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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2024-03-19 11:41 (화) 기사제보 구독신청
한민족은 오아시스 실크로드 개척 주역이었다
한민족은 오아시스 실크로드 개척 주역이었다
  • 김석동 지평인문사회연구소장
  • 승인 2020.07.01 11: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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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간 북방 초원길 통해 바깥 세계와 교류하며 열린 국가로 성장
쿠무다크사막.지평인문사회연구소
쿠무다크사막.<지평인문사회연구소>

중국 산시성 성도 시안(서안·西安)에서 신장 웨이 우얼 자치구의 주도인 우루무치에 이르는 장장 3000km의 오아시스 실크로드, ‘실크로드’ 하면 많은 이들이 바로 이 길을 생각한다. 버스와 기차를 번갈아 타며 황량한 벌판과 사막, 그리고 오아시스 도시로 연결된 고대로부터의 교역로를 여행했다.

역사의 현장, 오아시스 실크로드를 찾다

오아시스 실크로드는 중국 쪽에서는 대체로 시안에서 시작한다. 시안은 옛 당나라 수도였던 장안(長安)이며 전한, 서진, 북주, 수, 당 등 열 개가 넘는 왕조가 1000년 이상 도읍지로 삼았던 곳이다. 인근에 지금도 발굴 중인 진시황의 무덤인 병마용은 이곳이 고대로부터 역사의 현장 임을 보여주고 있다. 시안에서 서쪽으로 350km를 가면 실크로드의 첫 관문이라 할 수 있는 텐수이(천수·天水)를 만날 수 있다.

이곳에는 중국 4대 석굴의 하나인 맥적산 석굴을 비롯해 수 많은 유적지가 자리 잡고 있다. 맥적산 석굴은 우뚝 솟은 바위산인 맥적산에 위치하고 있다. 1600여 년에 걸쳐 만 든 수백 개의 동굴과 수천 개의 불상 조각, 절벽에 깎아 낸 초대형 석불은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다시 서쪽으로 300km 정도 가면 황허강변에 있는 실크로드 교통 중심지인 란저우(난주·蘭州)를 만나게 된다. 란저우는 간쑤성 성도로 20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다. 인근에 수많은 석불이 새겨진 병령사 석굴이 있다.

오아시스 실크로드 탐방(시안~우루무치).지평인문사회연구소
오아시스 실크로드 탐방(시안~우루무치).<지평인문사회연구소>

란저우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우웨이, 장예를 거쳐 서쪽으로 9시간 가까이 700km를 달려 새벽이 되어서야 자위관(가욕관·嘉峪關)에 이르렀다. 자위관은 만리장성의 서쪽 끝으로 교통 중심지이자 군사요충지로 명대에 건축 된 성문이 황량한 들판 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자위관에서 서쪽으로 4시간에 걸쳐 달리면 380km 떨어진 곳에서 둔황(돈황·敎皇)이 나타난다.

란저우에서 우웨이·장예·자위관을 거쳐 둔황에 이르는 길 1100km를 허시후이랑(하서회랑·河西回廊)이라고 한다. 허시후이랑은 말 그대로 치렌 산맥과 고비사막 사이 에 있는 긴 복도와 같은 오아시스 길이다. 실크로드의 요충지인 이곳은 비가 오지 않아 사막화된 곳이 많은 지역이지만, 치롄산맥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허시후이랑의 저 지대에 물을 공급해주기 때문에 오아시스 지대가 형성됐다. 그래서 오아시스 도시와 실크로드가 형성된 것이다.

동서 문화교류의 중심지 둔황

둔황은 타클라마칸 사막이 시작되는 곳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로 실크로드의 중심으로 동서 문화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던 역사의 현장이다. 5호16국 시대에 한족의 국가 서량의 수도였고, 이후 북위·서위·북주·수·당·송· 원 그리고 이어서 명·청이 차지했다.

둔황을 거쳐 텐산 산맥을 중심으로 북쪽 기슭(준기얼 분지 남부)으로 가는 길을 ‘텐산북로’, 남쪽으로 가는 길을 ‘톈산남로(타림 분지 북부)’라고 한다. 둔황을 거쳐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의 쿤룬산맥 기슭으로 가는 길은 ‘서역남로’라고 한다(타 클라마칸 사막 북쪽으로 가는 길은 서역 북로로 나중에 텐산남로로 불렸다).

