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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2024-04-19 19:07 (금) 기사제보 구독신청
두산을 통해 배워볼까?
두산을 통해 배워볼까?
  • 인사이트코리아
  • 승인 2015.06.17 11:0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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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100년에 기업 두산에 길을 묻다.-1

두산을 통해 배워볼까?
  ◑장기침체로 재계가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30대 그룹중에서도 ‘죽음의열차’를 타야할 기업이 적지 않다
  ◑두산그룹도 건설 때문에 신음하고 있다
  ◑살 길은 100년 장수과정 리뷰하며 溫故知新하는 것이다
    
경제가 어렵다. 기업도 힘들고 국민들도 불안하다. 그렇다고 가던 길을 그냥 갈 수는 없다. 그러면 파산이다. 이미 적지 않은 기업들이 그런 길을 걷고 있다.
그 중에서는 30대 그룹이 포함되어 있다. 이미 파산행 열차를 탄 기업들은 한 때 잘 나가던 곳들이다. 그냥 가도 문제가 없겠지 하며 안주하는 사이에 그들의 존재는 없어졌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위기의식을 갖는 것이다. 지금 아무리 잘 나가더라도 위기의식이 없으면 어느새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위기의식은 오너회장도 가져야 하고, 최고경영자나 임원도 가져야 한다. 물론 직원들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이미 지난해부터 시중에는 흉흉한 소문이 파다하다. ‘D자 들어가는 곳 4곳이 위기다. H자 그룹 몇 개도 곧 무너질 것이다. 곧 심각한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이다. 공중분해 될 지도 모른다.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수습하지 못하면 잊혀진 기업이 될 것이다.’ 이런 말들이 나돌았다. 그중 이미 1개 그룹은 총수가 구속되고 그룹의 형체는 없어진거나 다름없다. H자 그룹 1곳 역시 경영권이 넘어간 상태다.
다른 D자 그룹, H자 그룹은 그래서 더 비상이다. 그래서 가능한 재산을 팔기 위한 비상대책에 들어갔으며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의 칼을 쓰기 시작했다.
기업의 수명은 길지 않다. 과거에는 30년, 50년이 되기도 했지만 국내시장, 글로벌시장의 변화가 빨라지면서 수명은 엄청 단축됐다. 이젠 10년 아래로 뚝 떨어진 것 같다.
아무리 잘 나가던 기업도 변화에 적극적이지 못하면 도태의 수순을 밟을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지금이다. 아니 적극적이라기 보다는 능동적이어야 생존이 가능하다.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지 못하는 기업치고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고 앞서 가는 기업은 없다.
지금 두산그룹도 역시 녹록하지 않다. 어려운 터널을 지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건설부문 때문이다. 그러나 지혜를 동원하면 살 길은 나온다. 두산 뿐 아니라 모든 기업이 그렇다.
두산은 100년이 넘은 기업이다. 그만큼 장수하면서 지금까지 맥을 이어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위기상황이 닥쳐올 때마다 이를 끌어가는 총수의 혜안이 있었고, 이를 실천했다.
그런 두산의 장수 비결이 현재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든 기업들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지 않을까?
溫故而知新(온고이지신)-. 지금 상황에서 딱 들어맞는 말이 아닐까 싶다. 논어 위정편에는 이런 공자의 말씀이 나온다. 옛것을 알고 새것을 알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지난 날을 돌이켜 보면 오늘을 알 수 있고, 내일에 대비할 수 있다. 그 속에서 새로운 이치나 이론을 찾아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다.
한국경제사학회 소속 교수(고승희, 김성수, 박광서, 이건희,이승욱, 한한수 공동집필)들이 12년 전인 2002년에 펴낸 연구자료이지만 2014년을 어렵게 보내고 있는 기업들에게 새로운 혜안을 던져준다. 두산그룹을 거쳐간 총수들의 리더십, 경영스타일, 어려울 때 어떻게 대처하며 100년 이상을 이어왔는지를 보면서 지금 심각한 불황, 위기의 대응지혜를 찾아 본다.


