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통찰·易地思之… ‘세종대왕의 지혜’
설득·통찰·易地思之… ‘세종대왕의 지혜’
  • 한상오 기자
  • 승인 2015.02.13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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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진정한 리더십

우리 사회가 완전히 불신의 늪에 빠졌다. 정치는 불통이고, 경제는 불황이며, 사회는 양극화, 문화는 지나친 상업화로 치달으면서 불신이 팽배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힘들어 보인다.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됐을까? 이에 대한 여러 원인이 제기될 수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이 사회를 이끌어 가야 하는 진정한 리더십이 부재한 때문이다.
 

한국 사회를 이끌어 갈, 아니 정신을 지탱해줄 지도자가 없다.
불통에 빠진 정치는 이제 국민을 위한 행동은 없고 당리당략만 쫓는 집단으로 지탄을 받고 있다. 민주주의는 변형되고 국가의 번영을 도모해야 할 정치권은 이제 ‘국격’을 깎아내리는 일조차 서슴지 않는다. 불황의 늪에 빠진 경제계도 마찬가지다. 각종 편법을 동원하면서 법조차 지키지 않는 도덕성으로 반기업 정서가 여전히 강한 편이다. 특히 각종 이데올로기와 빈부의 격차로 이미 우리 사회는 편이 갈라지고 대립이 격화 되면서 통합의 의지조차 찾기 힘든 상황이다.
이런 총체적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지도자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반 만 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에도 위대한 리더가 있었다는 사실이 그래도 위안이 되고 있다. 특히 세종대왕의 리더십에서 그 대안을 찾자는 여론이 비등하다.

 ‘상대를 내편으로 만드는 힘’

‘MBC 예능 PD’로 친숙한 주철환 아주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최근 절묘한 비유를 통한 강연으로 눈길을 끓었다.
그는 지난 6월 개최된 ‘제5회 세계전략포럼(WSF)’에서 리더십을 얘기하면서 ‘21세기 소통의 위기’를 진단했다. 특히 이 강연은 세월호 사고를 겪은 대한민국은 물론 전 세계 곳곳에서 각종 사건, 사고가 터지는 요즘 전 세계인이 공감하는 허전함이 ‘진정한 리더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주 교수는 소통의 위기를 ‘캐스팅의 비극’에 비유했다. 그는 편 가르기로 인재를 구분 짓는 행태와 고정관념에 가로막힌 사고를 꼬집었다. 그러면서 그는 리더의 잘못된 캐스팅 때문에 이 시대에 ‘벽’이 생긴다고 역설했다. 주 교수는 그 해법을 ‘세종대왕의 지혜’에서 찾았다. 세종의 설득, 통찰, 역지사지의 미덕이 핵심이었다.
주 교수가 언급한 세종대왕의 설득력은 ‘상대를 내편으로 만드는 힘’이었다. 주 교수는 “세종은 굉장히 전략적이었다. 4년의 수렴청정을 견뎠고, 반대파를 포용했다. 정사에 균열을 만들지 않았다. 설명이나 설교 대신 설득을 택한 덕이다. 세종대왕은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을 내편으로 끌어들였다”고 말했다.
주 교수는 이러한 설득력을 바탕으로 적재적소의 인재 기용을 이끌어냈다고 분석했다. 주 교수는 “세종대왕은 황희를 ‘캐스팅’했다. 부정부패에 연루된 인물이었지만 세종대왕은 그의 가능성을 봤다. 세종대왕은 또 한 번 설득의 힘을 발휘했고, 황희는 결국 세종대왕의 업적을 도운 공신으로 민중의 신임을 얻었다”고 전했다.
주 교수는 세종대왕이 발휘한 마지막 지혜를 ‘역지사지(易地思之)로 봤다. 한글은 ‘세종대왕 리더십의 끝’이고 역지사지로 비롯된 선물이라고 표현했다. 이어 그는 “세종대왕은 ‘내가 백성이라면’을 생각했다. 훈민정음을 만든 배경은 백성의 아픔을 보듬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생각을 전달하고, 뜻을 펼쳐 아프지 않을 수 있도록 한글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주 교수는 “우리 사회가 겪는 소통의 위기는 캐스팅의 비극 때문이다. 잘못을 바로잡을 사람은 곳곳에 배치된 리더들이다. 세종대왕의 지혜가 절실한 때다”라고 강조했다.

