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은 영특하고 활달” 영웅 알아본 혜안·통찰력
“이순신은 영특하고 활달” 영웅 알아본 혜안·통찰력
  • 박흥순 기자
  • 승인 2015.04.03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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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를 알아본 인재

전국책에는 ‘백락일고(伯樂一顧)’라는 고사가 있다. 백락이라는 인물은 천리마를 알아보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유명했다. 어느 날 백락은 소금수레를 끌고 가는 천리마를 보고 한없이 서럽게 울었다고 한다. 아무리 천리마라도 그 능력을 알아보는 주인을 만나지 못하면 천리를 달리기는커녕 한낱 소금수레 밖에 끌지 못한다. 

서애 류성룡은 백락과 같은 혜안을 가진 인물로 전해진다. 특히 사람의 능력을 잘 헤아려 적재적소에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형 리더였다. 이미 널리 알려진 것처럼 구국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을 천거한 이는 바로 류성룡이다.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같은 마을에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류성룡과 이순신의 형(이요신)은 친구지간이었기에 류성룡은 자신보다 3살 어린 이순신의 성품과 사람 됨됨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이순신은 어린 시절 영특하고 활달했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 때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어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했다.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해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군문(軍門) 앞을 지나려고 하지 않았다.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가려고 했다. 활쏘기를 잘 했으며 글씨를 잘 썼다”라며 충무공 이순신의 어린 시절을 기록해 놓기도 했다.

이순신, 권율 천거한 ‘조력자형 리더’

류성룡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591년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천거한다. 한번에 7품계 상승이라는 파격적인 인사였기에 조정대신들의 반발은 대단했다. 류성룡이 이순신으로 부터 뇌물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있었다. 당시 사간원은 ‘이순신은 경력이 매우 얕으므로 중망(衆望)에 흡족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인재가 부족하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현령을 갑자기 수사에 승임 시킬 수 있겠습니까. 요행의 문이 한번 열리면 뒤 폐단은 막기 어려우니 빨리 재차 시키소서’라는 상소문을 올린다. 하지만 류성룡에게 좌의정과 이조판서를 겸직하게 할 만큼 강하게 신임하고 있던 선조는 여러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에게 전라좌수사의 관직을 맡긴다.
이순신을 천거한 류성룡은 단지 천거에 그치지 않고, 장수들이 전선에 집중할 수 있도록 후방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했다. 강직한 성품 탓에 사방에 적이 많았던 충무공 이순신을 보호하는데 앞장섰으며, 그에게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라는 전술서를 보내기도 했다. 충무공은 난중일기를 통해 ‘증손전수방략은 수전(水戰), 육전(陸戰), 화공(火攻) 등의 법들이 조목조목 낱낱이 쓰여 있어 만고에 없는 훌륭한 책이다’라는 평을 내렸다. 
또 자신이 천거한 인재(人才)의 단점도 놓치지 않는 면모를 보였다. 지장에 덕장인 이순신에게 상대적으로 용맹함이 부족하다고 판단, 경남 고령현감을 지낸 권전(1549~1598)을 아장(亞將)으로 추천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류성룡은 임진왜란 1년 전 정5품 호조정랑 권율을 의주목사로 천거, 군사적 경험을 쌓게 했다. 권율은 비교적 늦은 나이에 벼슬길에 올랐다. 임진왜란 발발 10년 전인 1582년 45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 문신으로 벼슬을 시작했다. 성적도 상위권이 아닌 중하위에 걸쳐있는 병과(丙科, 11~33등)였다. 이후 10여 년 간 미관말직에 지나지 않았던 권율은 이력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화려하게 출세한 인물이 아니었다. 
이런 인재의 쓰임새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문신(文臣)에게 장수의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천한 것이 류성룡의 혜안이었다. 다시 말해, 임진왜란의 3대 대첩을 이끈 명장가운데 두 명을 류성룡이 천거한 셈으로 그의 통찰력은 백락에 비유될 수도 있다.

