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수도 하얼빈서 안중근 의사 기개를 보다 
고조선 수도 하얼빈서 안중근 의사 기개를 보다 
  • 김석동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
  • 승인 2020.02.02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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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에서 다롄까지, 만주 2600km 남북종단 역사 대장정

김석동 소장의 동북삼성 역사탐방 경로.<지평인문사회연구소><br>
김석동 소장의 동북삼성 역사탐방 경로.<지평인문사회연구소>

다시 만주 대륙을 찾았다. 하얼빈-무단장-둔화-백두산-지안-압록강-단둥-다롄을 잇는 2600km의 육로 대장정이다. 이번 여정에서는 중국의 동북3성(헤이룽장성·지린성·라오닝성) 3개 성을 관통하면서 고구려와 발해 유적지, 만주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의 현장, 그리고 지난번 여행에 이어 다시 백두산을 둘러보기로 했다.

하얼빈에서 마주한 안중근 의사의 흔적

인천공항을 떠난 비행기는 2시간 남짓 걸려 ‘하얼빈(哈爾濱)에 도착했다. 하얼빈은 헤이룽장성(黑龍江省·흑룡강성)의 성도이자 만주 대평원의 중앙 지역으로 헤이룽강 최대 지류인 송화강 유역에 있다. 하얼빈은 ‘그물 말리는 곳’이라는 뜻인데, 이름대로 강에서 고기를 잡는 어민 몇 가구가 있었던 한적한 곳이었다. 제정 러시아 시대에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건설기지가 되면서 급속히 발전했다. 이후 동북 지방의 철도 교통의 중심지이자 상업도시로 성장했고 1954년부터는 헤이룽장성의 성도가 되었다. 

지금은 인구가 987만명에 달하는 부성급 성시의 지위를 갖고 있다. 하얼빈은 북위 45.8도에 자리 잡은 눈과 얼음의 도시로 겨울 행사인 ‘빙등제’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또 러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건축물이 다수 남아있어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도시다.

하얼빈은 우리 역사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 고대로부터 고조선·부여·고구려 등으로 이어져 온 한민족의 역사 영역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대단군 왕검이 고구려 건국 이전 2000년 전에 조선을 개국하였으며 만주 일대에는 하얼빈을 수도로 ‘신한(辰韓)’이, 요서 지역에는 개평을 수도로 ‘불한(不韓)’이, 한반도에는 평양을 수도로 ‘말한(馬韓)’이 삼한(三韓) 체제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중 신한이 조선의 중심이었으므로 하얼빈은 고조선의 수도인 셈이다. 고조선은 이후 창춘, 개원으로 천도하였다. 하얼빈 시 아청구는 금나라의 첫 수도였고 이후 베이징으로 천도하였다.

금나라와 한민족과의 관계는 앞서 설명한 바 있다. 근세에 들어서도 하얼빈은 우리 역사와 연결된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사에서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하는 거사를 일으켜 조선독립에 대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 연해주 남단에 있는 한인 집단 거주지이자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연추 마을에서 출발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하얼빈에 도착해 1909년 10월 26일 마침내 그 뜻을 이뤘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왼쪽)과 의거 후 압송당하는 안중근 의사.<지평인문사회연구소>

지금은 하얼빈 역사를 대대적으로 개축하고 있어 안 의사가 거사를 일으킨 역사적 현장은 볼 수가 없었고 하얼빈 역에 있던 안중근 의사의 일생과 거사를 기리는 기념관도 문을 닫았다. 인근 지역에서 다시 문을 연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찾아 안 의사의 일생을 다시 되새겨 보았다. 방문객의 감동을 자아내는 자료들이 곳곳에 전시돼 있다. 안 의사의 모친에 대한 자료가 보는 이를 숙연케 한다.

“아들의 사형 판결 소식을 들은 안중근의 모친은 안중근의 동생 공근과 경근을 려순에 보내 마지막 순간에 입을 민족 복장과 당부의 말을 전하게 하였다. 옳은 일을 하고 받는 처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부인 김아려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도 심금을 울린다.

“우리들은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천주의 안배로 배필이 되고 다시 주님의 명으로 이제 헤어지게 되었으나 또 머지않아 주님의 은혜로 천당 영복의 땅에서 영원에 모이려 하오.…많고 많은 말을 천당에서 기쁘고 즐겁게 만나보고 상세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을 믿고 또 바랄 뿐이오.”
 

