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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2024-04-19 11:00 (금) 기사제보 구독신청
달착지근한 몽상의 노예 된 까닭은
달착지근한 몽상의 노예 된 까닭은
  • 박기환 에머슨 케이 파트너스 대표
  • 승인 2014.12.29 11: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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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환의 커뮤니케이션 경영전략

코카콜라 스토리

오랫동안 생존하는 기업을 만드는 것은 모든 CEO들의 숙원이다. 코카콜라 스토리를 통해 지속가능 브랜드 경영에 힘 쓰는 CEO들에게 이번 칼럼이 의미 있는 통찰과 에너지가 되길 바란다.

▲ <알트이미지>

영화 ‘부시맨’에서 주인공 카이(니카우)는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에 살고 있는 부시맨 부족이다. 비행기 조종사가 코카콜라를 시원하게 마신 뒤 밖으로 병을 던져버리지 않았다면 일생 동안 현대 문명과 접촉할 일도 없었을 카이는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콜라 병을 줍고는 신들이 보낸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부족은 이 신기한 물건이 반죽 밀대부터 악기에 이르는 다양한 쓰임새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필요로 하는 사람은 여럿인 데 반해 병은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평화롭던 공동체에 분란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콜라 병 하나 때문에 시작된 말다툼은 결국 주먹다짐으로 이어진다. 깜짝 놀란 장로들은 회의를 열어 신들이 콜라 병을 보내준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실수 같으니 처음 발견한 카이에게 지구 끝까지 가서 버리라고 지시한다.
영화는 문명사회를 처음으로 접하는 카이가 경험하는 다양한 사건과 충돌을 한 편의 코미디로 보여준다. 비록 PR 마케팅 기법인 PPL(Product Placement)이지만 코카콜라가 현대 물질 문명을 대표하는 아이콘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영화에서 쓸모 있는 것으로 묘사된 것은 내용물이 아니라 빈 병이었다는 것이 역설적이다. 

▲ <알트이미지>

코카콜라의 비밀

코가콜라는 2011년 당시 718억 달러로 브랜드 가치 1위를 차지했는데, 그 이전에도 여러 기관에서 선정하는 브랜드 가치 순위에서 정상의 자리를 놓친 적이 거의 없다. 일반적으로 기업이 생산하는 상품의 브랜드는 그 무엇 보다 중요한 기업의 자산 가치로 자리매김했지만, 오늘날에는 브랜드가 상품을 넘어 도시와 국가까지도 중요한 경쟁력과 가치로 영향을 미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다른 기업들이 뒤늦게 브랜드의 가치를 깨닫고 이미지 개선에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면 코카콜라는 이미 120년 전부터 자사 브랜드가 대중의 뇌리에 깊숙이 각인될 수 있도록 갖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1990년대부터 기업들은 치열한 품질 경쟁을 벌였고, 그 결과 생산하는 제품의 기능과 품질이 균일해지면서 기술혁신을 통한 품질 우위만으로는 소비자의 선택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사 제품이 경쟁사 제품보다 대중에 친숙하고 우호적인 이미지로 다가가야만 했다. 다시 말해 모든 상품이 다홍치마일 때 이왕이면 친숙하고 유명한 브랜드, 프리미엄 브랜드라고 널리 알려지고 인식되는 제품을 선호하게 된다는 것이다. 최근 기업은 물론 국가까지 나서서 브랜드 전략을 수립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코카콜라가 이처럼 일찍 브랜드의 중요성을 깨달았다는 것은 역으로 코카콜라엔 애초부터 내세울만한 기술이나 품질이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코카콜라로서는 당연히 인정할 수 없는 사실이겠지만 말이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단어는 무엇일까? 바로 ‘OK’다. 그러면 두 번째는 무엇일까? 바로 코카콜라다. 코카콜라가 진출한 나라는 200여국이 넘는다. 심지어 섬나라 몰디브에 가봐도 코카콜라만 생산하는 섬이 있을 정도다. 이처럼 코카콜라는 세계적으로 너무나 유명한 브랜드지만 또 너무나 많은 비밀과 의혹과 이슈에 휩싸여 있는 브랜드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몇 가지만 이야기해보면, 코카콜라에는 코카인 성분이 들어 있기 때문에 한 번 맛을 보면 끊을 수 없다거나 코카콜라는 ‘머천다이즈 7X’라 불리는 일곱 가지 비밀 재료가 그것들만의 배합법을 통해 만들어지는데 7X의 비밀에 대해서는 미국 식품의약국(FDA)도 예외를 인정할 만큼 중요한 비법이라서 코카콜라 회장과 부회장만 알고 있으며, 이들은 코카콜라 제조법이 영원히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절대로 같은 비행기를 타지 않는다거나 코카콜라의 맛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으며, 코카콜라의 맛을 변화시키려 한 시도는 코카콜라를 사랑하는 미국 시민들은 물론 전 세계 팬들의 반대로 결국 무산되었다는 등의 일화가 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의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인간이 달에 가도 생명체 구성의 신비까지 게놈 연구로 밝혀지는 마당에 코카콜라가 숨기는 재료 배합의 비밀쯤은 웬만한 대학 실험실에서도 밝혀 낼 수 있고, 실제로 꽤 여러 차례 밝혀지기도 했다. 사실 코카콜라의 비밀은 유명한 식당의 숨겨진 비법이 알고 보니 아지노모도(일본이 개발한 화학조미료의 대명사)였더라는 이야기처럼 싱거운 것이지만, 12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코카콜라를 지탱해준 신화이기도 하다. 코카콜라의 비밀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비밀임에도 여전히 유지되는 까닭은 코카콜라가 그 비밀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알트이미지>