 “밥은 백성의 하늘이다”

 
세종대왕은 지난 15세기에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분야에서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해 국가의 융성과 번영의 기틀을 마련했다. 세종대왕은 백성을 하늘처럼 여기는 섬김의 리더십과, 신하들과는 차별을 두지 않고 서로 토론하면서 문제점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찾아 개선하는 진정한 소통의 리더십을 보여줬다.
‘세종박사’로 이름난 박현모 (사)한국형리더십개발원 원장은 ‘세종실록’을 연구하기 시작한 이유에 대해 “정조대왕이 가장 존경했던 왕이 세종대왕이고, 오천년 우리 역사의 전성기를 연 세종의 리더십 비밀을 찾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박 원장은 “최근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보면서 ‘세종대왕이라면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하고 ‘세종실록’을 찾아보곤 하는데, 세종은 모든 상황 속에서 구체적인 준거를 가지고 토론을 하고 의견을 수렴해 결단을 내렸으며 어느 상황에서든 말과 행동이 일치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런 박 원장도 세종의 재위 초반의 모습에선 실망스러운 점이 있었다고 했다.
세종 재위 초기에는 부왕인 태종이 상왕으로 있던 시절로 국정의 모든 결정권은 여전히 상왕에게 있었다. 당시 세종은 자신의 처가가 풍비박산 나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부왕에게 한마디 항의도 못한 채, 낮에는 사냥터로 늦은 밤에는 각종 연회에 끌려 다녀야 했다.
이에 백성들은 “이따위 임금이 무슨 대세를 아는 왕이란 말인가”라며 비난했고, 신하들 역시 왕 앞에서 서로 잘났다며 싸우고 심지어는 어전회의에서 서로에게 ‘악담’까지 하는 상황까지 벌어질 정도였다.
그나마 세종이 왕 다운 모습을 보인 것은 기민 구휼에 적극적으로 나서 대응했으며, 집현전을 창설해 신하들과 심도 깊은 토론을 나눈 일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세종은 태종이 승하한 직후인 1422년(재위 4년) 5월부터 언제 그랬냐는 듯 국정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1425년까지 강원도 대기근 등 몇 차례 위기를 넘긴 다음부터 국정의 중심에 서서 리더다운 모습을 보였다. 세종의 재위 기간 32년을 개관해 보면 그가 단계적으로 치밀하게 하나씩 국정목표를 성취해 나가면서 일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재위 8년에서 12년 사이에 세종은 ‘민생 경영’에 집중했다. 세종은 “밥은 백성의 하늘이다. 먹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수령과 임금은 자격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 어전회의의 최우선 의제로 민생 문제를 다루도록 했다. 그 결과 재위 11년에 ‘농사직설’이라는 당시로서는 첨단 농업 기술을 집대성한 책을 간행해 전국 팔도에 배포해서 경작지를 확장하고, 조선의 기후와 토지에 맞는 농법을 발전시켰다. 국가의 총 전결이 두 세배로 늘었고, 토지 한 결당 쌀의 생산량이 무려 4배까지 증가하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낼 수 있었다.

