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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2024-04-19 19:07 (금) 기사제보 구독신청
‘밀레니엄 맨’ 칭기즈칸, 그는 어떻게 세계 80%를 지배했나
‘밀레니엄 맨’ 칭기즈칸, 그는 어떻게 세계 80%를 지배했나
  • 김석동 지평인문사회연구소장
  • 승인 2020.06.01 13: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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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만㎞ 대몽골 제국 발원지로 가는 길고 긴 여정

칭기즈칸과 보르추가 만난 오논강변.<지평인문사회연구소>

세계를 한 지붕 아래 엮은 ‘밀레니엄 맨’ 칭기즈칸이 나고 자란 곳은 과연 어떤 곳일까. 그를 생각할수록 그곳을 직접 보고 싶은 마음 역시 커졌다. 7월의 찌는 듯한 더위 속에 다시 몽골을 찾았다. 여러 차례 몽골을 방문했으나 칭기즈칸 탄생지는 매우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어서 그동안 가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몽골 인사가 나서서 자기도 가보지 않은 곳이라 함께 가보겠다 하여 기회가 온 것이다.

‘밀레니엄 맨’ 칭기즈칸 탄생지를 향한 여정

몽골 지도. 굵은 선이 칭기즈칸이 태어난 헨티주.<지평인문사회연구소>

몽골에는 ‘특별시’에 해당하는 ‘울란바토르’와 ‘주’라 할 수 있는 21개 ‘아이막(aymag)’이 있다. 그중 동북쪽에서 러시아와 접경하는 ‘헨티주’가 바로 칭기즈칸이 태어나고 세력을 모아 세계 제국을 건설한 발원지다. 

헨티주는 면적 8만 킬로미터로 우리나라보다 약간 작을 정도로 넓은 땅이지만 인구는 7만2000명에 불과하다. 주도는 ‘온드르항’으로, 2013년 말부터 이름을 ‘칭기즈칸 시(市)’로 바꿨다. 헨티주에는 군에 해당하는 솜(sum)이 18개가 있는데 이중 북동쪽 끝 러시아와 경계에 있는 ‘다달’이 칭기즈칸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다. 

이곳을 방문하려면 일반 차량으로는 어림없다. 웬만한 물속과 개펄을 지날 수 있는 특수 RV차량이 필요하고, 사고·고장 등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적어도 두 대 이상이 워키토키로 교신하면서 가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고장과 같은 사고가 났을 때 해결할 방법이 없다.

다달솜을 방문하려면 먼저 울란바토르에서 온드르항 시까지 340킬로미터를 달려야 한다. 원래는 포장도로지만 곳곳이 패고 끊어져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와 다름없다. 휴식시간을 포함해 7시간이나 걸렸다. 울란바토르에서 동쪽으로 가다 보면 ‘톨강’을 만나게 된다. 톨강은 고르히-테를 지 국립공원을 남북에서 가로질러 흐르는 몽골 동북부의 젖줄이다. 다시 동쪽으로 계속 가면 울란바토르 150킬로미터 지점에서 ‘헤를렌강’을 만난다. 헤를렌강은 헨티주의 헨티산맥 남쪽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동쪽으로 중국 헤이룽장성에 이르는 1264㎞의 강이다.

대초원을 굽이굽이 흐르는 강가에서 간이의자를 펴고 잠깐 휴식을 취했다. 동행한 몽골 인사들이 독한 몽골주를 권했다. 술을 손가락 끝에 묻혀 세 번 튕기는 ‘고수레’는 필수 절차다. 몽골인들은 초원에서 음식을 먹을 때 하늘, 땅, 사람에게 세 번 고수레를 한다고 한다. 고수레는 우리에게도 있는 문화다. 술과 함께 양고기를 삶아 물기를 빼고 갖고 다니다 안주 삼아 손으로 쥐고 뼈를 발라 먹는다. 몽골인들이 가장 즐기는 야외용 음식이다.