“류 정승 집에서 밤새 이야기했다”

류성룡의 통찰력은 자신이 천거한 이순신을 파직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절정에 달한다. 자신의 욕심과 자존심을 세우기보다 유연하고 사리분별에 뛰어난 조선의 리더였다. 징비록을 살펴보면 “내가 이순신을 천거했기 때문에 나와 사이가 나쁜 사람들은 원균의 편을 들어 이순신을 몹시 모함했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이순신은 연일 승전보를 울리며 전라좌수사에서 2년 만에 삼도수군통제사의 자리에 오른다.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은 선조와 조정의 신료들을 이용해 일본군 장수 고니시유키나가(小西行長)는 이간계(離間計)를 펴 이순신을 함정에 빠뜨린다. 이를 간파한 이순신이 출정명령을 따르지 않자 선조는 그를 제거하려 했다. 
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 선조는 ‘이순신은 참으로 역적이다. 이제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의 목을 들고 온다 해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임금과 조정을 기망했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라고 말 할 정도였다. 많은 이들이 류성룡은 이원익, 정탁과 함께 이순신을 변론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를 천거한 인물인 류성룡이 앞장서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사형으로 몰아가던 조정의 기세는 한풀 수그러들고 이순신은 백의종군으로 훗날을 기약할 수 있게 됐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류 정승의 집에서 밤새 이야기를 하다가 새벽에 나왔다’는 말로 파직과 옥에서 출소한 이후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이로 미뤄봤을 때 류성룡이 이순신의 파직을 앞장서 주장한 것은 이순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한 방책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나는 ‘백성의 종’…나아감이 빠르면 물러남도 빠르게 된다”

‘나아감이 빠르면 물러남도 빠르게 된다’. 류성룡은 그가 남긴 이 말처럼 임란 종결을 눈앞에 두고 버금의 자리에서 스스럼없이 물러난다. 유연하게 구부릴 줄 아는 성품을 지녔으나 그 올곧은 기개만큼은 대나무처럼 굽히지 않는 조선의 선비였다.
그는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자리인 영의정에 오른 후에도 스스로를 ‘백성의 종’이라 칭하며 재물과 권세, 여색을 탐하지 않고 백성을 보살피는 조정대신의 모습을 보였다. 특히 평생에 걸쳐 청렴함을 유지했는데 자신의 제수용품을 마련할 재산까지 남겨놓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죽음을 슬퍼한 백성들이 마련한 제기로 장례를 지냈다는 말도 회자된다.
그의 청렴함은 야사를 통해서도 전해진다. 류성룡은 정읍현감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천거하면서 그에게 뇌물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아 사헌부의 가택수색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의 집에서는 은자(銀子)는커녕 이순신의 어머니인 초계 변씨가 손수 지은 무명 누비저고리 한 벌만 나왔다. 류성룡은 그마저도 눈물이나 차마 입지 못하고 집안 깊숙한 곳에 보관했다고 전해진다.
류성룡과 선조임금의 관계를 통해서도 그의 올곧은 성품을 엿볼 수 있다. 류성룡은 조선조 선조시대의 사람으로, 선조는 직계가 아닌 방계로 즉위한 최초의 임금이다. 이 사실 때문에 선조는 평생 골머리를 앓았다. 특히 신하를 등용하고 상대하는데 있어서 어느 한쪽의 세력이 거대해지면 다른 당파의 권력을 키워주는 등 끊임없이 자신의 세력에 위협이 될만한 이들을 견제했다.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己丑獄死)’와 같은 역사적 사건은 선조의 무게중심 이동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 낙향한 류성룡은 안동에 있는 옥연정사에서 은거하며 징비록을 저술했다.

선조의 견제대상에서 류성룡도 예외는 아니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백성들의 신망을 두텁게 얻은 류성룡을 견제하기 위해 선조는 명나라 사신으로 참가하라는 왕명을 거부한 것과 전란 말기 일본과 화친하라는 상소를 빌미삼는다. 이에 류성룡은 자신이 위태로워질 것을 직감하고 고향 안동으로 낙향을 결심한다. 그는 사직상소를 통해 ‘공론은 국가의 기강입니다. 대신으로서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공론을 받고도 돌아봄이 없이 태연히 국사를 본다면 조정이 어떻게 될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로 자신을 대변했다. 류성룡은 왕족이 아닌 이로써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에서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물러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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