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이 있다. 꽃처럼 모든 것은 오래 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말도 무색케 하는 사람이 있다. 다름 아닌 차석용 LG생활건강 부회장. 치 부회장은 올해로 CEO가 된지 10년째를 맞았다. 큰 기업에서 이렇게 CEO가 장수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오너 가문과 직접적인 인연이 없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차 부회장이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LG생활건강의 가장 큰 메리트는 CEO다.”
증권가에서 LG생활건강을 평가할 때 자주 인용하는 말이다. 오늘의 LG생활건강을 만들어 놓은 사람이 바로 차석용 부회장이기 때문이다. 차 부회장이 2005년 사장으로 취임한 이후 LG생활건강은 말 그대로 눈부신 성장을 했다. LG생활건강의 지난해 매출액은 4조3263억원, 영업이익은 4964억원. 2005년 매출액이 9678억원이었고, 영업이익은 704억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매출액은 4.5배, 영업이익은 7배 증가했다.
지난해 연 매출액이 4조원을 넘어선 것도 LG생활건강 창사 이래 처음이다. 1년에 1조원 매출을 할까 말까 하던 회사가 분기에 1조 원 매출을 거뜬히 올리는 회사로 탈바꿈 했다. 이런 성장을 보여준 CEO를 오너는 좋아할 수 밖에 없다. 당연히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신임도 각별하다.
LG그룹은 해마다 6월에 구본무 회장이 참석한 가운데 그룹의 중장기 전략을 점검하는 회의를 연다. 이른바 ‘LG중장기 전략보고회’다. 이 행사에서는 항상 어느 계열사가 가장 먼저 보고를 하느냐가 주목을 받는다. 하루에 한 계열사씩 발표를 하고 토론을 하는데, 맨 처음 발표하는 회사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당연히 그룹 계열사중 가장 기여도가 높은 회사 CEO가 등장한다. 이 전략보고회에서 차 부회장은 지난 2011년부터 3년 연속 맨 처음 발표를 했다. 그의 LG그룹 내 위상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차 부회장은 원래 LG그룹 출신이 아니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1985년 미국 P&G에 사원으로 입사했다. 1999년 P&G 한국총괄사장을 지내고 해태제과 사장을 지내다 LG생활건강 사외이사를 한 게 인연이 돼 2004년 12월 LG생활건강 사장으로 영입됐다. 2011년 12월 사장이 된지 7년만에 부회장에 올랐다. LG생활건강에서 부회장이 나온 것은 처음이다. 이렇게 차 부회장이 승승장구할 수 있던 비결을 찾는다면 그의 독특한 ‘촉(觸)경영’에서 찾을 수 있다.
소비자 욕구를 본능적으로 찾아낸다
차 부회장은 ‘촉(觸)’을 중요시 하는 CEO다. 소비자의 욕구를 알아내는 본능적 촉이 중요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LG생활건강이 소비재 회사인 만큼 촉을 강조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차 부회장은 단지 강조에 그치지 않고 그 촉을 어김없이 내놓고 실행한다. 신제품 출시나 광고에서 어느 직원보다 앞선 촉을 보여준다.
2011년 12월 방송됐던 ‘전지현 헌정 광고’와 신제품 ‘한입세제’ 등 차 부회장의 촉이 발휘된 사례들은 손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배우 전지현의 LG생활건강 샴푸 엘라스틴의 광고모델 계약이 끝났다. 전지현은 11년 동안 이 광고모델로 활동했다. 마케팅 직원들이 모여 감사의 선물로 그동안 방송된 모든 광고를 모아 편집했다. 이 광고를 우연히 본 차 부회장은 이 편집된 영상을 광고로 내보내자고 제안했다. 이렇게 2011년 12월 이 광고는 방송을 탔다. 이른바 ‘전지현 헌정 광고’였다. 소비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엘라스틴의 이미지도 더욱 높였다.
차석용 LG생활건강 부회장의 ‘촉(觸)’ 경영을 보여준 사례다. 차 부회장은 촉을 매우 강조한다. 소비재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기업의 CEO로서 소비자의 욕구를 끊임없이 파악하고 반영해야만 성장할 수 있다고 본다. LG생활건강 사옥에 게시한 ‘촉이 살아있는 회사’라는 글에서도 이런 차 회장의 촉 경영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가 벌떡 일어나 문 앞으로 다가가면 주인이 들어오고, 지진이 나려고 하면 두더지 떼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소비자 욕구를 찾아내기 위해 본능적 촉이 필요하다.”
차 부회장의 말처럼 LG생활건강이 소비자 욕구를 얼마만큼 중요시 하고 찾아내려고 노력하는지를 알 수 있다.
‘느낌 아니까~’ 신제품도 철저 점검
차 부회장이 LG생활건강 CEO로 취임한 직후 가장 먼저 한 일이 브랜드 구조조정이었다. 생활용품 브랜드와 화장품 브랜드를 대폭 줄이라고 지시했다. 당시 LG생활건강에서 생활용품 브랜드는 39개였고, 화장품 브랜드는 16개나 됐다. 이를 각각 32개, 13개로 줄였다. 소비재는 브랜드가 생명인데 한번 탄생한 브랜드를 없애는 일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차 부회장은 브랜드를 정리한 뒤 ‘오휘’나 ‘후’ 같은 프리미엄 브랜드를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두 개 브랜드의 매출액은 크게 증가했다. 버려야 얻는다는 촉을 보여준 것이다.