한국경제사학회 소속 학자들이 본 두산의 리더십
 

흘러간 두산 총수들의 혜안을 다시 본다

 

경영합리화에 충효사상 전문성
접목시키며 1세기의 풍상을 넘다

▲ 박승직 두산 창업주

1896년 8월 1일. 매헌 박승직이 배오개(종로4가 15번지)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박승직 상점’을 개설한 날이다. 그는 그 이후 일제하에서 한인상계의 리더로 활약했으며 1905년 7월 한국인으로만 구성, 최초의 광장주식회사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그의 상인 정신은 5가지로 요약된다. 인화정신, 근검정신, 정직과 신용정신, 타협정신, 민족자립정신 등이다. 그는 경영합리화에 충효사상과 전문성 추구를 접목해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발휘했다. 특히 비정치적 사고방식에 근거한 인맥관리, 판매망과 마케팅, 품질관리, 재무관리 등에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또 경제발전에 대한 기여, 철저한 납세정신, 앞선 직원복리후생 관리 등은 20세기 초 격변기에 활약한 한국의 대표적 창업자형 기업가의 한 사람으로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두산그룹이 100년 넘게 지속되어 오면서 한국의 대표적 기업이 된 저력은 그의 이런 노력, 통찰력, 판단력이 모태가 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백개의 계단을 한꺼번에 
 뛰어오르려고 하지 말라”

그는 19세기  후반 모든 상행위의 기본을 신용과 정직에 둠으로써 거상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사람이란 어떤 인물, 어떤 사업, 그리고 어떤 상황속에서라도 오직 정직, 성실하고 또 노력한다면 무슨 일이든 남보다 뒤떨어지지 않게 할 수 있고, 또 누구에게나 신망과 존경을 받을 수 있다.”
그는 신용을 얻기 위해 사업가가 갖추어야 할 전제조건을 이렇게 꼽았다.
“이익도 도의를 밑바탕으로 할 때 정당한 것이 되며 도의를 배척하는 재능, 지식, 발명은 생명이 길지 못하다. 무리하게 이익을 탐하면 오히려 재산을 상실하고 화를 초래한다.”
그래서 내세운 것이 계단경영론이다.
“백개의 계단을 한꺼번에 뛰어 오른다거나 천리를 단숨에 달린다든가 함으로써 일확천금을 꿈꾸면 안된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경영을 철저하게 배격했다. 정직성을 지키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하게 전진하는 태도를 중시했다.
그는 단한번의 부도도 낸 일이 없었던 것과 같이 회사 세금이건 개인의 재산세, 소득세건 단 한 번의 체납도 스스로 용납하지 않았다.
1973년 맥주세율이 생산가의 150%까지 치솟았을 때 밝힌 그의 세금에 대한 견해를 들어보면 국가경제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는 기업인으로서의 높은 긍지와 사명감까지도 엿볼 수 있다.
“납세는 국가를 부강하게 하는 첩경이다. 다른 회사가 세금을 안 낸다고 해서 우리도 안낸다면 국가재정은 파탄에 이르고 급기야는 국가존망의 위기가 초래될 것이다. 주세는 소비자 부담이다. 고객은 술을 마시면서 세금을 내는 것이며 우리는 그 납부를 대행할 뿐이다. 그러므로 소비자와 회사는 5 대 5의 주주라는 생각으로 철저하게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

