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대륙 1800km 역사 순례, 한민족 숨결에 가슴이 설레다
만주 대륙 1800km 역사 순례, 한민족 숨결에 가슴이 설레다
  • 인사이트코리아
  • 승인 2020.01.01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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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국 고조선의 땅, 그 후예들이 부여·고구려·발해를 건설했던 그곳에 가다

만주는 대제국 고조선의 땅이다. 고조선의 후예들이 부여·고구려·발해를 비롯한 여러 한민족 국가를 건설했던 곳이며, 근세에 들어서는 한반도의 수많은 사람이 이주해 삶을 개척했고,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의 진원지이자 거점이 됐던 곳이다. 이래저래 한민족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땅이다.


김석동 대표의 선양-훈춘 만주 역사 탐방 경로.<지평인문사회연구소>

고구려 역사 탐방과 백두산 등정

필자는 2013년 창춘-지린-지안-압록강-단둥-선양으로 이어졌던 만주 역사 여행을 한 바 있고 이후 몇 차례 연해주와 만주 대륙을 찾았다. 2016년에 다시 만주 대륙 탐사 여행에 나섰다. 랴오닝성 선양(瀋陽·심양)에서 지린성 훈춘(琿春·혼춘)까지 만주 대륙 동서를 가로지르는 1800km에 이르는 장정으로, 고구려와 발해 유적지를 탐사하고 백두산을 등정하는 코스다.

인천공항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두 시간이 채 못 돼 선양에 도착했다. 선양은 청나라 초기 수도로 청(靑)은 금(金)을 세웠던 여진족이 1616년 만주에 세운 나라다. 그런데 <금사(金史)>를 포함한 사서와 연구 논문 등에서는 금·청의 건국자들이 고려(고구려)의 후예라고 밝히고 있다. 이 점은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700년 이상 만주를 지배했던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고구려 후예들은 단 30년 만에 고구려를 재건해 발해를 건국했다.

발해가 거란에 멸망한 후 그 땅은 우리 역사에서 멀어졌다. 중국인들은 그곳을 여진이라 불렀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여진족이라 칭했다. 이들은 고구려와 발해의 후예들일 수밖에 없으므로 여진의 사람과 이들이 세운 나라들에 대한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서 금의 건국자 아골타 및 후금(청)의 건국자 누르하치의 가계는 발해 왕가에서 비롯된다는 북방사학자 전원철 박사의 연구는 앞선 칼럼에서 소개한 바 있다.

선양은 인구 800만명이 넘는 만주 최대 도시로 랴오허 유역에 위치한 랴오닝성 성도이며, 일제강점기 때는 봉천(本天)이라고 불렸다. 청나라 황궁이었던 선양 고궁 등을 둘러보고 인근에 있는 청 태조 누르하치의 묘소인 동릉을 찾았다. 봉림대군과 소현세자가 볼모로 잡혀있던 곳이기도 하다. 선양에서 동쪽으로 170km를 달리면 푸순(無順) 시의 신빈(新賓)에 닿는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청나라 황제 조상묘인 청 영릉을 둘러본 후 지린성 쪽으로 이동하다 청의 건국자 누르하치가 태어난 신빈에 들렀다. 누르하치가 건주여진을 통합하고 세운 첫 번째 수도인 ‘허투알라(赫圖阿拉·혁도아랍) 성’이 이곳에 있다. 이후 랴오양-선양-베이징으로 천도를 하게 된다.

신빈에서 다시 동쪽으로 200km 정도 가면 ‘퉁화(通化·통화)’ 시가 나온다. 교통의 요지인 이곳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 거리에 유하현이 있다. 이곳은 서간도 지방의 중심지로 이상룡·이시영·이회영·이동녕 선생 등이 항일단체를 조직했던 곳이며 간도 3·1운동의 진원지다. 당대의 명문가였던 이회영·이시영 등 6형제는 1910년 말 전 재산을 처분하고 유하현 삼원보로 일가를 이끌고 망명했다. 이들 형제의 집터가 명동성당 맞은편 은행연합회 쪽에 있었고 지금 그곳에 작은 기념비가 남아있다. 이곳에서 이회영 형제가 내어놓은 재산으로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강습소’를 설립했고 후에 퉁화현으로 이전, 신흥무관학교를 출범시켰다.

