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정복지 ‘신하’ 삼은 몽골, 고려만 왜 ‘형제’ 대접했나
모든 정복지 ‘신하’ 삼은 몽골, 고려만 왜 ‘형제’ 대접했나
  • 김석동 지평인문사회연구소장
  • 승인 2020.05.02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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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대초원 주인공 기마군단이 2500년간 세계사를 써 내려간 몽골 고원 
몽골 대륙 초원.<지평인문사회연구소>

필자는 기마군단 역사의 근원지인 몽골 공화국과 중국의 내몽골 자치구 지역에 걸쳐 있는 몽골 고원을 여러 계절에 걸쳐 찾은 바 있다. 한국인과 외모가 비슷한 사람들, 흡사한 풍습, 한국인들을 가깝게 생각하는 정서, 남겨진 유물과 유적에서 나타나는 연관성…. 그뿐이랴. 손님을 접대하는 따뜻한 마음, 밤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별 무리,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대초원 등 몽골 고원은 언제라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여행지다.


몽골 고원의 자연과 명소

몽골 고원은 동으로 대싱안 산맥, 서로 알타이 산맥, 남으로 고비 사막, 북으로 바이칼 호수에 이르는 면적 272만㎢(우리나라 약 27배), 평균해발고도 1.5km의 광활한 고원지대다. 이 땅은 몽골(156만㎢)과 중국의 내몽골 자치구(118만㎢)에 대부분 속해 있으며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인 준평원 지역이다. 남부에는 100만㎢ 넘게 펼쳐진 고비 사막이 있으나 중앙·동부 지역은 상대적으로 강수량이 많아 가축을 방목하는 넓은 초원 지대가 있다. 바로 이 몽골 고원이 유라시아 대초원의 주인공 기마군단이 2500년간 세계사를 써 내려간 출발지다.

몽골 고원은 기후 조건이나 생태환경이 사람들이 살기에 절대 녹록치 않다. 남쪽 사막의 영향을 받아 40°C 가까이 올라가는 여름과 북쪽 툰드라 지역의 영향을 받아 영하 40°C 이하까지 내려가는 겨울이 교차한다. 어느 해 12월, 영하 30°C의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놀랍게도 그곳에서는 ‘이상난동’이라고 했다.

몽골 고원은 연간 강수량이 350mm 정도로 우리나라의 1250mm에 비하면 턱없이 적다. 강수량이 250mm 이하이면 사막이 된다고 하니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된다. 이처럼 몽골 고원은 온도교차가 극단적으로 크고 강수량도 적어 사람이 살기에는 매우 열악하다. 이런 엄혹한 자연환경에서는 용감하고 동시에 영리한 사람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데, 바로 기마유목민들이 그러했다.

현재 몽골 고원에 자리 잡은 나라의 연원을 보면 다음과 같다. 대 몽골 제국의 중심인 원나라는 14세기에 중국 대륙을 명나라에 내어주고 북원(北元)이라는 이름으로 몽골 대초원 지역으로 물러났다. 16~17세기 몽골은 알타이산맥을 경계로 서쪽의 오이라트, 동쪽의 할흐몽골, 고비 사막 남쪽의 내몽골로 분리되었다.

몽골 고원 중부·북부는 17세기 말 청나라에 복속한 후 외몽골이라 불렸다. 외몽골 지역에 세워진 나라가 오늘날의 몽골 공화국이다. 몽골은 카자흐스탄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내륙국이나 인구는 307만명에 불과하다.

울란바토르 시내 전경.<지평인문사회연구소>

몽골의 수도는 울란바토르(ulsanbuater)로 1911년 외몽골이 독립하면서 수도가 됐다. 울란바토르는 몽골어로 ‘붉은 영웅’이라는 뜻이다. 17세기부터 라마교의 본산이었고 18세기에는 러시아, 청과의 중계 무역지로 번창했다. 시내에는 민족독립의 영웅 ‘담디니 수흐바토르’를 기념하는 광장을 중심으로 정부청사, 독립영웅들의 묘, 극장, 호텔 등이 늘어서 있다. 울란바토르 시내에 있는 몽골 국립중앙박물관은 규모가 크지 않으나 흉노·선비·돌궐·몽골·여진 시대의 귀중한 유물이 시대에 따라 전시돼 있다. 몽골을 방문할 때마다 들르는 곳이기도 하다.

울란바토르 인구는 105만명으로 전체 몽골인의 3분의 1이 수도에 사는 셈이다. 이 도시는 냄비 모양으로 생긴 큰 분지인데 가을·겨울에는 난방용으로 갈탄을 때기 때문에 매연으로 엄청 고통스럽다. 건물 안팎을 막론하고 가슴이 막히거나 답답하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현지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들은 주말에는 반드시 도시 밖으로 벗어나서 폐 활동을 조절해야 한다.

