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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2024-03-28 19:16 (목) 기사제보 구독신청
청나라 세운 누르하치는 한민족 ‘김씨’
청나라 세운 누르하치는 한민족 ‘김씨’
  • 김석동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
  • 승인 2019.03.01 1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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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 왕가는 발해의 대조영-대야발 가계와 같아…금의 국호는 신라 왕성에서 비롯”

여진족은 만주에 살던 퉁구스계 민족을 지칭한다. 중국 사가들은 이들의 이름을 시대에 따라 다르게 불렀다. 춘추전국 시대에는 숙신(肅愼), 한나라 때는 읍루(.婁), 남북조 시대에는 물길(勿吉), 수·당대에는 말갈(靺鞨), 송·명대에는 여진(女眞, 청대에는 만주족이라고 이름 지었다.

6세기 말 수·당 시대에 광범위한 만주 지역의 말갈은 속말·백산·백돌·불열·호실·흑수·안차골 등 크게 7부족으로 나뉘어 살았으며, 흑수 부족을 제외한 6부족은 발해 건국 시에 합류했고, 흑수부족은 발해북부 지역에서 발해에 대항하다 발해 무왕 시대에 복속했다. 중국 사가들은 대체로 이처럼 만주 지역에 살던 이민족을 926년 발해 멸망 후를 기준으로 해당 지역은 여진으로, 살던 사람은 여진족이라 불렀다.

여진의 나라 금의 기원과 흥망

여진은 발해가 멸망한 10세기 초 이후 요나라(거란)의 지배를 받았다. 요의 호적에 편입된 요양 일대(랴오닝성) 부족은 숙여진, 편입되지 않은 송화강 이북(헤이룽장성) 및 두만강 유역(지린성) 부족은 생여진이라 불렸다. 이 시기 200년간 여진은 역사에서 눈에 띄지 않았으나, 12세기 초 만주 하얼빈 남동쪽의 생여진 완안부의 세력이 커지고, 영걸 아골타(阿骨打)가 흑수말갈을 통합하고, 1115년 상경회령부에서 금나라를 건국하면서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했다. 금 태조 아골타는 요를 공격해 영토를 넓히고 1120년 송과 동맹을 맺은 후 만주에서 요를 쫓아내고 북경까지 진출했다. 1125년 2대 태종 때 마침내 요를 멸망시켰다.

금은 요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동맹국이었던 송과 마찰이 일어나자 1127년 송의 수도 카이펑(開封)을 공격해 황제를 사로잡고 송을 강남으로 몰아냈다. 이로써 금은 만주·내몽골·화북 지역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였고, 해릉왕은 1153년 상경회령부에서 연경(오늘날 북경)으로 천도하여 중국 중심부를 장악하고 여진인들을 이주시켰다. 남쪽으로 간 송은 이후 남송으로 이어지면서 금의 신하국이 됐다.

해릉왕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종은 거란의 반란을 진압하고 남송과 국교를 회복한 후 내정을 개혁해 금나라 최고의 명군이 됐다. 12세기 말 전성기를 구가하던 금은 남송·서하·몽골 등의 공격에 시달리다가 1214년 수도를 카이펑으로 옮겼다. 그러나 1234년 몽골과 남송 연합군에 의해 아골타 이후 10대를 이어오다 120년 만에 멸망했다.

금나라 시대 동아시아 국제 정세 흐름

금은 발해 멸망(926년) 후 약 90년이 지난 1115년 발해 영역에서 건국해 120년 간 존속했다. 당시 중국 본토에는 송(960~1126년)과 남송(1126~1279년)이, 만주와 몽골·화북 지방에는 요(916~1125년)가, 한반도에는 고려(918~1392년)가 각각 세워졌다. 이 시기 돌궐(투르크)은 위구르에 멸망한 후 서진하여 셀주크 제국을 건국했다(1037~1194년).

기본적으로 여진과 거란은 대적 관계다. 선비의 후예인 거란족이 세운 나라인 요가 발해를 멸망시킨 후 발해 지역에 있던 여진은 여러 부로 나뉘어졌지만, 대체로 거란과 속국 관계에 있어 거란의 착취와 여진의 반발이 이어졌다. 아골타는 금을 건국한 후 요에 수교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하자 만주 각지에서 요를 격파했다. 이때 송과 금은 요나라 협공을 위한 조약을 맺었다. 금은 요를 파죽지세로 공격하여 상경·중경·서경을 함락하고 수도 연경에 입성(1122년)한 후 1125년 부패로 국력이 쇠잔한 요를 멸망시켰다.