김석동 대표가 국내성 성벽 밖 시장에서 포즈를 취했다.
<지평인문사회연구소>

통화 시에서 200km를 더 달려 지안(集安·집안)에 도착했다. 지안은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이다. 지안은 대제국 고구려의 오랜 도읍지였기 때문에 수많은 고구려 유적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국내성은 압록강 변 통구 평원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서기 3년에서 427년 평양 천도 때까지 425년간 도성이 있던 곳이다. 성벽과 성문터, 치 등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역사의 현장이지만, 성터 위에는 안타깝게도 아파트와 상가가 자리 잡고 있다.

국내성 북쪽 2.5km에는 전시에 대비해 짝을 이루어 쌓은 산성자 산성(일명 환도 산성)이 있다. 이 성은 험준한 산봉우리들로 둘러싸여 있어 말 그대로 천연의 요새다. 1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잘 쌓인 성벽이 그대로 남아 고도의 축성 기술과 전쟁에 대해 얼마나 철저히 대비했던가를 웅변하고 있다. 

인근에 산재한 고구려의 위용을 웅변하는 태왕릉, 광개토대왕릉비, 장군총 등을 둘러봤다. 국내성에서 북동 방향으로 2.5km 정도 가면 태왕릉이 나타난다. 태왕릉은 돌로 축조한 계단식 돌무지무덤으로 광개토대왕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계단을 올라가면 돌로 된 묘실이 나타나고 내부를 볼 수 있다. 무덤에서 금·청동, 철기와 토기 등 수많은 유물이 출토됐고 그 규모의 방대함은 고구려 최전성기 때의 무덤으로 손색이 없다.

이 능에서 북동부 방향으로 약 300m 거리에 광개토대왕릉비가 있다. 광개토 대왕릉비는 장수왕이 부왕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414년에 세운 것으로 높이 6.30m의 거대한 돌에 고구려 건국신화부터 광개토대왕의 업적 등1775자가 새겨져 있다. 청나라 시대인 1880년 한 농부가 이끼와 덩굴에 덮여 있는 거대한 돌비석을 발견했는데 이 비석으로 말미암아 찬란했던 고구려 그리고 한민족의 역사가 분명히 밝혀지게 됐다. 태왕릉에서 북동쪽으로 약 1km 지점에는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는 장군총이 있다. 장군총도 잘 다듬은 화강석으로 7층 구조 고구려 시대 돌무지무덤이다. 장수왕의 무덤으로 비정되고 있으나 다른 의견도 있다. 장군총, 광개토대왕릉비, 태왕릉, 국내성은 네 지점이 모두 일직선상에 있어 더욱 관심을 끌었다.

태왕릉 인근에는 귀족 묘지가 모여 있는 오회분이 있는데 그중 5호묘에서 그토록 오랜 세월을 이기고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사신도 벽화와 마주쳤다. 감동의 순간이지만 촬영 제한으로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것이 몹시 아쉬웠다.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였던 오녀산성(五女山城)은 그곳에서 200km 떨어진 ‘환인’에 있다. 환인은 지안에서 약 3시간 반 거리에 있으며 지안에 서 선양으로 가는 통로로 교통 요지다. 지난번 만주를 여행했을 때 다녀온 오녀산성은 높이 800m의 높은 산마루에 위치해 철옹성같이 그 위용을 자랑한다. 지금도 연못, 성곽 일부 등 옛 성터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 여정은 백두산 천지 등정으로 네 개 길 중 ‘북파’를 택했다. 지안에서 약 400km 떨어진 백두산 관광 전진기지인 얼다오바이허(二道白河·이도백하)에 도착해 여정을 풀었다. 백두산 천지는 기후가 급변해 그 자태를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약 60km 산길을 달려 백두산 천지에 도착했다. 날이 너무 청명해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데, 천지에는 아직 눈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한눈에 봐도 한민족의 영산으로 손색이 없다. 날이 맑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는 천지는 물론 건너편 북한의 산까지 뚜렷이 보인다. 이런 날은 정말 드물다고 안내인은 몇 번을 감탄했다.

