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맘루크 王家는 고구려 고주몽 후손이었다
이집트 맘루크 王家는 고구려 고주몽 후손이었다
  • 김석동 지평인문사회연구소장
  • 승인 2021.03.02 10: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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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사학자 전원철 박사 주장…13~16세기 이집트 지배
해지는 나일강.<지평인문사회연구소>

[인사이트코리아=김석동 지평인문사회연구소장] 이집트는 기원전(BC) 8000년경부터 나일강 유역에서 고대 문명을 탄생시켰다. 고대 이집트 역사는 BC 3100년 메네스왕이 멤피스에 도읍한 이래 BC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할 때까지 약 2800년간 지속됐다. 고대 이집트는 고왕국 시대(BC 3100~BC 2040년), 중왕국 시대(BC 2040년~BC 1567년), 신왕국 및 후기왕국 시대(BC 1567~BC 332년)에 걸쳐 31개 왕조가 이어져왔다.

이후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헬레니즘 시대가 열려 BC 305년부터는 알렉산드로스의 계승자이자 마케도니아의 이집트 총독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 왕이 돼 BC 30년까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이어졌다. 이 왕조는 유명한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 사이에 난 아들이 죽고 막을 내린다. 이후 이집트는 로마 제국에 편입돼 토착 문화, 그리스 문화, 기독교가 혼합된 시대를 맞이했다. 641년 아랍 세력의 침공을 받아 이슬람 세계에 편입돼 이슬람 제국의 우마이야 왕조(661~750년), 압바스 왕조(750~963년) 시대를 거쳐 시아파 파티마 왕조(963~1169년), 수니파 아이유브 왕조(1169~1252년)로 이어졌다.

13세기부터는 특이한 역사가 전개된다. 아시아 기마군단의 역사가 이집트에서 전개되는 것이다. 먼저 아시아 기마군단 맘루크 왕조가 이집트를 지배하게 된다. 맘루크 왕조가 출범하게 된 배경을 보면 이슬람 세계에서는 노예제도가 폭넓게 인정되는 분위기였으며 가사 노예와 군인노예 등으로 활용됐다. 군인 노예는 전투력과 충성심을 높이 평가받아 사회의 상층부까지 진출하는 사례들이나타났다. 나아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 아프가니스탄의 가즈나 왕조, 인도의 노예 왕조 등 노예들이 세운 왕조까지 등장하게 됐다. 그중 대표적인 노예 왕조가 바로 이집트에서 왕조를 이룬 맘루크다.

맘루크는 아랍어로 ‘노예’를 뜻하며 특히 기마전단으로 이름 높고 전투력이 출중한 투르크인들을 용병으로 많이 썼다. 맘루크는 충성심과 용맹성을 인정받아 왕실 호위병으로 그 자리를 굳혔다가 나중에는 정권까지 장악하게 된다. 1250년 맘루크 사령관 ‘아이벡’이 정권을 장악하고 술탄 자리에 올라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가 시작된다. 이 세력은 아랍 세력의 반란에 직면하기도 하나 당시 공포의 침입자 몽골군을 격파하고 이슬람 세계를 지켜냈다.

가자에 위치한 쿠푸왕 피라미드.<지평인문사회연구소>

이슬람 세계 수호자 된 아시아 기마군단

몽골의 대칸 몽케의 동생 훌라구는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가 있던 바그다드에 이어 시리아의 다마스커스까지 점령했다. 이어 이집트에 항복을 요구했으나 맘루크의 술탄 쿠트즈와 군사령관 바이바르스는 전쟁을 택했다. 갈릴리 동쪽 ‘아인 잘루트’ 대전투에서 맘루크 군은 몽골군을 섬멸하고 이집트를 구했다. 이어 멸망한 압바스 왕조의 가문을 이집트로 불러들여 카이로에서 칼리파제(制)를 복원토록 해 이슬람 세계의 수호자가 된다.

북방사학자 전원철 박사에 의하면 아인 잘루트 전투의 주인공 쿠트즈와 바이바르스는 모두 고주몽의 후예인 오구즈칸 가계의 일원이라 한다. 오구즈칸 일족은 고구려 멸망 후 서쪽으로 가서 호라즘 제국을 건설했고, 그 일부 세력이 이집트 용병이 됐다가 후에 맘루크 왕조를 건설하게 됐다고 한다. 즉, 13~16세기까지 이집트의 왕가 맘루크는 고구려 후손이었다는 의미다.

