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인의 핸드프린팅

2022-06-02     양재찬 경제칼럼니스트

사람들은 약속을 지키자고 맹세할 때 흔히 새끼손가락을 건다. 후크 모양으로 구부린 새끼손가락을 서로 걸어 맞는 것만으로 성이 차지 않는지 엄지손가락으로 맞도장을 찍는다. 이런 손가락 약속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내로라하는 기업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핸드프린팅(hand printing), 손도장을 찍었다.

지난 5월 25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앞 잔디광장. 중소기업인대회 중간에 대·중소기업 간 공정과 상생을 통한 신동반성장을 다짐하는 핸드프린팅 퍼포먼스가 진행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중앙에 서고 양쪽으로 5명의 기업인이 자리했다.

중소기업을 대표해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 이정한 한국여성경제인협회장, 오세희 소상공인연합회장, 강삼권 벤처기업협회장과 이날 훈장을 받은 주보원 삼흥열처리 대표가 상생 약속 징표에 손바닥을 찍었다. 대기업에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 회장, 정의선 현대차 회장, 구광모 LG 회장, 신동빈 롯데 회장 등 5대 그룹 총수가 핸드프린팅을 남겼다.

사실 핸드프린팅은 미국 영화의 본고장 할리우드의 문화적 향취이자 상업적 이벤트다. 당대 스타들을 기리는 한편 동판에 새겨진 그들의 손도장과 사인을 통해 후세대의 영화 소비를 늘리려는 의도가 작용했다. 한국 영화계도 이를 벤치마킹했다. 우리 영화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고자 1986년과 1988년, 1996년 대종상영화제 개막과 함께 핸드프린팅 행사를 진행했다. 당시 배우들의 손도장은 동판으로 만들어져 서울 종로 피카디리극장 광장에 전시돼 있다.

경제계의 핸드프린팅 행사도, 중소기업인대회에 5대 그룹 총수가 모두 참석한 것도 처음이다. 핸드프린팅 행사가 열리기 전날 삼성·현대자동차·롯데·한화 등 4개 그룹은 향후 3~5년간 588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같은 날 대한상공회의소 주관으로 신(新)기업가정신이 선포됐다.

핸드프린팅 행사 이튿날 SK‧LG‧포스코‧GS‧현대중공업‧신세계‧두산 등 7개 그룹도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이들 11개 그룹의 투자규모는 1060조원에 이른다. 새 정부 출범 보름을 전후해 신기업가정신 선포, 신동반성장 서약, 대기업의 투자계획 발표가 잇따랐다.

중소기업인대회는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회관에서 열리다가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인 2009~2016년 청와대에서 열렸다. 문재인 정부에서 여의도로 돌아갔다가 이번에 용산 대통령실 앞 잔디광장 행사로 바뀌었다. 헌정사를 보면 정치지도자의 기업관이나 정부의 정책 기조에 따라 기업정책의 틀이 변화했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표방한 정부도 있었고, 친노동 정부도 있었다. 윤석열 정부는 ‘민간 주도 성장’을 정책 기조로 내세웠다.

이번 핸드프린팅 행사는 중소기업인대회를 준비하는 중소기업중앙회가 5대 그룹 상생협력팀과 접촉해 만든 공동 작품으로 전해진다. 대·중소기업간 동반성장을 꾀하려는 기업인들의 염원을 담은 이벤트인 동시에 지금까지 상생·윈윈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대‧중소기업 간 상생과 협업은 지속 가능한 기업경영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중소기업의 협력과 납품 없이 대기업이 홀로 설 수 없고, 중소기업도 대기업 없이 시장과 판로를 개척하기 어렵다. 그룹 회장과 중소기업 대표의 손도장 약속은 과연 어떤 상생과 협업 지도를 그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