발해 역사 탐방

용두산 정효공주 묘 발굴 당시를 설명하는 정영진 소장.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백두산과 천지를 뒤로하고 쉬지 않고 4시간 동안 180km 정도를 달려 허룽(和龍·화룡)에 도착했다. 거기서부터는 연변대학 발해사연구소의 정영진 소장이 직접 안내를 해주었다. 허룽은 한민족 역사의 중심지 중 한 곳이다. 동부여의 발현지이자 발해 중경현덕부가 위치했던 곳이다. 

발해 2대 무왕 때 이곳의 서고성(西古城)으로 천도(742년)해 14년간 수도로 삼았다. 서고성은 토성으로 외성과 내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외성은 둘레가 약 2.7km, 내성은 약 1km로 그 흔적이 아직도 뚜렷하다. 서고성 인근 용두산 고분군 중 3대 무왕의 딸 정효공주 묘에서는 벽화도 발견됐다. 1980년 연변대 연구팀이 발굴에 성공했는데, 우리를 안내한 정영진 소장이 바로 발굴 당사자였다. 발굴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그의 표정에서 젊은 시절로 돌아간 학자의 모습이 엿보였다.

허룽을 떠나 약 70km 떨어진 옌지(延吉·연길)로 향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 주도인 옌지는 조선족 문화의 중심지로 2000년 무렵만 해도 주민의 40%가 조선족이었으나 이제는 한인 비중이 점차 늘고 있다. 옌지에서 하룻밤을 잔 후 약 30km 정도 떨어진 룽징(龍井·용정)을 방문했다. 룽징은 해란강과 일송정, 윤동주 시인 생가와 명동교회, 명동학교가 있는 명동촌이 자리 잡은 곳이다. 영화 <동주>의 무대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동남쪽으로 50km 지점에 개산둔이 있다. 1800년대 중반 한민족이 진출한 간도 지역 중 가장 먼저 대규모로 정착했던 곳이다. 그 땅을 직접 밟아보고 싶었으나, 시기적으로 민감한 때라 가는 것은 다음으로 미뤘다. 룽징에서 약 70km 동쪽으로 가면 두만강 국경 도시 투먼(圖們·도문)이 나온다. 투먼은 중국 동북 지역의 무역·교통 중심지로 두만강 연안에서 북한과 철도로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다. 

두만강에서 사공이 노를 젓고 있다.
<지평인문사회연구소>

투먼에서부터는 두만강을 따라 접경지대를 달리게 되며, 10km 정도 가다 보면 드디어 한반도 최북단 지역인 북한의 ‘풍서’란 곳을 마주 보며 지나게 된다. 감개가 무량하다. 마침 인근에서 사공이 노 젓는 배를 보자 나도 모르게 카메라를 들이댔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이라는 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투먼 시에서 70km를 더 달리면 국경 도시 훈춘에 닿는다. 이곳은 발해 5경 중 하나인 동경 용원부가 자리 잡았던 곳이다. 발해 3대 문왕이 신라 및 일본과의 교류를 염두에 두고 천도해 9년간 수도로 삼았다. 동경 용원부의 중심 성터가 바로 팔련성으로, 외성과 내성 터를 비롯해 다수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살아 숨 쉬는 발해사의 현장을 돌아보니, 대륙에서 웅비하던 발해인의 숨결이 피부에 와 닿는 듯했다.

훈춘에서 다시 북중 국경선에 인접한 좁은 길로 약 60km를 달려 중국·북한·러시아 3국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두만강 하구 팡촨(防川·방천)에 도착했다. 나란히 보이는 세 나라 국기가 이 지역 역사를 함축해 보여줬다. 중국은 여기서부터 단 16km가 육지로 가로막혀 동해와 태평양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은 동해 바다를 향한 염원을 담아 망해각(望海閣)이라는 탑을 세웠다. 팡촨탑이라고도 부른다. 

지난번 연해주 발해 유적 탐사 때 하산 쪽에서 바라봤던 바로 그 팡촨탑이다. 14m 높이의 3층 누각에 오르면 중국·러시아·북한 3국을 모두 내려다볼 수 있다. 팡촨을 떠나 다시 옌지에 도착한 후 비행기에 몸을 싣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선양에서부터 팡촨까지의 1800km, 우리 역사의 숨결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는 땅은 한민족 역사를 탐구하는 순례자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데 한치의 부족함도 없었다. 

&nbsp;김석동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
김석동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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