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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2024-03-28 19:16 (목) 기사제보 구독신청
[인터뷰] 한국 발레의 전설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 단장
[인터뷰] 한국 발레의 전설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 단장
  • 도다솔 기자
  • 승인 2019.11.03 20: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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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청’ ‘춘향’ 작품, 해외 발레단서 사가는 걸 보고 싶다

[인사이트코리아=도다솔 기자] 세계 5대 발레 콩쿠르 ‘스위스 로잔 국제발레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입상하면서 세계무대의 문을 두드린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UBC) 단장. 1989년 세계 최고의 발레단으로 손꼽히는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에 초청돼 동양인 최초로 ‘지젤’의 주연을 맡았다.

이례적으로 무려 7번의 커튼콜을 받은 그는 빼어난 표현력과 테크닉으로 아직까지도 지젤을 논할 때 가장 먼저 입에 오르는 전설적인 무용수다. 미국의 저명한 평론가는 그를 두고 “누가 지젤을 그만큼 출 수 있겠는가”라고 찬사를 보냈다.

올해는 유니버설발레단이 창단 35주년을 맞는 해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시급했던 어려운 시대에 태동한 이 민간 발레단은 세계무대에서 K-발레를 주도하고 있다.

지난 10월 8일 서울 광진구에 위치한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인사이트코리아>와 만난 문훈숙 단장은 발레는 자신의 오랜 친구와 같다고 말했다. 때로는 못살게 굴고 혹독하게 괴롭히고 미워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가도 절대 배신 않는 솔직한 친구라며 내 인생을 풍성할 수 있도록 도와준 아름다운 친구라고 말하며 웃었다. 한국 발레의 태동기부터 성장을 함께한 그의 발레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발레는 언제 처음 접했나.

“미국에서 태어나 초등학교에 다닐 때까지는 미국에서 살았다. 7살 무렵 어머니가 슈퍼에 붙어있는 발레학원 광고를 보고 한 살 아래 여동생과 함께 보내주셨다. 처음에는 전공으로 시켜야겠다는 생각은 안 하셨던 것 같다. 취미로 시작했는데 전공이 돼버린 케이스다.”

-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에서 동양인 최초 ‘지젤’ 역할을 맡아 7번이나 커튼콜을 받았다.

“1989년은 철의 장막도 내려오기 전이다. 한국·소련 수교도 다음 해에 이뤄졌다. ‘마린스키’하면 접근하기 힘든 이미지가 굉장히 강했다. 당시 미국으로 망명하는 최정상급 러시아 무용수들이 늘어나니 마린스키 발레단이 미국 공연할 때 KGB요원들이 공연장 곳곳을 돌아다니던 시절이다. 이 당시 미국 방문 중이던 올레그 비노그라도프(Oleg Vinogradov) 마린스키 예술감독이 우연한 기회에 우리 발레단의 지젤 공연 비디오를 보고 나를 초청해야겠다고 불러주신 게 계기가 됐다. 마린스키 무대에 선다는 건 마치 메카에 가는 것과 같아서 영광이면서도 부담감이 엄청났다.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지만 좋은 스승과 좋은 파트너를 만난 게 도움이 됐다. 루마니아 출신의 제타 콘스탄티네스쿠(Geta Constantinescu) 선생님께서 지도해주셨는데, 아침 일찍 연습실에 들어가면 늦은 오후가 돼서야 퇴근할 수 있었다. 당시 매일 도시락을 싸서 다니면서 화장실 가는 시간 외엔 연습실에서 연습만 했다. 그런 무대에 여러 번 설 수 있었던 건 내게 기회이자 도전이면서 축복이었다.”

- 부상으로 무대를 내려오게 됐다. 최고 주가를 달리던 무용수로서 괴롭지는 않았나.