 과학·문화 융성

박 원장은 세종이 1423년(재위 5년) 강원도 대기근을 극복한 일을 대표적인 ‘민생 경영’ 사례로 꼽았다. 그러면서 그는 세종이 현지 실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노력했으며, 굶주린 백성들이 식량을 구하러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을 허용했다는 것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또 관청의 아전들이 아니라 승려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게 해 효과를 높였으며, 관찰사와 수령들로 하여금 진휼 과정을 수시로 살피게 해 임무를 충실히 하지 않는 관리는 처벌하는 상벌제도를 시행한 것도 위기를 극복하는데 효과적이었다고 진단했다.
세종은 재위 13년부터 15년 사이에는 ‘문화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를 내걸었다. 백성들이 지혜로워야 국격(國格)이 높아질 수 있다고 봤기 때문에, 백성들의 의식수준을 향상시키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재위 13년에 중국의 아악보다 뛰어난 음악 문화를 창조했으며, ‘삼강행실도’를 간행해 반포함으로써 백성들이 지켜야 할 덕목과 넘지 말아야할 선을 알려줬다. 해시계를 비롯해 물시계 등 과학기술의 성과도 이 시기에 쏟아져 나왔다.
재위 16년부터 28년 사이는 ‘개척과 개혁의 시대’였다. 당시 북쪽지역에서는 여진족이 수시로 출몰하면서 국경분쟁을 일삼아 백성들과 변방을 지키는 군사들의 고통이 극심했다. 계속되는 여진족과의 국경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군사 및 행정기지를 전진배치하게 했다. 그리고 12만 명의 남쪽 백성들을 이주시켜 정착하게 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도 수행했다. 아울러 세제를 개혁하고 농사짓는 사람들의 실질 소득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한 것도 이 시기다.
그런데 세종은 1443년(재위 25년)에 이르러 국정 운영 목표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간의 노력으로 먹는 문제가 해결되고 과학기술의 성과가 나타났으며 북방 영토도 많이 개척했지만 여전히 기근으로 백성들이 고통 받고 있으며 여진족의 침략은 계속되고 있었다. 또 세제개혁도 자리 잡았다고 하지만 남쪽 지역의 사람들은 계속해서 반대 상소를 올리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이 시기의 세종을 힘들게 한 것은 그의 건강문제였다.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세종이 “옛사람들은 친구가 죽거나 눈이 어두우면 통곡한다고 했다. 내 눈동자를 가리는 막이 있어서 앞에 서 있는 사람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는 말을 남깅 것을 보면 세종의 시력은 거의 실명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박 원장은 “그런 상황에서도 세종은 육체적인 눈이 먼 것도 가슴 아픈 일이지만 글자를 읽을 수 없어서 억울한 일을 당해야 하는 백성들은 얼마나 통곡하고 싶을 것인가를 생각하며, 그들을 위해 감옥제도를 개선하고 시계를 만들어 시간이라는 정보를 백성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세종실록’ 25년의 글에서 보면 진정한 세종의 고민이 배어 나온다.
‘글을 몰라 자기 죄가 어떻게 기록되고 있는지 스스로 알지 못한다면 백성들의 원통한 일이 그칠 수 있을까. 만약 지금 이대로 내가 눈을 감는다면 버려진 아이들, 감옥의 죄수, 노비와 같이 힘없는 백성들은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백성들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 주고 죽어야 하지 않을까.’
결국 훈민정음의 창제는 세종이 가장 잘할 수 있었던 학문과, 꼭 해야만 하는 사명인 백성을 편리하게 하는 것, 즉 편민(便民)이라는 생각에 이르러 나오게 된 것이다.

 “의심스러우면 맡기지 말고 맡겼으면 의심 말라”