울란바토르에서 동북 쪽으로 약 7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인 고르하테를지 국립공원이 있다. 바다가 융기해 산과 언덕, 숲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곳으로 트래킹, 낚시, 승마, 골프 등 다양한 레저 활동을 즐길 수 있어 열악한 울란바토르의 생활환경을 보완하고 있다. 이곳에 몽골 유일의 골프장이 있는데(지금은 2개) 시설은 열악하지만 도시 인근에 등산할 만한 곳이 없어 매연에 지친 외국인들의 안식처 역할을 한다.

외몽골 지역에는 기마유목민들의 삶의 역사가 곳곳에 남아 있다. 수많은 무덤과 유적,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200여 곳의 암각화들이 문명의 이동과 교류의 역사를 보여준다. 오르혼 계곡의 문화경관, 웁스 분지, 알타이 지역의 암각화 등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금은 적막한 땅이 돼버렸으나 원나라 초기 30년간 수도였던 캐러코럼하라호럼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명소들이 자리 잡은 곳이다.

몽골 고원 남동부는 중국 영토로 내몽골 자치구가 있는 지역이다. 내몽골 자치구는 몽골 고원 중 가장 먼저 청나라가 차지해버린 땅이다. 지금은 중국·러시아와 접경하고 있으며 국경선이 무려 4200km에 달하고 그 남쪽 중국과의 경계가 만리장성이다. 이곳은 타클라마칸 사막, 커 얼친 사막과 함께 황사의 발원지로도 알려져 있다.

내몽골 자치구에는 2470만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수도는 후아오터(호화호특·呼和浩特) 시다. 하가점하층 문화 지역으로 잘 알려진 츠평(적봉)도 이 자치구에 있다. 내몽골 자치구와 랴오닝성 접경 지역 일대에는 인류의 찬란한 고대 문화 유적지인 홍산문화 지역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서는 1900년대 초부터 신석기 시대 이래의 유적과 유물이 무수히 발굴돼 세상을 놀라게 했다. 기원전 7000년 전부터 이곳에 소하서 문화, 흥륭와 문화, 사해 문화, 부하구 문화, 조보구 문화 등이 있었던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특히 1980년대 중반에 발굴된 홍산문화와 그 이전부터 발굴되어온 하가점하층 문화는 한민족의 고대국가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돼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대몽골 제국의 흥망사

몽골 고원은 기마유목민들의 본거지이자 기마군단의 요람이었고 고대로부터 수많은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여행지다.

몽골 중등 국사 교과서에서는 기원전 3세기 이후 몽골에서 일어난 고대국가를 흉노, 선비, 유연, 투르크(돌궐), 위구르, 키르기스, 거란 등의 순으로 기술한다. 2500년간의 유라시아 대초원에서 활약한 기마유목민족과 국가를 보면 ‘흉노-훈’ ‘선비-유연-거란’ ‘돌궐-위구르·셀주크 투르크-오스만 투르크’ ‘몽골-티무르-무굴’ ‘여진-금-청’으로 요약된다. 이들은 바로 이 몽골 고원과 만주, 중앙아시아를 주 무대로 활동 무대를 넓혀 나갔다.

몽골고원의 바위그림, 흡수골(렌친룸베솜).<지평인문사회연구소>

여러 기마민족 중 몽골족은 돌궐 시대에는 고원 동부로 밀려났다가 돌궐 멸망 후 8세기 중반부터 다시 고원 중심부로 돌아왔다. 이 시기에 몽골족과 투르크 족이 서로 섞이게 되었다고 한다. 10~11세기에 많은 부족 연합체가 형성되었고 11~12세기에는 타타르, 케레이트, 나이만, 메르키트, 몽골 등 5부족이 몽골 고원을 나눠 지배했다. 이 가운데 작은 부족인 몽골족에서 칭기즈칸이란 영걸이 나타나 몽골 초원을 통일하고 1206년 대몽골국을 세웠다. 몽골은 금나라 호라즘 탕구트를 정복하고 13세기에는 태평양 연안에서 동유럽까지, 시베리아에서 페르시아만까지 정복·통치하는 역사상 세계 최대 제국을 건설, ‘팍스 몽골리카Fax Mongolica’를 실현했다.