“사실 너무 쉬고 싶었다. 그때가 39살이었는데 만약 30대 초반쯤 부상으로 쉬게 됐다면 나는 춤 없이는 못 사는구나 하는 생각을 재확인하는 기회가 됐을지도 모른다. 나는 쉬지 않고 계속 달려만 왔다. 발레를 하기엔 체격도 안 좋고 성격도 내성적이어서 과연 발레가 나에게 맞나 하는 생각에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많았다. 그때마다 안 된다, 계속 나아가야 한다는 아버지의 독려로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래서 쉴 수 있는 시간이 반가웠다. 나이로 인해 다시 현역으로 재기하기는 어려웠고 여기까지 하라는 하늘의 뜻인가 보다, 무대는 후배들한테 물려줄 때구나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됐다.”

- 유니버설발레단 창단 이야기가 궁금하다.

“선화예술중·고등학교가 유니버설발레단의 산실이었다. 내가 선화예술중학교에 1976년 3기로 입학했는데 김인희 서울발레시어터 단장, 허용순 안무가와 동기다. 입학 무렵 미국에서 에드리언 댈러스 선생님이 한국으로 와 선화예술학교의 발레부장을 맡으셨다. 프로 무용수가 되 려면 보통 8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한데 정확하게 8년 후 1984년 7월에 발레단이 창단했다. 에드리언 댈러스 선생님이 배출해낸 졸업생이 주요 배역을 맡고 재학생들이 군무를 맡고 남자 무용수가 없어 해외에서 데려오는 식이었다. 당시 국립발레단 무용수였던 민병수 교수가 객원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 선생님이 외국 분이셨기 때문에 외국의 시스템대로 학생들을 배출하면 당연히 넥스트 스텝으로 아이들이 춤출 수 있는 프로발레단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셨던 거다. 당시 설립자인 고(故) 문선명, 한학자 총재님께서 예술학교를 설립할 정도로 문화예술의 중요성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발레 선생님 제안에 어려운 시절 가운데서도 창단하게 됐다.”

- 당시 발레단 창단과 운영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

“창단 무렵 한국에서 발레라는 것이 워낙 낯선 문화다 보니 공연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고 관객도 없었다. 창단은 했는데 너무 어려움이 많으니까 차라리 발레단의 중심을 미국으로 옮기자는 구상까지 나왔다. 한국에선 도저히 안 되겠다는 것이다. 워싱턴 D.C.에 연습실까지 마련해 놨는데 이번에는 단원들의 비자 문제, 발레단의 재정 문제 등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대신 그 자리에 ‘키로프 발레 아카데미’를 세웠다. 마린스키 발레단 ‘지젤’ 공연 때 인연이 됐던 올레그 비노그라도프 마린스키 예술감독이 키로프 발레 아카데미의 예술고문을 맡아 좋은 무용수를 길러내는데 많은 도움을 주셨다. 너희는 아직 수준이 안 된다며 해외 공연 프로모션도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안팎으로 어려웠지만 그럴수록 단원들이 똘똘 뭉쳐 발레단을 키워나갔다. 당시 국립발레단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여서 토슈즈를 월 2개만 주고 나머지는 각자 사서 신게 했다. 토슈즈는 1명당 한 달에 수십 개씩 소모되는데 UBC는 전 단원들에게 해외 발레단처럼 개수 상관없이 지원해줬다. 당시 최태지 국립발레단 단장이 민간 발레단도 저렇게 지원하는데 정부에서는 더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요청했다고 하더라. 열악한 가운데서도 국내 발레단의 견인차 역할을 일부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 UBC 대표 레퍼토리 ‘춘향’에서 외국인 주역에 대한 인기가 높다.

