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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2024-03-28 19:16 (목) 기사제보 구독신청
[인터뷰] 아들은 프랑스 장관, 딸은 하원의원 키운 오영석 박사
[인터뷰] 아들은 프랑스 장관, 딸은 하원의원 키운 오영석 박사
  • 강민경 기자
  • 승인 2019.09.01 21: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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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들 인성 좋다는 얘기 들을 때 제일 기분이 좋다"

[인사이트코리아=강민경 기자] 2018년 10월 15일 프랑스를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을 위해 마련된 엘리제궁 국빈만찬에서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문 대통령에게 직접 소개한 남매가 있다. 마크롱 대통령의 최측근 참모(디지털 경제 보좌관)인 ‘세드리크 오’와 프랑스 하원 의원 ‘델핀 오’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들 남매와 문 대통령 내외의 기념사진까지 직접 찍어 줬다. 아버지 오영석 박사는 이들 남매 국적은 프랑스지만, 격년으로 한국을 방문해 언어와 문화를 익힐 수 있게 교육했다. 남매는 아버지의 가르침 덕에 프랑스 마크롱 내각의 대표적 친한파이자 글로벌 인재로 성장하고 있다. 세드리크는 오는 지난 3월 31일 프랑스 마크롱 정부의 디지털경제 장관으로 임명됐고, 델핀은 프랑스 국회의원을 거쳐 지난 6월 1일 프랑스 외무부 본부대사로 임명돼 ‘UN 여성 포럼 2020(The UN Women Global Forum 2020)’ 사무총장을 맡았다.


한국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밑에서 자란 남매가 프랑스 정계의 엘리트로 활약하고 있다. 이들의 아버지인 오영석 박사는 대학을 졸업하고 1973년 국방과학연구소에 들어간 후 프랑스로 미사일 기술을 배우러 가기 위해 프랑스문화원에서 불어를 배우다 프랑스 여자 선생님과 사랑에 빠졌다. 이후 이직과 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던 중 그 선생님과 결혼해 아들 세드리크와 딸 델핀을 낳았다.

오 박사는 프랑스 국영화학회사 롱프랑 중앙연구소 수석연구원을 거쳐 국립응용과학원 교수로 재직하는 등 프랑스에서 머문 25년 동안 재불 한국 과학기술자협회 회장과 재유럽 한국 과학기술자연합회 회장을 지내면서 프랑스에 유학 온 한국인 학생들을 음으로 양으로 도왔다. 2004년 KAIST 초빙교수로 한국에 돌아온 그는 현재 예성화랑 고문과 개발도상국의 컴퓨터 공학발전을 돕는 사단법인 ‘엑세스넷’ 회장을 맡고 있다. 오 박사는 최근 자녀교육 철학과 살아온 이야기에 대한 기록을 담은 책 <어떻게 자녀를 인재로 키웠는가>를 출판하기도 했다. 지난 8월 19일 <인사이트코리아>가 서울 인사동에 위치한 예성화랑에서 오 박사를 만나 그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 1970~80년대에 외국인 여성과 사랑에 빠졌다. 아내와의 러브스토리가 궁금하다.

“1976년 국가과학연구소에 재직하던 도중 미사일 기술을 배우기 위해 프랑스로 가야 했다. 연구실에서 6명이 갔고 프랑스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오전에는 회화, 오후에는 문법을 배웠다. 첫 날 어떤 프랑스 여자가 들어오는데 아주 큰 갈색 눈에 곱슬머리에 두건을 썼다. 프랑스 여자를 그 때 처음 봤는데 처음 봐서 그런지 호기심이 생겨 계속 눈길이 가더라. 이후 다른 친구들은 바쁘다고 안 오기 시작하다가 결국 나만 계속 배우게 됐다. 80일 정도 배웠는데, 외국어 배우는 걸 좋아하고 소질이 있어서 그런지 꽤 자유롭게 의사소통이 가능한 정도가 됐다. 그녀에게 프랑스어를 배우며 관습과 사고의 차이가 보였는데 여기에 특히 관심이 갔다. 점점 좋아하는 눈치는 보였으나 처음엔 선생과 제자의 관계여서 딱히 그런 분위기가 조성되진 않았고, 수업이 끝나고 한참 이후부터 사적으로 만나기 시작했다. 당시엔 외국인 여자가 별로 없었고 남자들이 외국인 여자를 봐도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남자들은 외국 여자를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나는 결코 그런 생각이 없었다. 그녀와 만나며 문화적·정치적 사상에 대해 많은 얘기를 했는데 그 때 서로의 생각에 대해 호감을 느끼게 됐다.”