송은 거란과 대치하면서도 여진과 바다를 통해 교역을 지속했으나 여진을 큰 세력으로 여기진 않았다. 아골타 등장 이후 강성해진 금이 요를 격파하고 만주를 장악하자 송은 과거 거란에 빼앗긴 연운 16주를 수복하기 위해 이이제이 정책을 들고 나왔다.

금과 송이 연합하여 요를 친 후, 금은 장성(長成) 이북의 중경을 차지하고 송은 장성 이남의 남경을 차지하기로 한 것이다. 금은 대군을 동원해 요를 전면 공격했으나 송은 출병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에 금 태조는 대규모 배상을 받아냈을 뿐 아니라 남진정책의 빌미를 얻게 됐다. 1125년 금은 송을 공격했다. 송은 나약하게 대항하다 모든 방어 기회를 놓치고 1127년 왕실이 포로가 되면서 멸망했다(정강의 변). 그러나 휘종의 아홉째 아들이 살아남아 남경에 도읍하여 이후 남송으로 이어졌다. 남송 시대에도 양국의 전쟁은 지속됐다. 남송은 금이 가장 두려워하는 걸출한 장군 악비(岳飛)를 모함 끝에 처형하는 등 국력을 낭비한 끝에 1141년 금과 화의하고 종속하는 국가로 전락했다.

당초 여진은 고려와 거란에 귀속했으나 복속과 배반을 되풀이했다. 고려와 여진은 두만강 변 등 국경지대에서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이에 윤관은 금 건국 이전인 1107년 침입하는 여진을 정벌하고 천리장성 9성을 쌓았다. 금이 건국된 후 요가 멸망하고 금이 만주를 차지한 후에는 금과 고려 사이에 긴장과 마찰이 생겼다. 그러나 금은 적대 관계인 거란은 정복했지만 고려에 대해서는 회유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금과 고려는 전형적인 책봉조공 관계를 유지했다. 1135년 묘청이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고 금나라를 정벌하자는 서경천도 운동을 일으켰으나 김부식의 관군에 진압된 이후 금과는 큰 전쟁 없이 사대 관계를 지속했다.

고조선 이래 만주에 거주하는 다수 주민은 조선민족이었다. 부여, 고구려도 그러하며 발해 역시 다르지 않았다. 때문에 누구나 이들 역사를 우리 역사라 생각한다. 그런데 발해가 멸망한 이후가 문제다. 발해 멸망 후 그 지역과 사람들은 여진(족)으로 불렸으며, 여진인들이 금을 세웠다. 그렇다면 금나라 역사는 누구의 역사인가?

1900년대 들어서까지도 금나라를 우리 역사에서 다루었다. <신단민사>에서는 발해·요·금·청까지 포함해 민족사의 흐름을 밝히고 있고, <배달조선정사>에서도 요·금·청사를 한국사에 포함시켰다. <민족정사>에서는 제6장 남북조시대사의 제1절 북조사(北朝史)에서 발해사·요조약사·청조약사를, 제2절 남조사(南朝史)에서 고려·조선사를 다루고 있다. <조선유기> <조선사> <조선역사>에서는 조선역대전수도(朝鮮歷代傳受圖)에서 고조선으로부터 한, 부여, 숙신으로 나눠진 것으로 쓰고 있다.

여진과 한민족간의 관계에 대해 주목할 만한 기록이 있다. <금사(金史)>는 “아골타가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집안이라고 했다”라고 썼다. 이 내용은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왕가가 발해의 대조영-대야발 가계와 같다는 의미다. 또 금나라의 기원과 관련해 “금의 시조는 이름이 함보로 고려에서 왔다”라고 했다. <금지(金志)> <대금국지(大金國志)>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 등은 초기 여진 추장이 신라인이라 밝히고 있다. <흠정만주원류고>에서는 금나라 시조는 합부(함보)인데 고려에서 왔으며, 금의 국호가 신라 왕성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고려사>에는 “아골타의 시조가 고려에서 나왔다”라고 쓰여있다.

