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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2024-04-16 16:53 (화) 기사제보 구독신청
영조, 사도세자 아버지..역사 드라마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조선 시대 몇 안 되는 성군 중 하나!
영조, 사도세자 아버지..역사 드라마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조선 시대 몇 안 되는 성군 중 하나!
  • 안득수
  • 승인 2019.04.09 23: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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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트코리아 = 안득수 기자]

SBS 월화드라마 '해치'에 등장하는 '영조'에 대한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조선 21대 왕 영조(英祖, 1694~1776)는 조선왕조 역대 임금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긴 왕이다. 1724년부터 1776년까지 52년간 왕위를 지켰던 그는 손자 정조와 함께 18세기 조선을 중흥기로 이끌었다.

1699년(숙종 25)연잉군(延礽君)에 봉해졌으나 어머니의 출신이 미천했던 관계로, 노론 유력자인 김창집(金昌集)의 종질녀로서 숙종 후궁이던 영빈(寧嬪) 김씨의 양자노릇을 하였다. 이로 인해 숙종 말년 왕위계승문제가 표면화되었을 때, 이복형인 왕세자(후일의 경종)를 앞세우는 소론에 대립했던 노론의 지지와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1721년 숙종이 승하하고 왕세자가 즉위해 경종이 되었지만, 건강이 좋지 않고 또 아들이 없었다. 이에 노론측은 앞서 숙종 말년에 좌의정 이이명(李頤命)의 독대에서 논의된 대로, 연잉군을 경종의 후계자로 삼는 일에 착수하였다.

정언 이정소(李廷熽)의 세제책봉상소를 계기로 영의정 김창집·좌의정 이건명(李健命)·영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 등 이른바 노론4대신의 요구와, 이들과 연결되어 있던 왕실의 최고 존장자인 대비 김씨(숙종의 제2계비인 人元王后)의 삼종혈맥(三宗血脈)논리의 지원을 받아, 연잉군이라는 일개 왕자의 신분으로부터 벗어나 경종의 뒤를 이을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삼종혈맥이란 효종·현종·숙종에 걸치는 3대의 혈통만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는 숙종의 유교(遺敎)라고 하는데, 여기에 따르면, 임금인 경종 외에는 연잉군밖에 없는 셈이 된다.(이복동생인 연령군은 숙종 말에 사망.)

유봉휘(柳鳳輝)로 대표되는 소론 일부의 반발과 다른 후사를 물색하던 경종비 어씨(魚氏)의 불만이 없지는 않았으나, 왕세제로 책봉된 명분은 당당하였다. 그런데 노론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임금이 병환중이어서 정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우므로 휴양하도록 해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세제에 의한 대리청정을 요구하였다.

이에 소론은 왕권을 침해하는 불충이라 해 강하게 반발하였으며, 결국 대리청정론은 취소되고 김일경 등 소론 내 강경론자의 공격으로 노론세력이 일시에 정계에서 축출되어 소론정권이 들어섰다.

연잉군은 노론의 지지를 받았고, 또 그들에 의해 왕세제의 자리에까지 올랐기 때문에 고립된 상태를 면할 수 없었다. 뒤이어 노론이 경종에게 반역행위를 했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에 의한 이른바 임인삼수옥(壬寅三手獄)이 발생하여, 노론 4대신을 위시한 170여명의 노론계 신하들이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거나 귀양가는 사태가 벌어지자 연잉군 역시 극히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처제인 서덕수(徐德壽)나 인척관계에 있는 백망(白望)·정인중(鄭麟重) 등이 고문 때문인지는 모르나 역모를 자백해 처형되고, 자신까지 피의자의 공초에 오르내리게 되어 역모에 관련된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김일경의 사주를 받은 환관 박상검(朴尙儉)·문유도(文有道) 등의 방해로 대궐출입이 막히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게 되었다. 이에 왕세제 자리의 사퇴를 걸고 이를 문제화 해, 결국 집권소론으로 하여금 적대행위를 일삼는 환관·궁녀들을 처형하도록 하는 과감성을 보였다.

이후 보좌하는 동궁요속(東宮僚屬)이던 김동필(金東弼)·조현명(趙顯命)·송인명(宋寅明)·박문수(朴文秀) 등과 대비 및 경종의 보호로, 불안한 속에서도 세제의 자리를 지켜 1724년경종의 죽음에 따라 왕위에 올라 영조가 되었다.

그 자신 콤플렉스와 개인사적 불행을 안고 있었으면서도 그는 탕평책을 통해 과열된 붕당 간의 경쟁을 완화했으며 이전의 그 어느 왕보다도 민생을 위한 정치를 펴나가 조선 시대 몇 안 되는 성군 중 하나로 오늘날까지도 평가받고 있다.

노론의 도움으로 왕좌를 차지했지만, 붕당 간의 피비린내나는 정쟁의 폐해를 온몸으로 겪었던 영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붕당의 갈등을 완화, 해소해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바로 탕평책이다.

영조는 즉위 초기에는 자신의 후원세력인 노론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관계로 경종년간에 일어난 신축, 임인 옥사에서 피해를 입은 노론들을 등용하고 옥사를 일으킨 소론들을 정계에서 내몰았다.

그러나 곧이어 노론 중에서 소론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이는 과격론자들을 내몰고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정국운영을 해나갈 수 있는 탕평론자들을 등용하기 시작했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영수를 불러들여 화목을 권하고 호응하지 않는 신하들은 축출하였으며 노론과 소론 중 탕평책을 따르는 자(완론자)들만 등용하였다. 관직도 노론과 소론을 섞어서 배치하였는데 예를 들자면 영의정이 노론이면 좌의정은 무조건 소론 중에서 임명하는, 이른바 쌍거호대(雙擧互對)의 인사정책을 펴나갔다.

이는 이후 어느 정도 탕평책이 안정되자 점차로 당색을 초월해 재능이 있는 자들을 등용하는 유재시용(惟才是用)으로 바뀌어갔다. 또 영조는 일반 유생들의 당론에 대한 상소를 금지 시키고 붕당 갈등의 중심이 된 이조전랑이 가진 삼사(三司: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인사권을 철폐하였으며 자신의 확고한 뜻을 보이기 위해 성균관에 탕평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영조의 이러한 노력으로 중앙정계에는 노론, 소론, 남인, 소북 등 사색 당파가 고르게 등용되어 정국을 운영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조의 왕권 자체가 노론의 지지로부터 비롯된 것이었기에 영조로서도 모든 붕당에 공평하게 정국을 운영해가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노론의 치우친 영조의 절름발이 탕평책은 영조의 개인적 콤플렉스와 결합해 결국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게 만든 또 하나의 비극을 낳고야 말았다.

 

 

인사이트코리아, INSIGHT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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