세종의 즉위 초기의 상황을 살펴보면 국가를 경영하는 리더로서 차근차근 준비를 진행한 것을 알 수 있다. 세종은 집현전의 젊은 학사들과 과거 사례를 연구하고 미래를 준비했다. 세종은 즉위 초기에 ‘부왕의 꼭두각시’라는 백성과 신하들의 오해를 받으면서도, 철저히 준비했고 인재들의 마음을 얻는데 주력했다.
만약 세종이 즉위하자마자 왕권을 휘두르려고 했다면 아마도 양녕대군처럼 세자 지위를 박탈당하거나 부왕 태종과의 관계도 심각한 상태로 치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세종은 국가 운영의 기틀을 만들면서 백성들의 입장에서 정치를 하고자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종이 민심을 얻는 방법도 사실상 단순했다. 백성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세종은 “백성들은 비록 어리석으나 지극히 신명한 존재”라면서 그동안 다른 왕들과 관리들이 그 어리석음에 가려서 보지 못했던 신명한 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그는 민가로, 들녘으로 돌아다니며 여염집 백성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파악하려고 애썼다. 또 경연(재위 기간 1898회 실시)과 같은 세미나식 국정 회의를 자주 열어 지식인들과 관료들이 가진 아이디어와 경험을 경청했다. 백성들의 목소리와 사대부들의 말을 함께 들음으로써 인기영합주의(포퓰리즘)에 빠지는 것과 민심외면주의에 치우치는 잘못 모두를 극복해냈다.
세종의 인재등용에 관한 원칙도 눈여겨 볼 대상이다. 세종은 “의심스러우면 맡기지 말고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라”는 신념에 따라 좋은 아이디어를 내고 경륜이 있는 유능한 관료들을 발탁해 일을 맡겨 정책을 추진하게 했다. 관료제 개혁안을 낸 허조에게 인재 검증 체계를 수립하게 하고, 함경도 감사로 기근 구제에 성공한 안순에게 11년 4개월이나 호조판서를 맡겨 국가 재정을 잘 운용하게 했다.
형제간의 권력투쟁 등 무력으로 왕권을 장악했던 태종시대에는 어전회의에서 직언을 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세종이 집권하면서부터 조정의 어전회의는 직언하는 문화로 분위기가 반전됐다. 세종은 신하들에게 좋은 의견을 구하고 그들이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세종이 재위 5년에 “내 들으니 ‘임금이 덕이 없고 정치를 잘못하면 하늘이 재앙을 보내 경계시킨다’고 하는데, 지금 가뭄이 극심하다. 대소 신료들은 제각기 위로 나의 잘못과, 정령의 그릇된 것과, 아래로 백성들의 좋고 나쁨을 거리낌 없이 마음껏 직언하여,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나의 지극한 생각에 부응되게 하라”고 했던 말에서 그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세종은 올바른 어전회의 문화 정착을 위해 신하들에게 어전에서 땅에 엎드리지 말고 곧은 자세로 회의에 임하도록 명했다. 왕의 잘잘못을 모두 직언하라고 요청했으며, 긴급현안이 발생하면 한자리에 모여 의논하도록 했다. 소수의 의견도 경청하되 “한 사람의 말만 가지고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세종은 좋은 의견이 나오면 “황 정승의 말이 옳다. 황희 말대로 하라”고 힘을 실어주면서 좋은 의견은 즉시 정책으로 실행되도록 했다.

 세종과 황희 정승

세종의 ‘인재 경영’ 성공 사례 가운데 가장 으뜸이 명재상으로 이름을 남긴 정승 황희가 있다. 하지만 황희는 훗날 세종이 된 충녕대군이 아닌 양녕대군을 태종을 이을 계승자로 미는 등 오랜 기간 세종의 정적이었다. 또 황희는 세종 재임 초기 뇌물수수와 축재 등으로 몇 차례 탄핵위기에 직면했다. 이 외에도 ‘2차 왕자의 난’ 때 방간에게 선제공격을 제안했던 박포의 아내가 남편을 피해 도망쳐 황희의 집 마당 북쪽 토굴에 숨어 지내면서 여러 해 동안 황희와 간통했다.
이런 행각이 세종 집권 이후 드러났지만, 세종은 황희의 균형적인 시각과 통찰력 등을 높이 사 18년 동안 정승을 맡겼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황희는 세종을 만난 후 더 이상 추문을 만들지 않았으며, ‘간악한 소인’에서 ‘청렴한 재상’으로 탈바꿈했다고 전해진다.
세종의 비전은 ‘온 백성이 즐겁게 생업에 종사하는 나라’, ‘생생지락(生生之樂)하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서두르지 말고 철저히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세종이 재위 기간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5년을 준비하는데 공을 들인 것처럼, 현대 사회의 리더들 역시 인재들과 함께 준비하고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또한 민생 경영부터 시작해 하나씩 국정목표를 성취해가면서 신뢰를 얻었던 세종의 방식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박 원장은 “우리는 그동안 ‘일 잘 하는 대통령(박정희)’도 겪어봤고 ‘공부 잘 한다는 대통령(김대중)’, ‘토론 잘 한다는 대통령(노무현)’도 지내봤다. 그런데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대통령은 실행력 있는 리더가 아닐까 한다”면서 “실행력은 추진력과는 다르다. 추진하기 전에 충분히 심사숙고해 준비하고 널리 물어 민심을 들은 다음에 정밀하게 궁리해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대비한 상태에서 추진하는 것’이 바로 실행력”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10여 년째 2만 달러의 문턱에서 서성이는 우리나라의 국력을 3만 달러 수준으로 확 끌어올릴 수 있는 대통령을 국민들은 원한다”며 “지난해 대선에서 보여준 1570만여 표심은 ‘이미 청사진은 다 나왔으니 그것을 잘 실행해 성과를 거두는 대통령이 되어 달라’는 강력한 주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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