코카콜라에 비밀이 필요한 이유

코카콜라는 1886년 5월, 미국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서 약국과 실험실을 운영하던 존 팸버튼에 의해 최초로 만들어졌다. 당시엔 페루의 코카 잎, 서아프리카의 콜라 열매, 설탕, 카페인, 레몬즙, 바닐라 추출물, 캐러멜, 오렌지, 육두구, 계피, 고수, 레몬 오일 같은 여러 성분을 이리저리 배합해 치료제를 겸한 탄산수를 판매하는 것이 대유행이었다. 사실 말이 좋아 치료제지 이 무렵 미국은 도시의 경계를 조금만 벗어나도 야생의 미개척지가 펼쳐지던 시절인 만큼 실제로는 민간요법 수준에 불과했다. 
고대인은 자연 상태에서 탄산을 함유하는 광천수에서 신비한 치료 효험이 있다고 믿었다. 산소를 처음 발견한 영국 화학자 조지프 프리스틀리가 비싸고 구하기 어려운 천연 탄산수를 대신해 인공적으로 탄산수(소다수)를 만드는 비법을 발명한 1767년이래 탄산수는 미국인이 즐기는 일상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팸버튼은 여러 가지 약재와 향료에 약간의 알코올을 섞은 탄산수를 만들어 특히 두통에 약효가 있다고 해서 ‘브레인 토닉(Brain Tonic)’이란 이름으로 판매했는데, 이때까지 코카콜라 제조의 비밀 같은 건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사용한 약재 가운데 한 가지는 분명히 코카인이었는데, 이때까지 코카인은 모르핀보다 중독성이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전혀 비밀이 아니었다. 심지어 당시 젊은 의사에 불과했던 프로이트는 코카인을 기적의 신경성 질환 치료제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절친한 친구에게 코카인을 정기적으로 처방해 중독자로 만들었고, 사랑하는 약혼녀 마르타의 건강과 발그레한 뺨을 위해 보내주기까지 했다. 하긴 헤로인도 처음에는 비습관성 기침약으로 판매됐으며 모르핀 중독 치료제로 인기를 끌었다. 미국의 세인트제임스 선교회는 모르핀 중독자를 대상으로 무료로 헤로인 샘플을 공급하는 캠페인을 펼치기도 했다. 어쩌면 그런 무지한 시대였기에 오늘날 청소년 비만과 각종 성인병의 원인으로 지탄받는 코카콜라가 치료제로 취급될 수 있었을 것이다.
코카콜라가 등장하고 몇 해 뒤인 1894년 노스캐롤라이나 주 뉴번에서 약사로 일하던 케일럽 브래덤은 소화불량에 특효가 있다는 음료를 팔기 시작했다. 소화효소의 일종인 펜십(Pepsin)이 들어 있던 그 음료는 훗날 펩시콜라가 되었다. 미국의 양대 콜라 메이커가 100년 넘게 치르게 될 마케팅 전쟁이 시작되었지만 당시엔 누구도 그 사실을 예측하지 못했다. 이 무렵 미국에는 이미 수백 가지 콜라 브랜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콜라 제조는 그리 대단한 비밀이 아니었다. 향료와 약재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 갖추고 탄산수를 제조할 설비만 있다면 누구라도 어렵지 않게 치료제를 사칭한 탄산음료를 제조해서 팔 수 있었다. 코카콜라가 위대한 점은 약효가 탁월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토록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생존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다양한 브랜드와의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코카콜라는 120년 전부터 브랜드에 투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알트이미지>