종합하면 금 시조가 신라인, 고려인 또는 여진이라 불린 발해계 인물이란 말이다. 여기서 고려에서 왔다는 ‘함보’라는 인물에 대한 북방사학자 전원철 박사의 연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알려진 대로 함보는 ‘아골타’의 7대조다. 함보의선대는 ‘금행’이며, 그에게는 ‘아고래’ ‘함보’ ‘보활리’라는 세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금행은 발해의 건국자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의 4대조다. 그래서 아골타는 대야발의 12대손이 된다. 대조영과 대야발은 고구려 왕족으로 주몽의 후예이므로, 결국 아골타는 고구려 가문의 후손이 된다. 이로써 <금사>를 비롯한 여러 사서의 기록이 이해가 된다.

여진인들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명칭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기원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으나, 고구려·발해 등 한민족 국가의 구성원이었으므로 우리와는 형제민족이라 할 수 있다. 발해는 고구려 멸망(668년) 후 고구려 유민이 건설(698년)한 나라이고, 신라 멸망(935년) 후에는 신라 유민들도 옛 발해 영역으로 다수 이주했으며, 이들의 후예가 세운 나라가 금이다. 금과 송은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으나 고려와는 대체로 큰 전쟁 없이 형제국가로 지냈다. 여진은 금 건국 전에는 고려를 부모나 형으로 여겼고, 금 건국 후에는 스스로 형이라 칭했다. 고려는 물론 조선시대에도 많은 여진인이 귀화했고 통혼도 했다. 이는 서로 남이 아니라는 역사적 인식을 공유했기 때문 아닐까?

여진은 만주에서 일어나 걸출한 지도자의 등장과 더불어 단기간 내 대통합국가를 건설했고, 중원까지 제압하면서 동북아의 패자가 됐다. 현대의 기적을 일궈낸 한민족의 성장 DNA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 여진사(女眞史)라고 하겠다.

북방민족의 마지막 제국 ‘대청’

16세기 말 임진왜란과 반란, 부패 등으로 명의 국력이 쇠퇴일로를 걷는 가운데 만주 일대에서는 해서·건주·야인 등 여진족이 세력을 키우게 됐다. 건주여진의 영웅 누르하치는 여진족을 통합해 1616년 허투알라(赫圖阿拉)에서 ‘칸’으로 즉위, 국호를 대금(大金)이라 했다. 이것이 12세기 여진족이 세운 금을 이은 ‘후금’이다. 누르하치는 이름이며, 성은 아이신교로다. 만주어에서 아이신은 ‘금(金)’, 교로는 ‘일족’을 의미하므로 김씨(金氏)라는 뜻이다.

누르하치를 이어받은 홍타이지는 만주족의 팔기군을 장악하고 외몽골과 내몽골까지 병합해 만주·몽골·한족의 다민족 국가를 출범했다. 그는 국호를 ‘대청(大淸)’이라 고치고 1636년 황제로 즉위해 청나라의 기초를 다졌으나 명나라 정복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했다.

홍타이지 사후, 아들 신치제가 다섯 살의 나이에 황제 자리를 이어받으면서 정치적 혼란이 지속됐지만 누르하치의 14번째 아들 도르곤의 섭정으로 안정을 찾게 됐다. 도르곤은 북경을 점령하는 등 중국 정복의 발판을 마련했으나 사냥터에서 돌연 사망해 순치제의 친정이 이뤄졌다. 순치제는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청 왕조 중국 지배의 기초를 닦았다.

순치제를 이어받은 강희제는 61년을 재위하며 눈부신 내치와 외정의 업적을 쌓아 청의 중국 지배를 완성했고, 이후 옹정제·건륭제로 이어지는 청 전성기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는 명의 반란을 진압하고 대만을 정벌하는 한편,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고 외몽골·티베트에 이르는 대정복 전쟁을 계속했다. 강희제가 죽은 뒤에는 치밀하고 성실한 성격의 소유자인 옹정제가 반대파를 제압하고 즉위해 황권 강화와 내정 개혁을 통해 절정기인 건륭 시대의 기반을 닦았다.

그는 외치에서도 티베트 원정을 마무리하고, 운남·귀주·광서 등 중국 남부까지 평정해 최대 영토의 기틀을 마련했다. 6대 건륭제는 63년 재위하면서 내정을 안정시키고 문화를 융성시키는 한편 준가르, 위구르, 타이완, 미얀마, 베트남, 네팔 등 광범위한 주변국 원정과 평정에 나서 청 대통일 시대를 구가했다.