15세기 말에 이르러 포르투갈이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거쳐 인도양으로 가는 해양 루트를 개척함에 따라 수에즈 해협의 통행세 수입이 줄어든 맘루크의 이집트 재정상태는 급격히 악화됐다. 이런 와중에 1515년 또 다른 아시아 기마군단 오스만 제국의 셀림 1세가 술탄으로 즉위하면서 유럽 지역을 뒤로하고 아시아 지역 정복에 나섰다.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를 공략한데 이어 시리아로 진격해 맘루크 군을 공격했다. 1517년 이집트의 피라미드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맘루크가 대패함에 따라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지배가 시작된다.

전원철 박사에 의하면 아시아 기마군단인 오스만 제국의 왕가 역시 맘루크 왕조를 이룬 가문과는 다른 계보이나 고구려 후손인 오구즈칸의 후예라고 한다. 18세기 들어 오스만 제국의 지배력이 약화하면서 1798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함대가 3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카이로를 점령해 이집트는 프랑스의 영향력에 들어가게 된다. 로제타석이 발견된 것도 바로 이 시기다. 그러나 프랑스는 3년 만에 철수하고 영국에 그 자리를 물려주게 됐고 이집트는 형식상 오스만 제국의 일원이었지만 사실상 영국의 지배하에 있게 됐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고 형식적인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지배도 끝나게 된다.

기마군단 역사 전개됐던 이집트를 찾아서

필자가 인류 문화의 뿌리 중 하나이자 13세기 이후 근세에 이르기까지 아시아 기마군단 맘루크와 오스만 제국의 영역이었던 이집트를 찾은 것은 마음먹고도 여러 해 지난 후였다. 2010년 말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재스민 혁명)에 따른 혼란과 이후 이어지는 끊임없는 테러 등으로 여행이 어려운 지역이었지만 상황이 호전됐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여행 일정을 잡았다. 그런데 출발이 한 달 정도 남은 시점에 이집트 시나이 반도의 이슬람 사원에서 폭탄 테러로 300명 이상 폭사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어 출발 2주 전 카이로 인근의 콥트 교회에서 괴한의 총기난사로 10여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출발을 망설이는 상황에서 이집트 정부에서 여행객의 안전을 위해 특별대책을 강구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계획대로 이집트로 향했다.

룩소르 신전.<지평인문사회연구소>

인천공항에서 에티하드 항공편으로 10시간 반 비행해서 UAE의 아부다비에 도착해 다시 4시간 반 걸려 카이로 공항에 안착했다. 카이로 공항에서 바로 국내선으로 환승해 룩소르(Luxor)로 이동했다. 룩소르는 이집트 중앙부의 나일 강변 동서 양안에 자리 잡은 고도이며 중왕국과 신왕국의 수도로 1600년간 왕국의 중심지였다. 수도가 이전된 후 에도 종교 중심지로 계속 번영했고 신전을 비롯한 수많은 고대 유적을 품은 고고학의 보고인 도시다. 룩소르에서 고대 이집트의 최대 신전인 카르낙 신전과 룩소르 신전을 둘러보고 일대의 신전 등에서 발굴된 수많은 고대유물들을 전시한 룩소르 박물관을 관람했다. 그동안 세계 여러 곳에서 고고학 박물관을 봤지만 소문대로 압권이었다. 수천 년 전의 석상들이 야외에 그대로 전시돼 있어 보존상 문제가 없는지 물어보니 최근 20년간 비가 온 적이 없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왕가의 계곡.<지평인문사회연구소>

저녁 무렵 나일강을 따라 이동하는크루즈에 승선했다. 60여개 식당, 연회장 등이 완비된 크루즈가 나일강을 따라 남쪽인 상류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4박 5일 일정이었다. 크루즈를 타고 처음 도착한 곳은 룩소르 서쪽 ‘왕가의 계곡’이다. 기원전 16세기에서 11세기경 신왕국 시대의 파라오들인 투탕카멘, 람세스 1·2·3·4세, 아멘호테프 2세 등의 무덤이 계곡에 줄지어 있다. 무덤 내부에는 수많은 벽화 등이 남아 그들의 시대를 증언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약간 떨어진 남쪽 편에는 ‘왕비의 계곡’이 있다. 이어 깎아지른 절벽 아래에 지은 웅장한 3층의 테라스식
신전 하트셉수트 신전을 방문했다. 이집트 최초의 여왕인 하트셉수트는 유명한 정복군주 투트메스 3세 바로 앞의 여왕으로 이 신전을 지었다고 한다. 크루즈로 돌아오는 길에 아멘호테프 3세가 건축했던 국왕의 영혼을 제사하던 장제전이 모두 파괴되고 두 개의 거대한 석상만 남아 있는 ‘멤논의 거상’에 들렀다.