제품을 셀링하지 않는 코카콜라

코카콜라 브랜드를 널리 알리기 위해 펨버튼은 광고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이런 말까지 할 정도였다.“"만약 나에게 2만 5,000달러가 있다면 2만 4,000달러는 광고하는 데 쓰고 나머지 1,000달러로 코카콜라를 만들겠다. 내 말대로만 하면 우리 모두 부자가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에 동조한 주변 사람 몇몇을 끌어들여 펨버튼케미컬컴퍼니를 만들었고, 이 회사는 당연히 막대한 비용을 광고에 지출했다. 초기 미국 내 광고 시장을 주도한 제품들이 바로 의약품인데, 의약품과 콜라는 둘 다 제조 단가에 비해 판매가가 매우 높고 광고비용을 감당할 만큼의 높은 마진율을 누린다는 공통점이 있다. 보통 사람들이 마시는 콜라 한 캔을 뽑기 위해 자판기에 돈을 넣으면 그 돈은 어떻게 배분될까? 그 돈의 90%는 광고와 포장비, 회사 이익이며, 원재료비가 아니다, 그래서 코카콜라컴퍼니의 임원들이나 그들이 고용한 광고 회사 직원들은 한 목소리로 이런 말을 한다. “우리들은 꿈을 판다. 사람들은 제품이 아니라 이미지를 마신다.”
코카콜라는 미국의 일반적인 기업보다 많은 법적 소송과 공방 끝에 세워진 회사이기도 한다. 펨버튼이 세상을 뜨고 몇 년이 흐른 1891년, 코카콜라 브랜드는 우여곡절 끝에 다른 동업자들과 친분도 없던 아사 캔들러에게 단돈 2,300달러에 넘어갔다. 이에 반발한 동업자들도 펨버튼식 콜라를 제조했다. 동업자 가운데 한 사람이자 코카콜라라는 브랜드명을 만들고 지금까지 변치 않는 스펜서체 로고를 확립시킨 프랭크 로빈슨은 캔들러의 편에 섰다. 두 사람은 다른 이들과 치열한 소송을 벌인 끝에 승리했고, 이때부터 코카콜라에는 제조법의 비밀이란 신화가 만들어진다.
캔들러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코카콜라 브랜드 이미지의 기초를 처음으로 닦은 사람이다. 코카콜라를 인수한 뒤 콜라의 무료 시음권을 나눠주는 새로운 마케팅 방법을 동원하는 등 코카콜라의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었는데, 그가 회사를 인수할 무렵에 콜라는 더 이상 치료제가 아니라, 알코올이 함유되지 않은 소프트드링크에 불과했고, 코카인은 매우 위험한 마약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독실한 기독교인이던 캔들러는 이때부터 코카콜라에 마약 성분을 없앤 코카 잎을 사용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콜라는 병에 담겨 팔리는 음료가 아니라 약국형 잡화점인 드럭스토어에서 고객이 요구하면 즉석에서 제조해 잔에 담아 파는 음료였다. 콜라 원액은 여러 가지 재료를 섞은 상태에서 적당한 양의 물에 320배의 설탕을 녹여 걸쭉한 시럽으로 제공되었는데, 특유의 톡 쏘는 탄산 맛이 없다면 콜라는 검고 달콤한 설탕물에 불과했다.
1894년 벤저민 토머스와 조지프 화이트헤드는 캔들러를 찾아가 자신들에게 코카콜라를 병에 담아 파는 보틀러(Bottler)사업의 계약 특허권을 달라고 요구했다. 보틀러는 코카콜라를 포함해 코카콜라가 생산하는 여러 제품을 유통, 생산,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회사를 일컫는 말이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코카콜라 브랜드를 더 널리 홍보하고 더 많은 사람이 코카콜라를 맛보도록 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캔들러가 이들의 열정에 감복한 덕분인지 아니면, 보틀링 사업이 얼마 안 가서 망할 것이라고 생각한 때문이지 알 수 없지만, 결국 콜라 원액 1갤런(약 3.785리터)당 1달러에 불과한 금액으로 원액을 제공하겠다는 계약을 맺었다. 문제는 당시 계약의 만료 시한을 정해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캔들러는 보틀링으로 팔리는 콜라 제품이 그리 많지 않을 거라 판단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예측은 빗나갔다. 드럭스토어에서 팔리는 콜라보다 병 콜라의 매출이 훨씬 높았던 것이다. 뒤늦게 계약을 변경하려 했지만, 누구에게나 잘 팔리는 코카콜라를 1갤런당 1달러에 무기한으로 공급받아 자기 지역에서 독점하는 권한을 가진 보틀러들이 계약 내용을 변경할 까닭이 없었다. 이 계약은 지금까지 ‘캔들러의 실수’라 불리며 코카콜라가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정한 이후에도 큰 대가를 치르게 만들었지만, 거꾸로 보틀러 시스템은 코카콜라를 미국을 넘어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브랜드로 자리매김하는 계기로 볼 수 있다.
또한 캔들러는 코카콜라 역사에 남을 또 한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코카콜라가 유사 제품들과 확연히 구분되기 위해서 “어두운 곳에서도 사람들이 코카콜라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병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디자인 공모전을 연 것이다. 1915년 열린 디자인 공모전을 통해 선정된 코카콜라 컨투어 병(Contour Bottle)은 20세기 가장 뛰어난 디자인으로 평가되는데 이 병의 디자인적 가치만 약 4조 원에 이른다고 한다. 캔들러는 1916년 애틀랜타 시장이 되어 경영에서 물러나, 1919년에 어니스트 우드러프에게 2,500만 달러에 회사를 팔았다. 어니스트의 세 아들 중 장남인 로버트 우드러프가 훗날 가장 오랜 사장으로 재임하면서 코카콜라를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시켰다. 
결국, 이러한 코카콜라 스토리로 인해 인류는 코카콜라라는 브랜드와 함께 미국식 민주주의, 미국식 문화 그리고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달착지근한 몽상의 노예가 되어 갔던 것이다. 

▲ 박기환 ㈜에머슨 케이 파트너스 대표

인사이트코리아, INSIGHT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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