건륭 말렵 이후 정치 부패와 국정혼란이 이어지면서 ‘백련교도의 난’ 등 각처에서 반란과 봉기가 일어났다. 이러한 가운데 1·2차 아편전쟁(1840, 1856년)에서 청일전쟁(1894년)에 이르기까지 외국 세력의 중국 침탈이 가속화되면서 거대한 청은 와해됐고, 1912년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가 퇴위하면서 276년 역사는 막을 내렸다. 이에 중국 마지막 왕조이자 선비, 요, 금, 원에 이은 마지막 북방민족 여진의 중국 지배는 종지부를 찍었다.

대통일제국 청과 한반도 역사

고려 말 함경도 지역에는 여진인들이 섞여 살고 있었다. 이들은 4대조가 동북면으로 이주했고, 나중에 조선의 태조가 된 병마사 이성계를 군사적으로 뒷받침한 배후 세력이 됐다. 태조는 개국 후 여진족 동화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그 이후 여진족에 대해 조선 조정은 강·온 양면 정책을 교체했다. 16세기 중반까지 중국의 분열정책으로 만주 일대에서 흩어져 살던 여진족은 누르하치가 등장하면서 세력이 규합된다. 누르하치는 명나라가 임진왜란(1592~1598년)으로 조선에 원병을 보내는 시기에 여진족을 통합해 후금을 건국하게 된다.

후금이 건국되던 1616년은 조선 광해군 8년으로, 명·청 교체기라는 대륙의 큰 소용돌이가 한반도에도 높은 파도를 일으켰다. 당시 광해군은 동북아 국제 정세를 대신들과 달리 정확히 꿰뚫어보고 명에 일방적으로 의존하기보다 등거리 외교 전략을 택했다. 후금이 요동 지방으로 진격해오자, 명은 임진왜란 당시 지원에 대한 보답을 명분으로 조선군 파병을 요구(1618년)해왔다. 광해군은 마지못해 파병했지만 명·청의 패권 전쟁인 사르후 전투 패전 후 추가 파병은 묵살했다. 이후 후금과 큰 마찰 없이 지냈으나, 광해군 15년 반정으로 집권한 인조가 명과의 관계 개선과 향명배금(向明排金) 정책을 내세우면서 후금과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됐다.

이런 상황에서 후금은 명 정벌에 앞서 배후의 조선을 미리 제압하기 위해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구실을 내세워 1627년 3만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했다(정묘호란). 조선군은 후퇴를 거듭해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했고, 이어지는 후금의 전방위 압력으로 ‘형제의 맹약’을 맺고 전쟁은 끝났다. 이후 후금의 국경침입, 신속(臣屬)과 파병 요구 등이 이어지면서 인조의 조선에서는 척화배금 분위기가 고조됐다. 이에 국호를 청으로 바꾼 태종 홍타이지는 1636년 12월 1일 직접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 침공에 나섰다. ‘병자호란’으로 불리는 이 전쟁에 서 청군은 선양을 떠나 10여일 만에 수도에 육박하는 전광석화 같은 작전으로 조선을 압박했고, 급한 나머지 일단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던 인조와 조정은 청군에 포위돼 끝내 강화도로 가지 못하고 이듬해 1월 30일 청 출병 후 2개월 만에 한강 동편 삼전도에서 항복했다. 이때 있었던 ‘쌍령 전투’의 패배는 앞서 기마군단의 전력을 설명하며 기술한 바 있다. 이후 양국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배할 때까지 지속됐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에 이르는 강희·옹정·건륭시대(1661~1799년)는 청나라 최전성기였고, 조선은 현종·숙종·영조·경종·정조(1659~1800년)가 재위했다. 이 시기 청은 대제국을 완성하고 세계와 교류하면서 문물을 발전시켰고, 조선은 청을 통해 문물 교류의 기회를 확대했다.

현대 중국의 영토는 몽골, 연해주, 카자흐스탄 일부, 대만 등을 제외하고는 청 제국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100만명도 안 되는 만주족이 1억명이 넘는 한족을 지배한 청은 다민족 국가를 형성해 강대한 국가로 성장했다. 중국 헌법 전문을 보면 “중화민국은 전국 각 민족 인민이 공동으로 건설한 다민족 통일국가”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민족의 청이 현대 중국의 모태가 된 것이다. 바로 이 중국이 지금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역사 무대에 등장했고, 한국과의 관계도 과거 어느 때보다 긴밀하다.

중국은 한국의 제1교역국이며, 한국은 단일국가 중미·일에 이어 중국의 세 번째 교역국이다. 양국은 지금 병자호란 이후 청일전쟁까지 이어진 259년간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교류와 협력의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인사이트코리아, INSIGHT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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