둔황은 세계자연문화유산인 막고굴로 유명하다. 4세기 중반 이래 13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이 석굴에는 492개에 달하는 석굴과 수많은 조각, 벽화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막고굴은 <왕오천축국전>을 발견해 세상의 빛을 보게 한 곳이기도 하다. 신라시대인 723년경 혜초는 인도로 구법 여행을 떠났다. 그는 해로를 통해 인도로 가서 4년간 여행을 한 후 중앙아시아를 거쳐 실크로드를 통해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의 나이 30세 무렵이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세계 4대 여행기로 꼽히는 위대한 기록인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발견 당시 막고굴.지평인문사회연구소
발견 당시 막고굴.<지평인문사회연구소>

청나라 시대인 1900년 어느 날, 토사를 치우다가 갑자기 벽이 무너지면서 오늘날 17굴(장경동)이라 불리는 석굴이 하나 발견되었고, 그 속에서 무수한 경전과 회화 작품이 쏟아져 나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영국·프랑스·일본 등의 탐사대는 이들 유물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져가 버렸다. 이때 프랑스 동양학자 폴 펠리오가 1908년에 <왕오천축국전>을 가져갔고 이는 오늘날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됐다.

727년에 쓰인 이 책은 필사본 1책으로, 인도와 서역 각국의 종교는 물론 풍속·문화 등에 관한 풍부한 내용이 실려 있어 동서 문화 교류를 웅변한 고전 여행기의 금자탑으로 평가받고 있다. 8세기의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대한 세계 유일의 기록이어서 그 가치를 더하고 있다. 

명사산.지평인문사회연구소
명사산.<지평인문사회연구소>

둔황은 사막 가운데 있는 도시다. 인근에 있는 모래사막 으로 이루어져 바람이 불면 울음소리가 난다는 ‘명사산’, 사막 가운데서 신기루 같이 나타나는 오아시스 ‘월아천’이 있어 오아시스 도시라는 것이 더욱 실감 난다.

둔황을 뒤로하고 세 시간 정도 떨어진 류원(유원·柳國)으로 가서 다시 야간열차를 타고 600km를 달려 다음 날 아침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로 넘어가 산산(선선·部善)역에 도착했다.

신장 웨이우얼은 중국의 성급 자치구로 인구 약 2200만 명, 면적 166만 제곱킬로미터(남한의 약 16.7배)로 중국의 가장 큰 성이다.

중국 북서부에 자리 잡은 이 지역은 몽골, 러시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등 8개 국가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과거 중국에서는 서역(西域)이라 불렸고, 청나라 건륭제 때 ‘새로운 강역’이라 해서 신장(신강·新疆)이라고 명명했다. 

서유기 무대인 천불동서 한반도인 벽화 발견

신장의 역사는 아주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2000년경 이미 청동기를 사용한 흔적이 있고, 기마유 목민의 전통문양 형태인 동물 그림이 나타나기도 한다. 기원전 2세기경부터 흉노가 장악한 이곳은 이후 한 나라가 차지하나 다시 북방유목민 돌궐이 패권을 잡았다.

돌궐 이후에는 위구르, 몽골, 카라키타이, 모굴 칸국, 청나라 등이 지배했던 땅이다. 산산 인근의 쿠무다크 사막을 둘러보고 투루판으로 이동해 서유기의 무대인 화염산, 교하고성, 고창고성, 불교 석굴 사원인 베제크리크 천불동을 둘러보았다.

베제크리크 천불동은 투르판 동쪽 화염산 기슭 계곡에 있는데, 석굴 중 하나에 한반도인으로 추정되는 벽화가 남아있다. 7 세기 당나라 시절부터 지어진 이 석굴은 일찍이 한반도인 들이 서역과 활발히 교류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천불동의 벽화(원 내는 한반도인 추정).지평인문사회연구소
천불동 벽화(원 내는 한반도인 추정).<지평인문사회연구소>

투르판은 사막 가운데 있는 오아시스 도시로 연간 강수량이 55mm에 불과했던 적도 있다고 한다. 연간 강수량 이 1250mm에 달하는 우리나라의 여름철 1시간 강수량도 안 된다. 이렇게 건조하기에 홈으로 지은 성, 무덤, 심지어 미라까지 고대 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다.

투르판에서 200km 서쪽으로 떨어진 신장 웨이우얼의 주도 우루무치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바람이 엄청나게 부는 지역을 지나게 된다. 상상을 초월하는 강풍이 부는데 바람이 세게 불 때는 대형차도 운행을 중단하고 길가에 피신한다. 수년 전 기차가 탈선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풍력 발전을 위한 바람개비가 수도 없이 들어차 있다.