- 결혼까지 결심하게 된 배경은?

“1976년 내가 프랑스로 출장을 가자, 한국에 남아 강사 일을 계속 하던 그녀가 그해 크리스마스 때 나를 찾아 프랑스로 왔다. 함께 한주동안 지내다가 그녀는 떠났고 나는 거기서 계속 연수를 하다가 한국으로 1977년 돌아왔다. 그해 여름에 그녀가 프랑스에서 나를 보러 한국으로 또다시 왔다. 그때 계속 한국서 같이 지냈는데 1978년에 내가 ‘프랑스로 유학을 가겠다’고 해서 또 그녀는 한국에 남고 나는 프랑스로 떠났다. 같은해 12월 그녀가 프랑스로 찾아왔는데, 당시 나는 학생이어서 학교 기숙사에서 같이 살게 됐다. 결혼은 1980년 프랑스에서 했다. 사실 나는 원래 결혼도 하고 싶지 않았고, 아이도 낳을 생각이 없었다. 혼자 사는 것 자체가 즐거웠기 때문이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결혼생활에 찌들어있다고 보였다. 요새 젊은이들이 결혼을 하지 않는 게 이해가 된다. 혼자서 즐길 수 있고 좋으니까. 나도 그때 결혼에 대한 생각은 크게 없었다. 그 여자가 싫거나 애를 낳기 싫어서라기보다는 ‘그냥 같이 있어도 좋은데 왜 굳이 결혼을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아이를 낳고 싶다고 했다. 그 당시 내 나이가 32살, 그녀가 36살이었다.”

- 그 시대에 연상의 외국인 여성과 결혼을 하게 됐다. 당시 굉장히 센세이셔널 한 일이었을 것 같다. 집안의 반대는 없었나.

“반대가 없을 수 있었겠나. 내가 7살이던 1955년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3남매를 홀로 키우셨다. 여동생이 둘 있다. 경북 경산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아이들 교육을 위해 서울로 이사를 가셨다. 아버지 돌아가신 때가 어머니 나이 27살이었다. 27살 과부가 애들 교육시킨다고 서울로 온 거다. 어머니의 한 가지 희망은 아들 잘 키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잘 키워놨더니 외국여자를 만나 외국 가버린다고 황당해 하셨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너 하나 바라보고 살았는데’ 이런 말씀을 많이 하시더라. 그 때 나는 ‘엄마, 각자의 인생을 살아야지. 내가 엄마 인생을 살아줄 수 없고 엄마가 내 인생을 살아줄 수 없다. 지금 내가 프랑스에 가서 공부를 하겠다고 하는데 못 가게하면 나중에 내가 엄마를 비난하고 원망할 수 있다. 각자의 삶을 사는 것이 나중에 만났을 때 더 좋지 않겠나’라고 말씀드리고 떠났다. 대신 한국에 들어왔을 땐 항상 어머니와 함께 생활했다. 대전에 직장이 있어도, 새벽에 서울에서 출발해 밤늦게 서울로 돌아오는 한이 있더라도 항상 어머니 댁에서 함께 생활해서 ‘효자’라는 얘길 많이 들었다.”

- 1980년에 결혼해 1982년에 첫 아들 세드리크를, 1985년에 딸 델핀을 낳았는데, 어떠한 방식으로 자녀교육에 관심을 갖게 됐나.