손문은 ‘공훈은 삼한을 덮을 만하고 명성은 만국에 떨쳤나니…’라는 추모글을 남겼고 장개석은 ‘장렬천추(壯烈千秋·장렬한 뜻 천추에 빛나다)’란 휘호를 남겼다. 관람을 끝내면 방문 기념 서명을 하는 곳도 준비돼 있다. 안 의사의 항일투쟁에 대한 중국인들의 인식과 존경을 느낄 수 있게 비교적 정성스레 마련한 기념관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하얼빈 시내에는 일제의 만행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731 기념관’이 새롭게 단장돼 문을 열었다. 731부대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일제 관동군 산하로 하얼빈에 주둔했던 세균전 부대다. 이 부대는 1956년부터 1946년까지 전쟁 포로 등 마루타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세균, 약물을 주입하는 등 생체를 실험했다. 그 희생자가 3000명을 넘었다 하니 일제의 참혹한 역사를 증언하는 기념관이다.

대발해 제국의 잔영이 숨 쉬는 상경용천부

하얼빈을 출발해 4시간가량 걸려 남동쪽으로 330km 떨어진 하이린(海林·해림)에 도착했다. 하이린은 무단장 시 중심부에서 북서쪽으로 30km 정도 떨어진 인구 43만명의 작은 현급 도시다. 이곳은 청산리 전투의 백야 김좌진 장군이 활동했던 만주 독립운동의 중심지다. 

김좌진 장군이 활동하던 근거지인 난다오존(남도촌)을 여러 시간 헤맨 끝에 찾았다. ‘중한우의광장’이라는 비석이 있는 앞터와 대문, 마당, 김좌진 장군 흉상, 정미소, 거처, 부엌 등이 차례로 방문자를 맞았다. 다시 하이린으로 돌아와 시내에서 김좌진 장군을 기념하는 한중우의공원을 찾았다. 그 안에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관’이 있다. 우리의 항일독립투쟁에 대해 중국인들이 보여주는 관심과 존경을 느낄 수 있었다.

하이린을 떠나 남동쪽으로 무단장(丹江·목단강) 시의 중심부에 다다랐다. 무단장은 헤이룽장성 제3의 도시로 인구가 280만명에 달한다. 무단장 시는 쑹화강 지류인 무단 강변에 자리 잡고 있으며 ‘구불구불한 강’이란 뜻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이 도시는 헤이룽장성의 동부 정치·경제·문화·교통 중심지로 대러시아 교역 도시이기도 하다. 이 무단장 시 남서쪽 외곽으로 35km 정도 더 가면 닝안(寧安·영안)이라는 인구 44만명의 현급 도시가 있다. 닝안 시 남쪽으로 다시 35km를 가면 동경성진(東京城鎭)이 있고, 여기서 3km 정도 가면 보하이진(渤海鎭·발해진)이 나오는데 이곳은 발해의 세 번째 수도였던 상경용천부가 자리 잡았던 곳이다.

상경용천부는 755~920년까지 발해 시대 대부분 기간 중 수도 역할을 했던 곳으로 광활한 대지 위에 중심터가 넓게 자리 잡고 있다. 상경용천부지에서 1933~1934년 사이에 동벽 3211m, 서벽 3333m, 북벽 4502m, 남벽 4502m의 직사각형으로 이루어진 대형 토성이 발굴되었다. 이 외성 내부에 한 변 길이가 1km가 넘는 사각형 내성이 있고 다시 그 안쪽으로 동서 620m, 남북 720m의 궁성에 해당하는 내내성이 있다. 발해의 국력을 새삼 실감케 하는 대륙에 세워졌던 광대한 성곽의 유적지다. 끝없는 벌판에서 거센 바람을 이기고 세워진 대발해 제국의 잔영이 살아 숨 쉬고 있는 현장이다.

발해 5경은 헤이룽장성 닝안의 상경용천부, 지린성 허룽 시 서고성의 중경현덕부, 지린성 훈춘 시 팔련성의 동경용원부, 임강 또는 지안(집안)의 서경압록부, 함흥 또는 백운산성의 남경남해부로 추정되고 있다. 닝안의 구시가지는 청나라 발상지인 영고탑의 초기 위치이기도 해서 감회가 더욱 새롭다.

