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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2024-03-28 19:16 (목) 기사제보 구독신청
화학·전자 산업 중흥 이끈 ‘참 경영인’ 구자경 LG 명예회장 별세
화학·전자 산업 중흥 이끈 ‘참 경영인’ 구자경 LG 명예회장 별세
  • 이기동 기자
  • 승인 2019.12.14 15: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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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2대 회장으로 ‘도전과 혁신’ 주도, 매출 260억->30조원대로 1150배 도약

[인사이트코리아=이기동 기자] 상남(上南) 구자경(具滋暻) LG 명예회장이 14일 오전 10시경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4세.

장례는 고인과 유족들의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최대한 조용하고 차분하게 치르기로 했다. 별도의 조문과 조화를 정중히 사양하기로 했고, 빈소와 발인 등 구체적인 장례 일정도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구 명예회장은 70세이던 1995년 스스로 회장의 자리에서 물러나 임종을 맞을 때까지 자연인으로서 소탈한 삶을 보냈고, 인재 양성을 위한 공익활동에 헌신하는 열정으로 충만한 여생을 보냈다. 구 명예회장은 경영자로의 업적은 물론 은퇴 후의 삶까지 재계의 귀감으로 존경을 받아 왔다.

슬하에 장남 故 구본무 LG 회장을 비롯해 구훤미씨,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 구본준 LG 고문, 구미정씨, 구본식 LT그룹 회장 등 4남 2녀를 두었다. (부인 故 하정임 여사는 2008년 타계)

재계 첫 무고(無故) 승계 보여준 ‘참 경영인’

故 구자경 명예회장은 구인회 LG 창업주의 장남으로, 1925년 경남 진주시 지수면에서 태어났다. 그는 LG그룹 창업 초기이던 1950년 스물 다섯의 나이에 모기업인 락희화학공업주식회사에 입사해 명예회장으로 경영일선에서 은퇴할 때까지 45년간 기업 경영에 전념하며 원칙 중심의 합리적 경영으로 LG를 비약적으로 성장시키고 명예롭게 은퇴한 ‘참 경영인’이었다.

LG 창업주인 연암 구인회 회장이 62세를 일기로 1969년 12월 31일 타계함에 따라 구 명예회장은 45세가 되던 1970년 1월 9일 LG그룹 2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공장에서 20년간 생산현장을 지키다 서울로 근무지가 바뀐 지 불과 1년 수 개월 만에 부친의 유고로 마음의 준비 없이 회장 자리에 오른 구 명예회장은 ‘기술입국(技術立國)’의 일념으로 화학과 전자 분야의 연구개발에 열정을 쏟아 70여 개 연구소를 설립했으며, 수많은 국내 최초 기술과 제품을 개발해 LG의 도약과 우리나라의 산업 고도화를 이끌었다.

또 그는 과감하고 파격적인 경영 혁신을 추진해 자율경영체제 확립, 고객가치 경영 도입, 민간기업 최초의 기업공개, 한국기업 최초의 해외 현지공장 설립 등 기업 경영의 선진화를 주도한 혁신가였다.

구 명예회장이 25년 간 회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LG그룹은 매출 260억원에서 30조원대로 약 1150배 성장했고, 임직원 수도 2만명에서 10만명으로 증가했다. 주력사업인 화학과 전자 부문은 부품소재 사업까지 영역을 확대해 원천 기술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수직계열화를 이루며 지금과 같은 LG그룹의 모습을 갖출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됐다.

구 명예회장은 늘 “우리나라가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뛰어난 기술자가 많이 나와야 한다”, “세계 최고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배우고, 거기에 우리의 지식과 지혜를 결합하여 철저하게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많은 이들이 사업보국(事業報國)을 외쳐댈 때에도 기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공염불에 그치게 된다며 ‘강토소국 기술대국(疆土小國 技術大國)’의 믿음을 잊지 않았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기업의 외형적 성장뿐만 아니라 선진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과감하게 실천에 옮긴 재계의 혁신가였다. 국내 민간기업으로는 최초로 기업을 공개해 기업을 자본 시장으로 이끌어 내는 역할을 했고, 국내 최초로 해외 생산공장을 설립해 세계화를 주도하는 등 우리나라 기업경영의 질적인 성장 사례를 끊임없이 제시해 왔다.

특히 국내외 정세가 급변하던 1980년대 후반부터는 다가올 21세기를 주도할 수 있는 기업체질을 갖추기 위한 경영혁신 활동을 열성적으로 전개했다. 계열사 사장들이 ‘자율과 책임경영’을 할 수 있도록 권한을 위임하는 LG의 ‘컨센서스(Consensus) 문화’를 싹 틔웠고, 또 물건을 만들면 팔리는 시절이었음에도 ‘고객 중심 경영’을 표방했다.

나아가 아예 회사의 경영이념을 고객가치 중심으로 재정립하는 등 구 명예회장의 혁신적인 경영 활동은 재계의 큰 반향을 일으키며, 국내 기업들에게 경영활동 선진화를 위한 좋은 표상이 됐다. 그는 1992년에 혁신의 바람이 LG를 넘어 국내 경제 전반에 퍼질 수 있도록 LG의 경영혁신활동을 구체적으로 소개한 <오직 이 길밖에 없다>를 집필하기도 했다.

은퇴 후 버섯연구 등 취미활동과 함께 ‘자연인’으로 여생 보내

구자경 명예회장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철저하게 평범한 자연인으로서 살았다.

그가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면서 한 가지 결심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구인회 창업회장이 생전에 강조한 ‘한번 믿으면 모두 맡겨라’라는 말에 따라 은퇴한 이상 후진들의 영역을 확실히 지켜주는 것이었고, 어려울 때일수록 그 결심을 철저히 지켰다.

대신 그는 충남 천안시 성환에 위치한 연암대학교 농장에 머물면서 은퇴 이후 버섯연구를 비롯해 자연과 어우러진 취미 활동에 열성을 쏟으며 하루하루 바쁜 일상을 보냈다.

구 명예회장의 취미 생활은 교직 생활 때부터 손을 댄 나무가꾸기로 시작해 난, 버섯 연구까지 자연과 벗삼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의 연속이었다. 특히 그는 무엇을 하나 시작해도 단순히 여가로 그치지 않고 전문가 수준의 식견을 갖출 때까지 파고들었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구 명예회장은 25년 간 국내 재계를 대표하는 대기업 회장이었지만, 은퇴 후 일체의 허례와 허식 없이 간소한 삶을 즐기며 그야말로 ‘자연인’으로서 여생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현역 시절의 열정과 노력하는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끊임없이 연구하는 자세는 기술개발에 매진했던 경영인의 모습 그대로였고, 자연인으로서 제2의 인생 은퇴한 경영자의 모범 그 자체였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시련 많은 현대사 속에서도 기업경영의 정도(正道)를 잃지 않았고, 언제나 남보다 앞선 생각, 과감한 결단으로 우리 경제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던 큰 기업인이었다.

 

 

인사이트코리아, INSIGHT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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