다시 차를 달려 저녁 무렵에 칭기즈칸 시에 도착했다. 칭기즈칸 시는 헨티주의 주도이지만 인구 1만5000여 명의 작은 도시다.

칭기즈칸 시에서 헨티주 북단의 다달솜까지는 275㎞ 거리다. 비포장 초원길로, 휴식시간을 포함해서 장장 11시간 걸렸다. 울란바토르에서 오후 1시 출발해 다음 날 아침 7시까지 밤을 꼬박 지새우며 달린 총 18시간의 강행군이었다. 칭기즈칸 시에서 북쪽으로 달리다 노르블린 솜을 지나면서 새벽이 왔고, 드디어 ‘오논강’이 나타났다. 오논강은 몽골인들이 신성시하는 헨티산맥에서 발원하여 러시아의 ‘인고다강’, 만주의 ‘아무르강’으로 이어진다. 칭기즈칸이 태어난 곳 인근에 있는 오논강은 대몽골 제국의 발흥을 지켜본 것이다.

몽골을 통일한 칭기즈칸은 1206년 봄, 오논강 상류에서 열린 쿠릴타이에서 몽골 칸의 자리에 올라 대몽골 제국의 서막을 열었다. 노를 젓는 바지선에 차를 싣고 강을 건넌 후 한참을 더 달려 드디어 롯지에 도착했다. 롯지에서 휴식을 취한 후 오논강으로 가서 낚싯대를 드리웠다. 워낙 물이 맑고 인적이 드물어서 그런지 물고기가 의외로 많이 잡혔다. 저녁 롯지로 돌아와 일행이 함께 생선탕을 끓였다. 생선탕을 햇반과 함께 먹다가 라면 사리를 탕에 넣고 다시 끓여주니 일행, 특히 몽골인들이 난리가 났다. 상상도 못한 맛이라는 것이다. 저녁을 먹고 은하수가 흐르고 별이 쏟아지는 몽골 밤을 보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칭기즈칸 탄생지를 향해 떠났다. 길도 없는 들판 길을 달려 얼마 후에 작은 강줄기를 만났다. 이곳에는 바지선도 없다. 동네 분에게 연락하니 물길을 안내해줄 사람이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 그 사람이 먼저 허리춤을 넘는 강을 걸어서 길을 찾으며 건너본 다음 우리 차 두 대를 차례로 안내했다. 차량 턱밑까지 물길이 차올랐다.

칭기즈칸 탄생 기념비.<지평인문사회연구소>

다시 들판과 고개를 달려 멀리 부르칸 산이 보이는 곳까지 왔다. 차에서 내려 조금 더 가니 조그만 샘물이 나타났다. 탄생 직후 칭기즈칸을 목욕시킨 곳이라 한다. 곧이어 칭기즈칸 탄생지임을 알리는 기념비가 보였다. 칭기즈칸은 세계사를 새로 쓴 대영웅이지만 몽골이 청나라와 러시아에 지배받는 수백 년간 그는 잊힌 존재였고, 그의 이름은 금기어가 됐다. 그러나 탄생 800년이 지난 후 ‘진정한 리더’ ‘천년의 역사위인’으로 부활했다. 1961년 탄생 800년 만에 그의 업적을 기리는 대형 비석이 그의 고향에 세워졌다. 그렇지만 그곳에는 아직도 작은 돌무지와 푸른 깃발만이 그의 탄생지를 지키고 있다. 영웅은 그렇게 태어나고 또 알려지지 않은 곳에 묻혀있다.

세계 문명권의 80%를 지배한 진정한 세계 제국의 건설자인 밀레니엄 맨 칭기즈칸의 탄생지는 이렇게 소리 없이 소박한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려 왔다. 인근에서 칭기즈칸과 자무카가 운명의 일전을 벌였던 달란 발주트 평원을 내려다보며 이곳에서 전개된 대몽골 제국 역사의 서막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테무진의 탄생과 아버지의 죽음

칭기즈칸은 몽골 제국의 창시자이며 초대 대칸이다. 그는 미미한 세력이었던 고원 동부 주변 부족을 통합해 ‘전몽골 칸국’을 세웠다. 이어 메르키트, 타타르, 케레이트, 나이만 등 강성한 이웃 몽골족을 차례로 정복해 몽골 고원을 장악하고 마침내 ‘대몽골국’을 출범시켰다. 이에 그치지 않고 유라시아 전역에 걸친 역사적인 대원정에 나서 세계 제국을 건설했다. 그가 있었기에 몽골 제국이 존재했고, 몽골 제국으로 인해 세계는 통합과 교류라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됐다. 세계화는 이미 그때 시작된 셈이다.