고구려·발해 유적지, 지린성 여정

닝안을 떠나 이번에는 지린성(吉林省·길림성)으로 들어갔다. 지린성은 면적이 18만7000㎢로 한국의 두 배에 가깝고 인구는 한국의 절반이 조금 넘는 2746만명이 살고 있다. 이곳은 옛 북간도 지역으로 지금도 재중 동포 100만명 이상이 살고 있다. 중국의 이민족 통계 기준이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많을 수 있다. 

닝안에서 두 시간 남짓 170km 서남쪽으로 달리면 무단장 상류에 자리 잡은 둔화(敦化·돈화)에 이른다. 둔화는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현급 시로 약 48만명이 사는 도시다. 이곳에 동모산 또는 동모산성으로 알려진 발해의 첫 수도가 56년간 자리 잡았다. 3대 문왕 때 이곳에서 지린성 허룽의 중경현덕부로 천도했다. 지난번 만주 여행 때 방문했던 서고성 지역이다. 닝안 둔화 연결도로 북쪽으로 발해 초기 건축지의 주춧돌인 강동 24개 돌유적을 볼 수 있다. 8개씩 3줄로 남북으로 배열된 현무암 초석 중 23개가 남아있다.

둔화에서 남쪽에 있는 백두산을 가기 위해 두 시간 반 정도 걸려 150km 떨어진 연변의 안도(安&#22270;·안투) 현으로 향했다. ‘안도’는 ‘변경을 편안하게 한다’라는 데서 명명되었다 한다. 안도는 북한 접경 지역으로 87%가 산지로 이루어졌고 홍송·미인송·부석의 산지이기도 하다. 1920~1930년대 항일독립운동의 근거지로서 홍범도 장군이 이곳에서 활약했다.

안도현 소재지에서 다시 140km의 구불구불한 길을 두 시간 반 달려 드디어 백두산 최근접 마을인 얼다오바이허진에 도착했다. 이곳은 백두산 북쪽 기슭에 있는 관광기지로 원래 얼다오바이허는 백두산 천지에서 기원한 송화강 상류의 강 이름이다.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 백두산으로 향했다. 다행히 예보는 날이 맑다고 했다. 맑은 하늘에서 백두산 볼 확률은 20%가 안 된다고 안내인이 강조했다. 

소형차로 백두산 기슭을 굽이굽이 돌아 정상 가까이에 갔다. 지난번과 같은 북파 코스였다. 하늘이 너무나 청명했다. 안내인은 3대가 공덕을 쌓은 결과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5월 말인데도 천지는 눈 속에 완전히 쌓여 있는 모습이다. 백두산에서 하산하면서 장백폭포와 온천 지역 등을 보면서 민족의 영산의 위용을 만끽했다.

압록강변의 북한.<지평인문사회연구소>

이번에는 백두산에서 서쪽으로 약 5시간, 260km를 달려 퉁화로 이동했다. 퉁화는 지린성 남동부의 교통 요지로 227만명이 사는 규모 있는 도시다. 관내에 지안 시가 있어 고구려 유적지의 관문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퉁화에서 1박 후 남쪽으로 2시간가량 달려 약 100km 떨어진 지안에 도착했다. 지안은 압록강을 경계로 북한과 접경하고 있는 퉁화 시의 현급 시다. 잘 알려진 대로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로 기원전 3년부터 기원후 427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할 때까지 대고구려의 수도였다.

2년 전 방문했던 곳이지만 광개토대왕비·왕릉·장군총·오회분·국내성터 등 고구려 유적지를 다시 두루 살펴보았다. 지난번 방문할 때는 없었던 한자·영어·한글·일본어·러시아어로 쓰인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2000년 전에 우리 선조들이 세운 대제국의 유적들을 설명하는 안내문에서 동북아 지역 국제정세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았다.

고조선·고구려 유적지 랴오닝성

다음 행선지는 랴오닝성이다. 이곳의 면적은 14만6000㎢로 우리나라의 1.5배, 인구는 4375만명이며 주요 도시로는 선양, 다롄, 안산(안샨), 단둥이 있고 재중동포가 23만명가량 살고 있다. 지안에서 랴오닝성의 환런(桓仁·환인)으로 가기 위해서 다시 북쪽의 퉁화로 올라갔다가 남서쪽으로 가야 하니 200km 정도 거리다. 직선거리는 멀지 않으나 돌아간 탓에 4시간 가까이 걸리는 코스다.