“나는 내 자식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자식은 내 소유물이 아닌 하나의 객체이자 인생, 생명체다. 나와 연관은 있으나 다른 생명체인 것이다. 내 자신이 불완전한데 어떻게 다른 생명체를 책임지고 장래를 보장할 수 있는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연스럽게 아이들이 자기 결정적으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었다. 물론 물질적인 책임이 있긴 하지만, 정신세계나 장래 같은 부분에선 그렇지 않다. 완전히 독립적으로 커야한다는 생각이 있었고, 교육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독자적으로 크려면 경험이 있어야 했다. 경험은 곧 망루의 높이이기 때문이다. 망루가 높을수록 멀리 볼 수 있다. 경험의 높이라는 것은 자신이 직접 체험해야하나, 인생은 짧기 때문에 간접체험으로부터 흡수해야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책이었다. 책에 많은 사람들의 경험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부터 책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갓난아이 때부터 자기 전 매일 책을 읽어줬다. 또 저녁 8시 30분에 재우고 나면 이후로 방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했다. 숙면이 곧 체력이기 때문에. 책읽기와 숙면, 이 2가지를 아이들에게 매일 시켰다.”

- 한국에선 ‘육아는 엄마의 몫’이라는 생각이 깊은데.

“한국에선 여자가 애를 낳으면 ‘얘는 내 애기야’라고 생각하며 본인과 아기의 서클을 자꾸 만드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남자는 식구가 늘었으니 더 일을 하고 돈을 많이 벌어야 해서 외부활동이 늘어나고. 그러면 여자는 아이와의 관계에서 남자를 축출하기 시작한다. 남자는 축출 당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자꾸 밖으로 돌게 되는데, 나중에 가서는 허수아비 혹은 종이호랑이가 된다. 그 땐 가정에 참여하려고 해도 여자와 아이가 귀찮아한다. 한국 남자들, 한국 아버지들이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은 늘 가정 안으로 파고들며, 자식의 문제가 발생하면 아내에게 물어보기만 할 것이 아니라 내 아이, 나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는 부부가 같이 책임져야 한다. 한국 남자들은 이것을 꼭 명심해야 한다.”

- 자녀 양육 시 ‘이렇게 자랐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던 자녀상이 있었나.

“전혀 없었다. 아이들이 자라고 싶은 대로 자랐으면 하고 바랐다. 종교도 아이들 자신이 나중에 커서 선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강요하지 않았다. 부모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을 습득하고 이해해서 애들에게 전달을 해줘야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모가 직접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가 집에서 책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아이들도 책을 읽게 된다. 나 역시 아이들에게 직접 모범을 보이고자 했다. 그럼 아이들은 본인들이 원하는 대로 바르게 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 자녀 훈육을 할 때가 있었을 텐데, 어떤 식으로 했나.

“델핀 보다는 세드리크가 꾸중을 들은 적이 많았다. 남자아이라 그런지 장난이 심할 때가 종종 있었다. 나는 아이들 어렸을 때 장난감으로라도 총이나 칼을 사준 적이 없었는데, 세드리크가 다른 아이들 장난감 총으로 사람을 겨눌 때 혼을 내곤 했다. 인명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보통 혼이 날 땐 손을 들고 서있거나 매로 엉덩이를 맞곤 했다. 그런데 훈육에서 중요한 것은 이게 ‘사랑의 벌'이라는 것을 아이들이 알게끔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항상 혼을 낸 다음에 설명해주고 보듬어 안아줬다. 교정이 필요해서 너를 혼낸 거지,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사실 외국에선 체벌이 금지되어있는데, 나는 가정에선 교육적 목적으로 체벌도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집안에서의 훈육은 필요하다고 본다.” 

- 한국과 프랑스, 양국의 교육환경은 어떻게 다른가.

“카이스트에 있을 때의 일이다. 식당에서 나왔는데 학생 3명이 교내 횡단보도에서 길을 건너지 않고 쭈뼛쭈뼛하고 있길래, 뭘 하나 보니 택시가 지나가길 기다리고 그 후에 건너가더라. 그들에게 가서 ‘왜 그렇게 서있었느냐’고 물어보니 ‘차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고 학생들이 대답했다. 그 때 참 걱정이 됐다. 내 생각으론, 사람은 당연히 차에 우선하니 먼저 건널 수 있는 거고 대학생 정도의 나이라면 차를 세우고 건너가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지 않나 싶었다. 차가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그제서야 건너가는 패기 없는 젊은이에게 어떻게 나라를 맡기겠나 싶었다. 이런 것이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점이라고 본다.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방법적인 면에서 문제가 있다. 특히 수능이 가장 문제다. 수능에선 기억력 테스트만 하는 셈이다.”