“2007년 ‘춘향’ 초연 때 어떻게 노란 머리에 파란 눈의 외국인이 몽룡을 하느냐고 부정적인 시선이 많았다. 발레단 입장에서는 큰 모험을 한 셈이다. 그 때 몽룡 역은 시묜 츄진(Semyon Chudin)이라는 러시아 출신 무용수가 맡았는데, 다른 단원들과 똑같이 학교 졸업하고 입단해서 군무부터 시작해 주역으로 올라선 경우다. 단지 외국인이라는 게 문제가 된 거다. 그런데 지금 얼마나 많은 한국인 무용수가 세계 발레단에서 활약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재밌는 문제다. 검은 머리 동양인 지젤은 되지만 금발의 서양인 몽룡이 안될 이유가 있나? 그런 사고방식 이면 한국인 백조도 나올 수 없다. 발레는 이래야 한다는 개념을 깨고 관객들로 하여금 이질감이 아닌 신선함으로 느낄 수 있도록, 마인드를 열 수 있게 신경 썼다. 주변의 우려도 있었지만 결국 우리의 모험은 성공으로 통했고 당시 우리 발레단 주역을 맡았던 시묜 츄진은 지금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다.”

- UBC는 항상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았다.

“1998년 유니버설발레단이 미국 뉴욕에서 ‘심청’ ‘백조의 호수’를 공연했다. 한국 발레 최초로 북미에 입성한 순간이었다. 그 당시 부담감과 책임감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발레단 전체가 사활을 걸었고 여기서 실패하면 두 번 다시 나타나지 못할 것이라는 걸 느꼈다. 다행히 <뉴욕타임스> 평가가 꽤 좋게 나왔다. 만약 실패했다면 최초라는 기록도 안 남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성공을 했기 때문에 회자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발레가 늦게 정착됐고 여건이 어려워 워낙 발레 불모지 상태였다. 국립발레단이 있었지만 우리처럼 적극적으로 해외 공연을 추진하지 않아 UBC가 북미·유럽·러시아 등 뭐든 최초라는 타이틀이 붙었던 것 같다.”

- 경영하면서 애로사항은 없었나.

“현역에 있을 때는 무대만 봤다. 그런데 책임이 뭐냐에 따라서 보는 시선이 확 바뀌게 되더라. 사실 CEO가 이것저것 모든 부분에 개입하려고 하면 안 된다. 그런데 무용수로 일하다가 경영을 하려고 하니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챙기려고 했다. 무용수는 항상 스스로 모든 부분을 챙겨야 하는데 이런 습관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느 순간 이게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한발 물러서서 각 분야 책임자에게 일임하고 나누니 훨씬 일 진행도 수월해졌다. 특히 올해 ‘세계평화여성연합’ 이라는 NGO 단체를 맡게 되면서 조금 더 바빠졌다. 내가 관여를 다 하지 않아도 전보다 발레단이 훨씬 잘 돌아가더라, 더 발전했다는 소리를 들으면 성공한 거다(웃음).”

- 발레단을 이끄는데 필요한 원동력은 무엇인가.

“돈이다. 아무리 신작 등 공연을 하고 싶어도 지원금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한다. 35년 동안 변함없이 꾸준히 지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설립자 두 분이 발레단 사업 방향에 대해 관여하지 않고 전적으로 믿고 격려해주다 보니 소신껏 예술을 펼칠 자유가 있다. 예술경영에서 창작자에게 대가 없는 지원은 결코 흔하지 않다. ‘예술은 인류 봉사의 길’이라는 설립자 이념을 바탕으로 세상을 더 이롭게 하고 발레라는 예술을 통해 사람들의 힐링을 도우면서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되도록 기여하자는 것이 UBC의 방향성이면서 UBC가 지금처럼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다.”

- 최근 한국 발레의 위상이 부쩍 높아졌다.

“지금은 세계 유명 발레단마다 한국인 무용수들이 최소 한 명씩은 자리 잡고 있지만 내가 학생 때만 하더라도 모리시타 요코 등 일본인 무용수들이 활약하던 때로, 한국인 무용수는 전무한 수준이었다. 20년 전 친정아버지(故 박보희 한국문화재단 명예이사장)가 앞으로 한국이 세계 발레의 메카가 될 것이라고 종종 말씀하셨다. 그때는 뜬구름 같은 얘기였지만 지금 현실이 돼가는 중이다. 지난 6월 프랑스 파리에서 ‘백조의 호수’ 공연을 선뵌 후 현지에서 극찬을 받았다. 연출과 무대, 단원의 기량이 모두 고르고 세세한 모든 부분에까지 신경 쓴 모습이 경이로 울 정도라고 하더라. 우리에겐 당연한 일인데 왜 저렇게까지 극찬할까 생각하니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다른 곳은 이렇지 않구나. 이번에 파리에 가서 이제는 한국 발레가 정말 궤도에 올라섰다고 확신했다. 그 길에 우리 UBC가 기여를 조금 했다는 생각이 들어 자부심을 느꼈다.”