▲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

“상공인은 모름지기 정치와 초연해야 한다.” 경영이념 가운데 기업가가 지켜야 하는 도리를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그는 평생 이런 자세로 정치와는 초연한 입장에서 오직 기업만을 천직처럼 성실하게 경영한 기업인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는 결국 부친인 매헌 박승직의 신념을 착실히 이어받은 경영이념으로 볼 수 있다.
기업의 영속성을 위해 ‘정치와의 불원불근’ 철학을 남겼다. 기업을 경영함에 있어 정치와는 멀리도 가까이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사업은 영속성을 추구하는 만큼 정치와 너무 밀착하게 되면 그 체제나 주도세력이 변할 때마다 사업 또한 변동을 겪지 않으면 안 된다.
정치인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부단히 사업을 영속시키고자 했던 것이 박두병의 정경분리주의 경영이념이었다.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재임때 마음만 먹었다면 정치와 결탁해 기간산업 업체를 설립할 수도 있었겠으나, 그는 이것을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부화뇌동이거나 탐욕의 소치”라고 여기고 자신의 경영철학을 소신있게 지켰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
“한 우물을 파라.”
“새로운 것을 벌이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
“먼 장래를 걱정할 때만이 현재에 걱정이 없게 된다.”
“책무를 다함으로써 신뢰를 얻고, 사회와 국가 발전에 기여한다.”
이것들은 연강 박두병이 평소 가슴속에 새기면서 후대에 가르친 그의 경영이념을 잘 반영한 경구들이었다.

“내가 살면 너도 살고,
 나도 세끼 너도 세끼 먹는다”

연강은 부친의 경영이념 중에서 특히 인화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것을 평생의 기업경영 좌우명으로 삼았다. 해방후 소화 기린맥주 주식회사의 지배인이 되었을 때에는 늘 인화를 강조해 당시 격화되었던 사원간의 반목과 노사분규를 수습하는데 성공했다.
인화를 내세워 “회사와 노동조합은 원래 견원지간”이란 구호를 뒤집고, “내가 살면 너도 살고, 나도 세끼 너도 세끼 먹는다”는 신념으로 생활해 모범을 보임으로써 화합체제를 구축했다.
부친의 경영이념을 그대로 계승해 실천함으로써 인화경영주의, 근검경영주의, 정직경영주의, 신용경영주의 등을 기본으로 삼아 오늘의 두산그룹을 이루는 근간이 되게 했다.
그의 인화경영 정신은 스스로 만든 경영이념에서 잘 나타난다. 그가 즐겨 썼던 말을 되새겨본다. ‘천시 불여지리 지리 불여인화(天時 不如地利 地利 不如人和)’. 하늘이 도움을 주는 시기를 기다리는 것은 땅에서 이익을 얻는 것만 같지 못하고, 땅에서 이익을 얻는 것은 인화만 같지 못하다는 뜻이다.


수성과 확장의 달인
정수창의 두산

▲ 정수창 두산그룹 2대 회장

정수창. 그는 수성과 확장의 달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박두병 회장이 타계한 이후(1973년 8월) 그의 장남 박용곤이 두산그룹 회장이 될 때까지 7년 6개월간 두산그룹 회장으로 근무했다.
그는 연강 박두병 회장의 경성고등학교 9년 후배로서 정직과 책임섬이라는 좌우명을 갖고 동양맥주에 근무하기 시작했다. 전문경영인으로서의 그의 삶이 결정된 것은 이 때부터이다.
그는 1981년초 그룹회장에서 물러났으나 1991년 3월 페놀사건 후 기업존망의 기로에서 회장으로 다시 취임, 두산그룹을 환경친화기업으로 변신시키는데 공헌했다. 그는 7년여의 짧은 재임기간에 14개 계열회사를 창업해 그룹에 편입하는 업적을 쌓았다. 20년 계속된 연강 박두병시대의 13개 회사, 1981년부터 1995년까지 14년동안 지속된 박용곤시대의 19개와 비교하면 굉장히 많은 수가 아닐 수 없다.
그는 1975년 9월 그룹 최고기구로 그룹운영위원회를 설치했고, 1977년 3월 동양맥주 사장을 최인철에게 넘겨주고 그룹회장에 취임했다.
두산그룹의 공식 발족일은 1978년 1월 1일이다. 그는 1993년 2월 두산그룹 회장직을 사임할 때까지 52년이라는 긴 직장생활을 통해 한국 최초의 전문경영인으로서의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두산그룹의 모든 직원들에게 늘 큰 그림자처럼 존재한 대부였다.
“사람이란 어떤 인물, 어떤 사업, 그리고 어떤 상황속에서도 오직 정직, 성실하고 또 노력한다면 무슨 일이든 남보다 뒤떨어지지 않게 할 수 있고, 또 누구에게도 신망과 존경을 받을 수 있다.”
그는 박승직의 경영이념을 그대로 승계했다. 다만 전문경영인의 존재에 대해서는 독특한 원칙을 고수했다.
“전문경영인은 자본과 경영이 분리되어 있는 예가 극히 드문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존재이다. 자본가가 아닌 사장으로서 경영의 총책임을 맡고 어떻게 하면 기업의 성과를 조금이라도 더 좋게 해 나갈 수 있느냐는 문제들을 전문적으로 생각하고, 모든 정열과 능력을 기울여서 그렇게 되도록 실천해 나가는 것이 전문경영이다.”
그는 기업가 정신을 종업원의 행복추구, 고객의 이익추구, 주주의 이익극대화, 사회적 책임등을 동시에 최대한으로 만족시켜 나가는데 두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고객은 우리의 스승이다”