대몽골 제국의 세계 통치가 끝나면서 몽골인들은 고향인 몽골 고원으로 돌아왔고 분열과 혼란의 시기로 일컬어지는 14~17세기를 맞이했다. 몽골의 원나라를 멸망시킨 명은 몽골을 계속 공격했고 이 시기 몽골은 분열을 거듭한다. 이어 17세기 들어 서부 시베리아를 장악한 러시아가 알타이, 바이칼, 동부 시베리아 등지로 진출하면서 몽골 고원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한편 만주 일대에서 누루하치가 건국한 ‘청’은 세력을 급속히 확대하면서 1636년에는 ‘내몽골 지역’을, 1691년에는 몽골 고원 중·북부 지역인 ‘할하 몽골’을, 1765년에는 몽골 고원 서부 ‘오이라트 몽골’을 정복해 몽골 고원을 완전히 장악했다.

20세기 들어 외몽골과 내몽골의 운명은 갈라지게 된다. 외몽골 지역은 청나라 쇠퇴기인 20세기 초에 독립국을 선포했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다시 이 일대에서 청·러·일이 각축하다 1921년 공산혁명 후 1924년 몽골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러시아의 영향 아래 들어간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 다시 독립 국가가 됐고 1960년 헌법 개정 후 사회주의국가 체제로 전환해 오늘에 이르렀다. 반면 내몽골 자치구는 청나라의 지배에 이어 오늘날까지 중국 영토로 이어지고 있다.

닮은 사람들, 몽골인-한국인

북방 기마군단은 오랜 과거로부터 한민족과 연결고리를 가져왔다. 특히 몽골인들은 과거부터 한민족에 대해 호감을 느끼고 있다. 몽골과 한국은 정서적으로 공통분모를 다수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유적·유물은 물론, 언어·생활관습·문화·생각하는 방식 등 곳곳에서 친연성을 확인할 수 있다.

한 예로 몽골은 우리와 같이 아이가 태어나면 한 살이다. 한국 나이 개념인데 이는 태아를 이미 인격적으로 보아 나이를 부여하는 데 따른 것이라고 한다. 몽골 제국 시대에 몽골군은 자연환경으로 일본과 베트남 등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정벌하고 복속시켜 군신지국(君臣之國)의 관계를 맺었다. 세계를 정복한 대몽골 제국은 대적하는 적국을 순식간에 초토화하는 엄청난 전투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유독 고려에 대해서는 39년이란 긴 시간 동안 전쟁과 회유를 계속했고 전후에도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형제지국(兄弟之國)을 맺었다.

또 원나라 황실 공주를 고려 국왕에 시집보내는 파격적인 대우를 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전쟁에서 패배한 나라가 공주를 시집보내거나 볼모로 보낸다. 흉노와 한나라의 관계에서도 그랬다. 그러나 몽골-고려는 판이한 사례이다. 승전국이 공주를 시집보낸 것이다. 또 고려는 다른 점령지와 다르게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배경은 연구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김석동 대표가 몽골 목장에서 전통 복장을 입고 포즈를 취했다.<지평인문사회연구소>

보다 먼 한민족의 이동사에서도 이러한 관계가 나타난다. 동양대 김운회 교수에 의하면 한국인들은 신석기 시대 알타이-몽골-대싱안링-아무르강-만주 등으로 이어지는 북방 라인과 직접 연계돼 있으며, 한국과 몽골은 동아시아 지역 청동기 문명의 주역으로 청동기 유적의 분포는 한민족 이동로인 즐문토기인의 이동로와 거의 일치한다고 한다. 몽골 북부의 바이칼 호수의 브리야트족의 일파가 이동하여 부여와 고구려의 뿌리가 되었다는 연구도 있다.

몽골은 인구가 307만명이며 우리나라에 체류하는 몽골인은 4만6000명(전체 외국인 213만명의 2.2%)으로 몽골 전체 인구의 1.5% 가까이가 한국에 와 있다. 예로부터 몽골인들은 한국을 형제의 나라로 생각했고, 한국인을 솔롱고스(CONOHIOC)라고 불렀다. 솔롱고(CONOHO)는 무지개를 뜻한다. 몽골인들과 한민족 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끈끈한 친연성이 있다. 몽고반점 등의 외모, 생활관습, 언어, 정서, 유물·유적 등등 여러 방면에서 확인된다. 이로써 앞서 전원철 박사가 연구하여 밝혀낸 역사, 즉 대몽골 제국의 칭기즈칸이 고구려 발해의 후손이라는 점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몽골을 수차례 방문했는데 금융위원회에서 몽골중앙은행 총재 고문으로 파견 나가 있던 이병래 국장(전 한국예탁결제원 사장), 고형권 국장(현 주 OECD대표부 대사), 몽골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 등이 어려운 여정에 큰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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