- 해외로 나가는 한국 무용수들을 보면서 서운한 감정도 들 것 같은데.

“단장이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풋과일처럼 설익은 무용수들을 어렵게 키워냈는데 해외 발레단으로 떠나보내기가 참 힘들었다. 올레그 비노그라도프 마린스키 예술감독이 한국에 왔을 때 속상한 마음에 울며 하소연하니 그가 너무 마음 쓰지 말라며 키워내면 날아가는 무용수를 지켜보는 것이 우리의 일이라고 하더라. 신기하게도 그 뒤로는 훌훌 털어내게 됐다. 떠나보낼 당시에는 속상했지만 해외에서 활약한 무용수들이 더 큰 인물이 돼서 다시 국내 무대로 돌아오게 됐다. 한국과 세계 발레 수준 격차가 심하던 옛날에는 몹시 아쉬웠는데 최근에는 그렇지 않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무용수 가운데서도 더 뛰어난 인물이 많아졌다.”

- 발레 대중화에 각별히 신경 쓰고 있다고 들었다.

“2001년 은퇴 후 단장으로서 CEO 모임 등 여러 모임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10명 중 10명이 발레는 너무 지루하고 어렵다고 하더라. 내가 너무 사랑하는 발레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힘들어하는구나 라고 느껴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CEO들을 대상으로 발레 강의를 시작했다. 점차 일반 대중을 상대로 강의 영역을 넓혔다. 3년을 준비해 ‘해설이 있는 발레’ 공연도 만들었다. 유럽에서는 발레에 해설을 붙인다는 것이 상상하기 힘든 일인데다 일부에서도 수준 저하라며 쓴소리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공연은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기고 공감하면서 행복해야 한다. 발레 공연 역시 소수의 사람들만 즐거우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공연 해설부터 다양한 참여 프로그램 등에 신경을 쓰고 있다.”

- 10년 후 문 단장의 모습은?

“발레 공연 보러 오는 한 명의 관객이지 않을까. 그때도 단장을 맡을지 안 맡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단장하던 시절보다 훨씬 잘 하네, 손 놓기를 잘했다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최근 세계평화여성연합이라는 NGO단체를 맡으면서 아프리카나 분쟁지역의 현실을 보고 여성 교육의 중요 성을 절감했다. 발레는 여성 중심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에 성별로 인해 불이익을 당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발레 세상에서 나와 보니 현실은 많이 달라 놀랐다. 여태까지 발레를 통해 아름다운 세상을 사람들에게 보여드렸다면 앞으로는 어려운 이들에게 세상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도록 돕는 노력을 하고 있지 않을까.”

- 최종 목표가 있다면.

“‘춘향’ ‘심청’ 같은 작품을 해외 발레단에서 사 가는 것. 우리가 ‘백조의 호수’ 같은 해외 작품을 사 오듯이 우리의 작품이 해외에서 널리 퍼지는 것이다. 그 정도가 되면 한국 발레가 한 그루의 단단한 나무로 결실을 맺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정상으로 가는 길은 어렵지만 더 어려운 건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서부터다. 정상에서 나태해지지 않고 시대에 맡게 발전을 이루고 혁신하는 것이다. 오래돼서 좋은 것도 있지만 오래되면 좋지 않은 문제가 쌓이기 마련이다. 버릴 건 버리고 지켜야 할 건 지키는 밸런스 조직으로 성장하는 그런 UBC가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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