환인은 랴오닝성 본계(번시) 시에 있는 만족 자치현으로 만족·한족·조선족·회족·몽골족 등 다민족이 섞여 사는 지역이다. 교외에 고구려의 첫 수도 본성으로 추정되는 오녀산성이 있는데 차로 달려가면 멀리서부터 감탄을 금할 수 없는 우아하고 견고한 자태가 보인다. 9부 능선의 깎아지른 절벽을 이용해 완만 한 구간에는 성벽을 쌓은 철옹성의 모습이다. 

오녀산성은 해발 820m, 남북 200m, 동서 130~300m에 달하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2004년에 지안의 고구려 유적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입구에는 ‘고구려 시조비’의 비석이 있다. 서쪽 계단길로 산성에 올라가는데 모두 999개 돌계단이라 한다. 실제는 그보다 적지 않을까 싶다. 산성 중앙부에는 ‘천지’라는 샘이 있고 멀리 아래를 내려다보면 굽이굽이 흐르는 ‘혼강’이 보인다.

오녀산성 등정 후 환인에서 남서쪽으로 200km를 3시간 가까이 달려 단둥에 도착했다. 단둥은 원래 이름은 안동(안둥)인데 1965년 개명했다. 단둥은 압록강을 경계로 신의주에서 북한과 접경한 국경무역의 중심지로 곳곳에서 북한식당을 볼 수 있고 한글 간판도 흔하게 눈에 띈다. 단둥에서 여정을 풀고 이튿날 아침 일찍 압록강 철교로 향했다. 압록강 철교는 신의주와 단둥을 연결하는 다리인데 한반도와 만주 지방의 관문이 되는 곳이다. 압록강 철교는 원래 두 개였는데 1911년에 먼저 건설한 하류 쪽 다리는 6·25 전쟁 때 파괴돼 중국 쪽 절반만 남아있고 1943년에 건설한 상류 쪽 다리를 현재 쓰고 있다. 끊어진 철교의 끝부분까지 걸으며 동족상잔의 비극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 쪽에서 작은 유람선을 타면 압록강 변을 두루 볼 수 있다. 남쪽 강변에서 북한군 초소, 북한군, 농민의 모습을 코앞에서 바라다볼 수 있다. 갑자기 우리 배 쪽으로 작은 배가 한 척 노를 저어 다가왔다. 북한 쪽 상인이 순식간에 배를 접근시켜놓고 배에 인삼주 등 북한 술, 과일 등을 싣고 와 파는 예기치 못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

압록강에서 물건을 싣고와 파는 북한 배.<지평인문사회연구소>

단둥을 떠나 약 300km 떨어진 다롄(大連·대련)까지 4시간 걸려 이동했다. 다롄은 선양에 이어 랴오닝성 제2의 도시다. 인구는 578만명으로 동북 최대의 항구도시다. 이곳에서 하얼빈까지 남만주 철도가 연결돼 만주 일대를 종단한다. 이 도시는 북방의 공으로 불리며 예로부터 장수도시, 사과, 미녀로 이름이 있다고 한다.

다롄에는 우리가 잊을 수 없는 곳이 있다. 바로 뤼순(旅順·여순)이다. 여순은 요동반도 남단부의 군항도시로 청나라 말기 북양함대의 근거지였으나 청일전쟁 후 러시아가 조차(租借)하여 군항을 확장했고 러일전쟁 후에는 일본의 해군기지가 되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 1955년 중국에 반환된 곳이다. 지금은 다롄 시에 편입돼 있다. 

유명한 여순감옥은 당초 러시아가 건축했으나 러일전쟁 후 일본이 차지하여 1907년 지금의 규모로 확장해 일제 침략에 항거하는 한국인, 중국인 등을 구금하고 잔혹하게 고문하고 형을 집행하는 형무소로 썼다. 이곳이 1910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일제의 침략에 몸을 던져 항거하고 순국한 바로 그 자리다. 마침 공사 중이라 방문하지 못해 못내 아쉬웠다. 다음을 기약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또 랴오닝성은 내몽골 자치구와 더불어 수많은 고대 유적이 발굴되고 있는 홍산문명 지역인데 이번 여행에서는 일정상 제외했다.

이렇게 7일간에 걸친 만주 2600km의 대장정을 끝내고 다롄 공항을 떠났다. 만주 여행은 항상 필자를 설레게 하고 또 새롭게 다가온다. 그 땅은 바로 우리 역사의 현장이다.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가 역사를 썼고, 흉노·선비·거란·몽골·여진 등 우리와 함께 북방민족이 살아온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nbsp;김석동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
김석동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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