박승직의 장손이자 박두병의 장남인 박용곤이 두산그룹 회장에 취임한 것은 1981년 3월 2일이다. 1932년에 출생했으니 1981년 이전까지는 그의 전반기, 그 이후 1996년까지 회장을 한 시기는 후반기로 볼 수 있다.
박용곤시대 들어 사실상의 첫 계열기업은 주식회사 합동이었다. 1960년에 인수돼 20년동안 두산그룹의 일원이 됐다. 그러나 1980년 12월 군부에 의해 강제로 폐업됐으며 회장 취임 2개월전인 1981년 주식회사 합동으로 재탄생되었다. 1991년 봄 두산전자 구미공장의 제품 원료인 페놀수지가 유출되어 대구수원지를 오염시킨 문제의 페놀사고는 100년동안 쌓아온 대외이미지를 크게 손상시켰다.
그는 곤욕, 오욕으로 얼룩진 상황에서 취임 10주년이던 4월에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그룹회장에서 물러났다. 페놀사고는 엄청난 여론의 파문을 일으키면서 두산그룹에 막대한 물질적, 정신적 손실을 초래했다. 그를 대신해 다시 정수창 회장이 취임 , 2년간을 이끌어 갔다. 박용곤은 1993년 2월 다시 회장에 복귀했다.
그는 그룹의 새 경영이념으로 ‘고객은 우리의 스승이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고객이 등을 돌리면 기업도 존립할 수 없다는 고객중심적인 사상을 그 바탕으로 삼았다. 고객의 만족을 통해서만 두산의 생존이 보장되기 때문에 부서와 직원에 관계없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 고객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고객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무엇 때문에 불만스러워하는가? 그들의 문제는 무엇이며,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 그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항상 고객들에게 던지며 고객의 만족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했다.
그리고 ‘품질은 우리의 자존심’ ‘혁신은 우리의 생활’ ‘인간존중과 기술중시 사상’에도 그룹의 역량을 집중했다. 특히 박용곤 회장의 경영철학은 두산의 새 경영이념에 나타나있듯이 고객과 인재라는 ‘인간의 존중’과 품질과 혁신이라는 ‘기술중시’ 경영방침의 두축을 지렛대로 떠받들고 있다.