우루무치는 중국보다는 서역의 도시라는 분위기가 물씬 나는 도시다. 서역 최대의 도시이자 이슬람 문화의 분위기, 그리고 유목민의 풍속이 어우러진 도시로 여행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

우루무치 인근에서 세계자연 유산이자 한민족 시원지 또는 이동 경로와 관련이 있다는 텐산 산맥 해발 1928m에 있는 텐산 천지를 둘러보았다. 멀리 만년설 산이 보이고 백두산 천지를 떠오르게 하는 장관이 펼쳐졌다. 

실크로드에서 전개된 한민족 역사의 흐름

초원 실크로드는 고대로부터 스키타이를 비롯한 흉노·선비·돌궐·몽골 등 북방 기마유목민의 삶의 터전이었다. 이들은 대초원 지역을 종횡무진 누볐고, 이들이 세운 여러 기마유목 국가가 흥망을 거듭했다. 바로 이곳에서 한민족도 삶을 개척했을 것이다. 빗살무늬 토기, 암각화, 고인돌, 고분, 청동기 등 수많은 선사시대의 유적과 유물들이 이를 증명한다.

특히 오아시스 길이 열린 다음에는 한민족의 광범위한 교류 역사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한민족이 가진 열린 사회의 특징과 진취적 기상을 보여 주는 대목들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오아시스 실크로드 또한 북방민족과 한민족의 활동 무대였다.

5세기경 고구려 무덤인 무용총 벽화인 무용도는 인도로부터의 염색기법 전래를 말해주고, 쌍영총 벽화의 연꽃무늬는 불교 전래, ‘각저총’ 씨름도는 서역인의 등장을 각각 보여준다.

앞서 기술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8세기 초 신라시대의 교류를 증명하고 있다. 1965년 실크로드 중앙아시아 지역 중심지인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는 고구려 사신이 그려진 아프라시압 궁전벽화가 발견된 바 있다. 이는 한민족의 실크로드 교류사를 웅변한다. 오르혼 강변에서 발견된 돌궐의 ‘퀼테긴 비문’에도 고구려 사신에 대한 기록이 있다.

백제시대도 예외가 아니다. 1971년 발굴된 25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공예, 벽화, 유리구슬, 금동대향로 등 수많은 유물은 동서교류의 흔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신라의 경우도 미추왕릉의 유리구슬 목걸이, 황금보검은 그리스나 로마 양식이라고 한다. 원성왕 무덤의 무인석도 서역인 모습이다. 흥덕왕 때 장보고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실크로드 해로를 일본까지 연장하고 동북아 삼각 무역망을 형성했다.

고려시대에도 개경 외곽의 벽란도는 한·중·일 무역 거점으로 국제 무역항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처용가>와 처용무의 ‘처용’도 페르시아나 아랍인이라고 한다.

발해시대 유적에서도 중앙아시아의 소그드 상인이 쓰던 은화와 기독교 영향이 보이는 불상이 발견되었다. 고구려 유민 출신인 고선지 장군은 실크로드의 개척자로, 동서 문명 교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중국이 중앙아시아 지역(서역)에 진출하는데 가장 기여한 인물을 꼽는다면 한나라의 반초와 당나라의 고선지 장군을 말할 수 있다. 당 현종 시대인 747년 고선지 장군은 서역의 최대 장애물인 토번 정벌에 나선다. 1만 군사로 구성된 결사대를 끌고 구차의 안서도호부를 떠나 서진하여 파미르 고원을 넘어 힌두쿠시산맥의 해발 4600m가 넘는 탄구령을 돌파해 토번을 장악했다.

고선지는 그 후 안서도호부의 책 임자인 안서사진절도사로 임명되어 실크로드는 물론 중앙아시아와 파미르를 지배했고, 그때 실크로드는 최전성기를 누렸다. 그는 751년 아랍의 연합세력과 벌인 탈라스 전투에서 패한 후 안록산의 난 진압에 투입되어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민족 출신 장군에 대한 거듭된 모함으로 755년 처형됐다.

한민족은 역사 시대 이전부터 오랜 기간 북방 초원길을 통해 기마유목 민족들과 더불어 삶의 흐름을 이어갔다. 역사 시대에 들어서는 오아시스 실크로드를 통해 널리 바깥 세계와의 교류를 지속하면서, 열린 국가로 성장해 왔다. 그러나 고려를 지나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문호를 열고 외부와 교류, 협력, 투쟁해온 고유의 기개와 진취성을 상실하고 마침내 나라마저 잃어버리는 극한의 상황까지 경험했다. 그러나 현대사에서는 달랐다. 새로운 한민 족 에너지는 불과 60년 만에 나라 바깥을 향해 열린 세계국가를 다시 건설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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