LG생활건강이 2012년 출시한 ‘한입세제’도 차 부회장의 아이디어라고 한다. 현대인들이 실내 생활을 주로 하면서 옷을 한번만 입고 세탁하는 변화에 주목했다. 이런 변화에 최적화된 세제를 만들자고 한 것이다. 그 결과 액체세제시장에서 LG생활건강은 테크, 수퍼타이, 한입세제 등의 활약으로 시장점유율 29.8%를 기록하며 1위를 달리고 있다.
차 부회장의 촉은 지난해 출시한 남성화장품 브랜드 ‘까쉐’에서도 발휘됐다. 화장품 업계의 불황에도 불구하고 남성 화장품시장은 해마다 두 자리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차 부회장은 확실한 강자가 없는 고가 남성 화장품시장에서 선점이 필요하다고 봤다. 차 부회장은 까쉐의 개발단계부터 직접 발라보고 그 느낌을 전달하는 등 남다른 공을 들였다. 까쉐는 소비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생활용품, 음료, 화장품을 주력으로 삼는 LG생활건강은 소비재 제품을 다룬다는 특성 때문에 신제품 출시가 잦다. 차 부회장은 출시되는 대부분의 신제품을 직접 점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과정에서 그의 촉은 어김없이 반영된다고 한다.
차 부회장은 지난해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경쟁사들이 보지도, 듣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소비자의 욕구를 찾아내는 본능적 촉이 필요하다”며 “그런 촉이 100년, 200년 쌓이면 경쟁사가 따라오는 데에도 100년에서 200년 걸리는 법”이라고 강조했다.
차 부회장이 M&A를 통해 몸집을 불리면서 거의 실패하지 않은 것도 남다른 촉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특히 차 부회장은 적자기업을 인수하더라도 짧은 기간 흑자로 만드는 데 남다른 능력을 발휘했다. 코카콜라음료의 경우 지난해 한국 진출 46년 만에 처음으로 매출 1조원을 돌파했다. 만성적자에 시달리던 해태음료도 연간 영업이익이 흑자(80억원)로 전환했다. 건강에 대한 소비자 욕구가 점점 커지는 시기에 영진약품의 드링크사업을 인수한 것도 그의 남다른 촉이 발휘된 결과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촉은 M&A를 통해 LG생활건강의 성장을 이끈 비결 가운데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LG생활건강이 생활용품 중심 회사에서 M&A를 통해 음료와 화장품 등 사업의 포트폴리오를 완성하고 성장의 반석 위에 올라선 것도 역시 차 부회장의 촉 덕분이라는 얘기다.
리더십 코드는 ‘탈권위’ ‘탈형식’
하지만 이런 경영성과가 차 부회장의 오늘을 말해주는 전부는 아니다. 경영성과를 내도록 하는 것이 리더십이다. 직원들의 신뢰를 얻고 묶어낼 수 있는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 오히려 장수 CEO의 비결은 리더십이고, 그 리더십의 산출물이 경영성과일 수도 있다.
차 부회장의 리더십 코드는 ‘탈권위’와 ‘탈형식’이다. 차 부회장의 집무실은 항상 열려 있다. 누구든 필요하면 거리낌 없이 들어갈 수 있다. 그는 취임 직후부터 직원들 사이에 ‘차석용 쇼크’라는 말을 유행시킬 정도로 파격적 행보를 보였다. 정시에 출근하고 정시에 퇴근하라는 지시를 내기도 했다.
차 부회장은 “회사에 100% 투자하는 사람은 회사를 망치는 사람”이라며 자기계발에 투자할 것을 권했다. 회의 횟수와 시간을 줄이는 간결한 회의 문화도 확산시켰다. 회의할 시간에 오히려 '고객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까'를 더 고민하라는 주문이었다.
차 부회장은 “리더보다 치어리더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CEO는 임직원들을 도와주는 조력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는 개방적 토의를 통해 임직원들의 말을 직접 듣고 의사결정을 하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미국 P&G에서 일한 경험이 바탕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 사전에 통보하지 않고 택시나 기차를 이용해 혼자 현장을 방문하기도 한다. 차 부회장은 “CEO가 간다고 미리 알리면 사업장이나 연구소에서 의전과 자료 준비에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차 부회장의 ‘화장실 경영’도 화제가 됐다. LG생활건강 사옥 화장실에는 차 부회장이 직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칸칸마다 붙여놓는다. 격려나 충고, 삶에 대한 얘기 등이 적혀있는데, 가끔씩은 CEO로서 깊은 고민을 내비치는 글도 있다고 한다.
“외부에서 우리 회사가 잘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우리 회사가 고난 없이 흘러가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매일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낸다.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매일 전쟁을 치르고 들어간다. 외부에서 잘한다는 칭찬에 우쭐대기보다 겸손하게 매일 자신과 전쟁을 잘 치러 달라.” 잘 나갈 때 스스로를 경계하자는 차 부회장의 주문이다.
차 부회장은 자신이 보유해 온 LG생활건강 주식의 40%를 지난해 12월 팔아 110억 원의 현금을 손에 쥐었다. 차 부회장의 촉이 LG생활건강 뿐만 아니라 그 자신에게도 부를 안겨준 셈이다. 그는 이렇게 번 돈을 교육 분야에 기부할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차석용 부회장의 남다른 M&A전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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