- 한국 교육의 문제점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인 생각을 듣고 싶다.

“수능은 기억력 테스트에 불과하다고 본다. 물론 기억력도 필요하긴 하지만, 수능 후 그 기억을 쌓아놨던 것이 우리나라 발전에 정말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선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교육’이란 지식의 재생산이다. 기억력만 가지고는 지식을 재생산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내가 생각하는 ‘교육’은 관찰하고 인지한 후 분석과 비평을 해야 하는 과정이다. 또 이후엔 다른 것과 비교하고 종합할 줄 알아야 하며 종합 시 주관이 필요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러한 모든 과정이 다 이루어진 후 행동해야 하는 것이 교육이라고 본다. 그런데 한국의 교육에선 이 과정이 부재로 남아있다. 물론 분석할 때 혹은 몇몇 직군엔 특히 더 필요하기도 하지만 기억력만으론 안 된다.” 

- 한국 교육의 문제점을 프랑스에서 더 크게 느끼게 된 계기가 있나.

“한국 외교관들에게서 그러한 문제점을 느끼곤 했다. 프랑스에 있을 당시 한국-프랑스 양국 회담이 열릴 때 외교관들을 가끔 도와줄 때가 있었다. 그런데 한국 외교관들이 나가서 이야기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패기의 문제였다. 아니면 아니라고, 틀렸으면 틀렸다고 말 할 수 있는 외교관이 없었다. 도저히 한국인으로 받아들여선 안 되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걸 보면서, 내가 오지랖 넓게 ‘이러면 어쩌냐’라고 따졌다. 그 때 그 외교관은 ‘여기까지 와서 성과가 없으면 안 된다’고 말하더라. 나는 ‘회담이 깨지는 것도 성과인데 굴복을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반문했지만 바뀌는 것은 없었다. 패기와 객기를 구분하지 못했다. 그런 것들을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정신상태를 교육이 만들어주지 못하는 것, 이것이 한국 교육의 큰 문제라고 느꼈다. 외우고 시험 쳐서 점수가 높으면 좋은 대학교 가겠지만 인성개발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 프랑스를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 내외와 자녀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 알려져 화제가 됐다. 특히 그 사진을 마크롱 대통령이 직접 찍어줬다던데, 프랑스에서 자녀가 중책을 맡고 있어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당시 마크롱 대통령 부인이 마크롱 대통령에게 ‘당신이 사진을 좀 찍어줘요’라고 얘기해서 직접 찍어준 것이라고 들었다. 아이들이 사회적으로 어떤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솔직히 큰 감회는 없다. 그들의 일은 그들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단지 한 가지 기분 좋은 것은 프랑스 미디어에서 내 자식들의 인성이 좋다는 얘기를 할 때다. 인성적 측면에서 인기가 있는데, 이것은 참 기분이 좋다.”

- 책을 읽어보니 ‘우리 집에선 나이 50이 돼야 성인이 된다’고 적혀있던데, 앞으로의 자녀교육은 어떤 형태로 이뤄질까.

“앞으로도 자녀교육의 형태는 크게 변하진 않을 것 같다. 아이들의 일에 크게 간섭 하지 않고 직업적 판단은 전적으로 맡길 것이다. 다만 인성적 판단에 있어선 서로 의논할 생각이다. 과거 세드리크가 마크롱과 일을 한다든가, 델핀이 하원의원에 출마를 할 때 등도 계획은 항상 서로 의논해서 생각을 공유한 것에서 시작된 것이다. 내 생각을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지만 항상 같이 의논하고 내 생각을 피력했다. 인성교육과 소통 역시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프랑스에 있는 아이들과 일주일에 한 번씩 화상통화를 한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가족 간 사랑을 느끼고 확인하는 것, 이것이 자녀교육의 근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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