수몰 위기서 살아난 유적들

저녁 때 크루즈에서 휴식하는 동안 에스나 운하를 통과했다. 나일강 수위를 조절하면서 상류로 이동하는 곳이라 시간이 많이 소요됐다. 밤늦게 룩소르 남쪽 110km 지점 나일강 서안에 있는 에드푸(Edfu)에 도착했다. 이튿날 마차를 타고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에 건축되고 고대 이집트 신전 건축양식이 가장 완벽하게 보존돼 있다는 호루스 신전을 탐방했다. 신전의 비문들에 남아있는 그 옛날의 기록들을 보면 경이롭기까지 하다. 다시 크루즈를 타고 이번에는 아스완 북쪽 40km에 위치한 콤옴보(Kom Ombo)로 이동했다. 나일강 기슭의 사탕수수밭 한가운데에는 악어 머리를 가진 신과 매의 머리를 가진 신을 모신다는 로마 시대 초기에 지어진 신전이 있는데 신전에 새겨진 고대의 캘린더라고 할 수 있는 부조가 인상적이었다.

아스완댐에서 본 나일강.<지평인문사회연구소>

다시 크루즈로 남쪽으로 가서 아스완(Aswan)에 도착해 밤을 보낸 후 다음날 아침 크루즈에서 내려 남쪽으로 240km 떨어진 아부심벨(Abu Simbel)로 향했다. 버스로 약 세 시간 거리인데 테러 위협 때문에 현지 경찰이 직접 경찰 차량으로 버스를 호위해 주었다. 이 지역이 과거 반군 활동이 활발했던 곳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부심벨에는 람세스 2세가 자신을 위해 건립한 대신전과 왕비를 위한 소신전이 있다. 1817년 발굴 이후 1960년대에 아스완하이댐을 건설하면서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유네스코가 국제협력을 얻어 1968년 신전을 2만여개 조각으로 해체해 인근 고지대로 이전해 복원한 세계적인 유적이다.

이시스 신전과 빛과 소리의 공연.<지평인문사회연구소>

다시 크루즈로 돌아와 선상에서 휴식한 후 밤에 소형 배 를 타고 필레섬으로 가서 이시스 신전에서 펼쳐지는 환상적인 ‘빛과 소리의 공연’을 감상했다. 고대 유적을 활용해 관람객을 유치하는 방법론에 감탄했다. 이튿날 아스완에서 오벨리스크의 제작 과정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미완성 오벨리스크를 방문한 후 유네스코가 지원해 아스완댐으로 수몰된 누비아(Nubia)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들이 소장된 누비아 박물관을 관람했다. 이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길이 2km에 달하는 아스완하이댐을 관람한 후 국내선 비행기편으로 북쪽의 카이로로 이동했다. 카이로부터는 버스로 이동했다. 여행객의 안전을 위해 현지 무장경찰이 버스 맨 앞좌석에 탑승했다. 버스로 멤피스(Memphis)로 이동해 계단식 피라미드와 고대 왕들의 무덤군, 세계적인 고고학 유물들이 즐비한 이집트 고고학 역사박물관에 들렀다. 명불허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카이트베이 요새.<지평인문사회연구소>

기마군단 작품, 카이트베이 요새

다음날 버스로 약 3시간 이동해 지중해의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 도착했다. 고대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불리는 파로스의 등대가 파괴된 자리에 건설된 카이트베이 요새를 찾았다. 이번 여행의 가장 중요한 목적지였다. 1446년 맘루크 왕조의 술탄 카이트베이가 건설한 성채다. 이곳은 알렉산드리아는 물론 지중해안의 군사요충지로 투르크군의 공격에 대비해 해안선 방어를 목적으로 세워졌다. 이 요새야 말로 아시아 기마군단 맘루크가 중동 지역에 진출해 세운 왕조의 작품이기에 더욱 감회가 깊었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요새의 기능이 점차 약화됐고 1984년 대규모 공사 후 관광지가 됐다. 지중해의 거센 파도가 넘실대고 해풍이 몰아치는 해안에 늠름하게 자리 잡은 성채는 맘루크 군의 불굴의 의지를 떠올리게 했다.

이어 고대 기독교인들의 지하 묘지였다가 나중에 피난처이자 예배지로 변모한 카타콤(Catacomb)을 방문했다. 알렉산드리아 서부의 카르무스 지역에 있는 카타콤은 기원후(AD) 1~2세기경에 조성된 대규모 지하 묘지인데 4세기에 이집트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기독교 박해를 피하는 은신처가 되기도 했다. 1900년에 이르러 우연히 마차가 구멍에 빠지면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고대 명소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이어받아 지금도 이집트를 대표하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들른 후 다시 카이로로 귀환해 다음날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쿠푸왕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보며 이집트 여행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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