“나에게 걸레는 
 남에게도 걸레다”

1937년 생인 박용오 회장은 60세이 이르러 두산그룹 회장직에 올랐다.  회장에 오르기까지 할아버지 매헌 박승직, 아버지 연강 박두병, 정수창 회장, 박용곤 회장 등에게 두산의 경영학을 배웠고, 이를 계승시켰다.
그가 회장에 재임한 시기를 두산에선 신개화기라 말한다. 창업 2세기를 향한 두산의 구조조정과 경영혁신을 이끌어 왔다. 그의 구조조정 경영철학은 4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가치에 의한 의사결정이고, 둘째는 성역의 타파이며, 셋째는 나에게 걸레는 남에게도 걸레라는 이른바 걸레론이다. 넷째는 구조조정의 콤플렉스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그는 기업의 가치창출에 기여하지 못하는 자산이나 사업은 과감하게 정리하는 원칙을 세웠다. 경영활동을 통한 영업이익이 은행의 이자율에 미치지 못하는 사업들은 정리하는 원칙을 적용시켰다. 가치창출에 기여하지 못하는 자산은 성역없이 처분하는 방법을 강구했다. ㈜두산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던 OB맥주 영등포공장을 매각했으며 그룹의 상징이었던 을지로 두산빌딩도 무수익자산처분 원칙에 의해 매각하는 방법을 강구했다.
그는 특히 구조조정을 위해 과감하게 알짜배기 기업이나 사업을 매각하는 방업을 추진했다. 당시 코카콜라 사업, 위스키 사업, 한국코닥, 한국3M, 한국네슬레 등은 알짜배기 사업에 속했으며, 이를 매각했기 때문에 성공적인 구조조정을 할 수 있었다. 타 그룹이 은행의 부채탕감 등으로 국민들에게 부담을 주며 구조조정을 한 반면, 두산은 철저하게 내부의 사업매각을 통해 생존함으로써 국민들에게 부담을 주지않고 구조조정에 성공하는 모범사례를 만들어 냈다.
박용오 회장은 또 구조조정을 하는데 주변에서 어떠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는 것이 살 길이라는 경영철학을 실천했다. 1996년만해도 구조조정이 진정한 의미가 국내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구조조정은 두산에 많은 부정적인 시각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박용오 회장은 미래 현금흐름을 정확히 예측하고 단계별로 체계적인 구조조정을 추진했다. 그랬기 때문에 콤플렉스에 빠지지 않고 흔들림없이 성공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가능했다.

“사람의 성장을 통해
 사업의 성장을 꾀했다”

박용오 회장 때 내건 목표 중 특히 눈에 띄는 것은 2G전략이다. 사람의 성장(Growth of People)을 통해 사업의 성장(Growth of Business)을 추구하는 것이다. 2G전략은 조직 구성원의 성장을 바탕으로 사업수익의 성장을 꾀하는 것이며, 이 수익이 다시 조직원에게 재투자되어 그룹의 핵심역량과 조직원 자질이 향상되는 선순환 구조를 구성하게 된다는 박용오 회장의 신경영전략이다.
이 때 두산의 사업포트폴리오는 1)중공업, 건설 등 기술력이 바탕이 되는 테크놀로지 그룹과 2)주식회사 두산을 중심으로 한 소비재그룹, 3)서비스 그룹을 주요 축으로 성장시켜 나간다는 방침을 정했다.
선진국형 인사제도인 연봉제도 이 때 도입했다. 국내에선 처음으로 관리자급 이상을 대상으로 연봉급제를 도입해 성과와 역량에 따른 연봉의 차등확대를 실현함으로써 성과에 의한 보상 체제를 정립했다. 과거에는 대부분 연공서열의 임금제를 실시해 서열, 학력, 경력, 나이 등을 중심으로 하는 인사제도였으나 박용오 회장은 21세기형 능력급제도를 도입했다. 성과에 의한 평가보상제도를 도입해 능력있고 우수한 인재를 발탁하는 새로운 인사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위의 글은 이승욱 박사 등 경영사학회 소속 교수 6명이 공동집필한 ‘매헌 박승직 연강 박두병 연구’(修書院 발행, 2002년)에 나와 있는 글 중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인사이트코리아, INSIGHT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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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범죄자세끼 2021-11-19 18:34:52
씌발 범죄자 역적세끼. 철저하게 사형시켜라! 쓰레기 같은 게으름뱅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