의 편차 때문에 1978년 말 정리 수순을 밟았다.)
또한 이 시기에 ‘OB그룹’에서 ‘두산그룹’으로 명칭을 변경한다. OB그룹이라는 이름은 주력업종이었던 OB맥주의 이미지가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이름이었다. 하지만 정수창시대에 이르러 그룹의 사업분야가 소비재가 1/3, 무역/기계/건설/화학공업 2/3 등으로 구조 전환됐고 사업내용을 하나로 집약하기 적절한 ‘두산’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 기술소재 산업으로 대대적인 확장을 시도한 두산그룹은 이후 매출액, 자산, 자본금, 당기순이익 등이 상승하는 효과를 봤다. 특히, 1979년 기술소재 산업의 당기순이익(58%))이 생활문화사업의 그것(40%)을 처음으로 능가하면서 변화의 결실을 맺었다. 그 격차는 1980년대에 이르러 95%대 27%로 더욱 명확하게 벌어졌다.
박승직과 박두병이 두산그룹에 정통성을 부여한 업적을 세웠다면, 최초의 전문경영인 정수창은 두산그룹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현재 두산그룹의 큰 틀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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