그런 위대한 칭기즈칸이지만 300년간의 청나라 지배와 러시아 영향력 아래 있던 시대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60년대 이후에야 비로소 재조명을 받았다. 1995년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는 새 밀레니엄을 앞두고 지난 1000년간 가장 중요한 인물로 칭기즈칸을 선정했다. 그의 고향을 돌아보면서 그의 시대를 다시 떠올려 보았다.

<몽골비사>는 몽골인들의 조상과 건국 과정에 대해 몽골어로 기록된 방대한 초기 문헌이다. 주인공은 테무진(칭기즈칸)이다. 일찍이 부친을 잃고 황량한 초원에 버려졌던 그가 어떻게 외로움과 굶주림, 위험을 이겨내고 약탈과 보복이 횡행하는 유목민의 근원지 몽골 고원을 통일한 후 정복전쟁을 통해 대몽골 제국을 건설했는지, 그 과정을 그리고 있다.

몽골의 한 부족 ‘보르지기드’의 부족장 예수게이 바아타르는 메르키트족의 ‘칠레두’가 신부를 데려오는 길을 습격해서 신부를 빼앗아 버리는데 이 신부가 칭기즈칸의 어머니 ‘후엘룬 카툰’이다. 1162년 예수게이와 후엘룬 사이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예수게이는 그가 사로잡은 타 타르강수 이름을 따서 테무진이라 이름 지었다. 그 장소가 오논 강변의 ‘델리운 볼닥’이다.

헤를렌 강변에서 김석동(왼쪽 두번째) 대표와 동행인들.<지평인문사회연구소>
 

테무진이 아홉 살이 되자 예수게이는 후엘룬의 친정인 옹기라트족 마을에 가서 ‘부르테’라는 처녀와 결혼시킨 후 풍습에 따라 테무진을 처가에 남겨두고 돌아오다 타타르족 게르에서 독이 든 음식을 먹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숨졌다.

예수게이가 죽자 그 통치하에 있던 몽골족은 후엘룬과 테무진을 비롯한 어린 자식들만 버려둔 채 다른 목초지로 이동해 테무진 일가는 몰락했다. 이때부터 여장부 후엘룬은 어린 자식들을 홀로 기르면서 초원에서 생존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테무진은 이복형 ‘베르테크’를 살해하고 가장으로서 일가가 초원에서 자리를 잡도록 한다. 그러나 장래를 우려한 몽골족 일파(타이치우트)가 다시 공격했다. 테무진은 포로가 되어 수년간 처참한 노예생활을 하다 천신만고 끝에 탈출했다. 우여곡절 끝에 가족과 재회한 테무진은 ‘부르칸 산’ 남쪽으로 옮겨 어렵게 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전 재산인 말 여덟 마리를 도둑맞았다. 테무진은 즉시 잃어버린 말을 찾아 정처 없이 나섰고 그 과정에서 ‘보르추’를 만나 함께 힘을 합해 말을 되찾았다. 테무진이 찾은 말 중 일부를 나누어 주겠다고 하자 보르추는 “나는 좋은 동무에게 도움이 되겠다고 왔다. 무슨 전리품이라고 내가 갖겠는가?”라고 답했다. 이후 둘은 평생 동지가 되었다.

테무진의 시련 극복과 대몽골 제국의 출범

테무진은 자리를 잡자 헤를렌강을 따라 내려가 아홉 살 때 정혼한 부르테를 찾아 돌아왔고 세력도 늘어갔다. 그러나 이런 안정도 잠시, 과거 예수게이에게 후엘룬 신부를 빼앗겼던 초원의 강자 메르키트족이 보복 공격을 해왔다. 이번에는 예수게이의 며느리이자 테무진의 부인 부르테를 납치해갔다. 테무진은 부르칸 산으로 도주했다.

기운을 차려 돌아온 테무진은 부족을 재건하면서 아버지 예수게이와 안다(형제 맹약) 관계였던 케레이트의 ‘토그릴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토그릴칸은 쾌히 응하고 자신의 2만 군사와 안다인 자다란의 ‘자무카’ 2만 군사로 메르키트를 협공해 와해시켰다. 테무진은 부르테를 되찾았다. 부르테는 납치되어 잉태된 것으로 추정되는 ‘주치(손님이라는 뜻)’란 아들을 낳았다.

테무진은 토그릴칸, 자무카라는 동맹군과 보르추, 젤메, 무칼리 등 동지들의 도움으로 분열된 나라를 다시 통합한 후 1189년 귀족회의인 쿠릴타이에서 전 몽골의 칸으로 추대되어 칭기즈칸이란 칭호를 받았다. 테무진은 28세로 전 몽골족을 부흥시켰고, 이것이 대몽골국의 기초였다.

칭기즈칸은 전체 몽골족 통일을 위해 매진했다. 1190년 ‘달란 발주트’ 평원에서 자무카와 최초의 전쟁을 벌였으나 자무카가 승리했다. 그러나 자무카는 동족 약탈로 신망을 잃어 오히려 많은 부족이 달아나 칭기즈칸 진영에 합류했다. 1196년에는 토그릴칸과 연합해 금나라 군대에 쫓긴 타타르 부족을 섬멸했다. 이때 금나라는 토그릴에 ‘옹칸’이란 칭호를 내렸다.

해가 떨어지는 몽골 대초원
해가 떨어지는 몽골 대초원.<지평인문사회연구소>

1201년 자무카는 타타르, 메르키트의 잔존 세력과 나이만을 자기 세력으로 편입해 칭기즈칸, 옹칸과 더불어 초원을 나누어 지배했으나 헤를렌 강 하구 ‘쿠이텐 전쟁’에서 패배해 세력을 잃었다. 1202년 칭기즈칸과 옹 칸은 메르키트, 타타르를 이어 정복했다. 1203년 케레이트 옹칸의 아들 셍굼은 자무카와 결탁하여 칭기즈칸에 대항했으나 결국 멸망했으며 이듬해 칭기즈칸은 나이만까지 정복하여 메르키트, 타타르, 케레이트, 나이만 등 주요 소칸국과 휘하의 부족들을 모두 복속시켰다. 드디어 1206년 오논강 상류에서 역사적인 대쿠릴타이가 열리고 칭기즈칸은 대몽골국의 대칸으로 추대됐다.

이는 그 후 세계사에 불어 닥친 대폭풍의 서막에 지나지 않았다. 몽골 제국은 불과 25년 만에 로마가 400년간 정복한 땅보다 훨씬 넓은 땅을 지배했다. 이런 이유로 칭기즈칸은 뛰어난 군사 지도자인 동시에 정치인으로, 천년의 역사 위인으로 꼽힌다. 칭기즈칸 군대는 상상을 초월하는 기동력과 전 세계에 걸친 역참과 정보 네트워크를 통한 강력한 군사력으로 적을 압도해 전쟁에서 승리했다. 이것은 오늘날 현대 경영의 키워드로 꼽히기도 한다.

칭기즈칸은 시대를 앞서 보고, 남의 말을 경청하며, 철저히 능력 본위로 인재를 쓰고, 동지를 아끼고, 법과 원칙을 앞장서 지키고, 생각과 종교의 자유를 존중했다. 한마디로 진정한 리더, 그 자체였다. 이러한 탁월한 리더십이 ‘대제국-몽골’의 탄생을 가능케 한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김석동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
김석동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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